큰오빠 지은이:박정근 출판사:우리문학사 네 번의 인연 "엄마, 6시 내 고향 프로 시작하기 전에 광고가 나오는데, 뭐하세요?" 아버지와 승진이가 마루에 있는 소파에 나란히 앉아, 조금 있으면 방송될 승주 회사의 광 고를 보기 위해 텔레비전 화면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승주는 어머니와 김제 댁을 재촉 했다. 앞치마에 물기를 닦으며 김제 댁이 부엌 문을 나서고 뒤이어 어머니도 마루로 왔다. 그 때 마침 '바다 농산물'의 광고가 나왔다. 너른 산비탈을 밭에 거름을 내는 농부의과 뒤로 황혼이 깔린다. 손에 들린 삽을 잠시 땅 에 꽂은 후 담배로 휴식을 취하는 그는 멀리서 들려 오는 개 짖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다. 백구가 꼬리를 흔들며 뛰어오고 그 뒤를 아이들이 따르고있다. 아이들의 손엔 몇 개의 애호 박과 구기자 열매가 들려있다, 바로 옆에서 고구마를 놓던 아내와 할머니가 호미를 들고 그 에게로 다가온다. 사발 가득 구기자 차를 따라 남편에게 주는 아내의 따사로운 눈길이 저녁 노을을 등지고 클로즈업된다. '바다 농산물의 마읍은 바로 고향의 따사로움입니다. 우루과이라운드를 극복한 바다 농산 물이 이젠 IMF에 도전합니다.' 그 때까지 숨죽여 보고 있던 가족들 눈에서도 부드러움이 배어 났다 승주는 가족들의 젖 어든 눈빛 속에서 아늑함을 느꼈고 금방 잠이라도 들 것 같은 분위기를 눈앞에서 확인했다. 광고가 나오는 시간은 매우 짧았다. 그리고 바로 뒤이어 타 회사의 산만한 광고들이 뒤를 이었고, 식구들은 몇 개의 광고를 더 보다가 텔레비전에서 눈을 뗐다. "......" 이미 여러 번에 걸친 CF 시사회를 가졌던 승주는 아무 말이 없었다. 단지 식구들의 표정 을 살필 뿐이었다 옆에 있던 김제댁이 손뼉을 세게 쳤다. "이것도 다 승주가 저리 허라고 지시혀서 맨든 것이제. 참말로 잘도 만들었다야." "저야 최종적으로 결정만 했지, 전부 서울에 있는 광고 회사에서 만든 거예요." "그럼, 니가 만든 것이 아니여?" 어머니가 부엌에서 가져온 과일 접시를 내밀며 물었다. "저야 진도에서 구기자 만들어야지 광고 만들 시간이 어디 있겠어요. 서울 광고 회사에 전문가가 따로 있는데, 그 사람들이 만든 거예요." "그라믄, 지난번 전화 왔던 그 바이오 말허는 거여?" "맞아요, 그 분에게 일의 진행 보고만 받았던 거예요." "막내야!" "......" 승주가 물끄러미 어머니를 쳐다보자 나머지 식구들도 어머니를 주시했다. "그 바이오, 서울 사람이다냐?" "네, 서울 토박이라고 들었어요." "목소리가 우리 경주처럼 쩌렁쩌렁한 것이 참 달갑드라. 생긴 것도 시원하게 잘생겼을 것 같은디, 어떻다냐?" "다 똑같죠 뭐. 잘생기고 말고가 어디 있어요?" "몇 번의 전화로만 인사를 했을 텐데 어머니가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걸 보고 승주는 놀랐다. 승주는 어머니에게 자신의 마음을 조금이 라도 들킬까 봐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서울의 바이오 말이여, 그 양반 총각이제?" "알아서 뭐 하시게요. 쓸데없이 그런 것 상관하지 마시고, 나중에 제 일이나 잘 챙겨 주세 요, 아셨죠?" 승주는 사과를 깎아 접시에 담아 아버지 앞으로 내밀었다. "쟈가 재미 없게 말을 톡 자른다냐? 안 그러냐, 승진아." "예‥‥‥." 승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승진아, 과일 더 먹지 왜 벌써 일어나?" 승주가 일어나는 승진을 보며 말했다. "아녀라. 요새 괜히 하는 일 없이 피곤허고, 몸이 찌뿌드한게 잠만 많아져서 그라지라." "그라믄. 가서 쉬야제." 아버지는 승진이가 지나갈 자리를 마련해 주셨다. "예, 그럼 먼저 들어가겄어라." 승진이가 몸이 피곤하다는 건 그냥 둘러댄 핑계였다. 남산댁이 김현호에 대해 호감을 갖 고 얘기하는 걸 더 이상 듣고 싶지가 않아서 도망치듯 자리를 피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지 난번 서을 출장 중에도 승주에게서 뭔가 다른 감을 느꼈던 게 사실이다 이제까지 승주와 같 이 지내면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다른 남자에 대한 정도 이상의 관심을 승주에게서 느낄 수 있었다. 방금 식구들에게 처음으로 김현호가 노출되자 승진은 재빠르게 승주의 표정을 살폈다. 예 상대로 승주는 연한 미소가 계속 맴돌았지만 그것을 애써 보이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정확하게 꼬집어 감정을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승진의 기분이 상 한 건 사실이었다. 그것을 내색하지 않기 위해 다른 핑계를 대고 일어선 것이다. 승진은 승주와 오누이처럼 함께 자랐다. 승진이가 따로 형제가 없었기 때문에 승주 형제들 과 친형제처럼 지냈고, 김제 댁이나 남산 댁도 내내 그러기를 바랐다. 승주와는 다섯 살 차 이가 났지만 어려워하지 않고 서로 가깝게 지냈고, 승진은 친누나 이상으로 잘 따랐다. 어렸을 적부터 승진은 맛있는 게 있으면 제일 먼저 승주에게 갖다 주며 좋아했고, 숙제를 하다 모르는 것이 있을 때에도 역시 승주에게 제일 먼저 달려가 물어 보곤 했다. 큰형 경주 나 민주, 건주, 희주는 모두 터울이 좀 졌기 때문에 약간 어려웠다. 승주 역시 승진을 친동 생처럼 잘 데리고 놀았고, 마실을 나가거나 친구들과의 모임에서도 제 동생처럼 예뻐하며 승진을 아꼈다. 승주는 속이 깊은 아이였다. 그런 승진을 감싸는 것을 보면 더 더욱 그랬다. 큰오빠 경주 에게서 받은 사랑을 승진에게 내리 사랑으로 주었는지도 모른다. 제 방에 누운 승진은 천장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승주의 표정이 머릿속에서 쉽게 지워 지지 않았다. 천장위 동그란원속에서 그녀 모습이 물방울처럼 동동 떠다녔다. 아까 잠시 마 루에서 현호 얘기를 할 때 봤던 승주의 발개진 얼굴은, 좀처럼 보기 힘든 그녀의 여성스런 모습이 드리워져 있었다. 승주와 초랜 시간을 단짝처럼 지내 왔던 승진이 알아차릴 정도라면 승주의 김현호에 대한 관심은 어느 정도 있다고 해도과언이 아닐 것이다. 승진이 30여 분을 같은 자세로 누워 있 다가 조용히 입 모양을 바꿨다. "누나‥‥‥‥" 그렇게 열었던 입은 닫힐 줄 몰랐다. 몸살을 앓듯이 승진은 방바닥에서 뒤척이기 시작했 다. 형광등 아래로 어디선가 나방이 날아 들었는지 퍼드덕거리며 왜나 요란스럽게 발버둥이 를 쳐댔다. 승진은 입에서 자꾸 새어 나오는 소리를 감히 밖으로 내뱉지 못하고 오물오물하 다가 속으로 삼켜 버렸다. "승주야‥‥‥" 승진은 몸을 뒤척이다가 잠들어 버렸다. 마루에서는 승진을 제외한 식구들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무슨 말인지 잘은 모르겄지만 어쨌든 우리 승주가 만든 구기자가 저렇커롬 테레비에 나 오니 내사 꿈만 같어 부렀어라. 안 그라요, 승주 아부지?" 아버지는 승주를 지그시 바라보며 장하다는 듯이 승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수고했다야. 인자는 밖에 나가믄 사람들이 우리 구기자로 목 축이는 것도 자주 보겄구 만." "다 지 복이지라. 다들 너나없이 시골을 떠도 여그 진도는 구기자 심느라고 몰려들 것 이요이. 요새 동네 나가믄 여자들이 다 승주네 회사같이만 되라고 입이 닳도록 얘기합디다. 싹이 있는 집안은 평지풍파를 당해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들 말하제라." 부엌으로 향하던 김제 댁이 맞장구를 쳤다 김제 댁이 무심코 한 그 말 한 마디는 승주의 가족 모두에게 있어서 쉽게 아물지 않는 아 픔이었다.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질곡들이었던 것이다. 그 때의 기억들이 악몽처럼 엄습해 왔다. 압류당한 집안 형편에도 논밭에 매일같이 나가 서 일을 하던 아버지의 초라한 뒷모습과 부엌에서 몰래 숨죽여 울던 어머니의 움츠린 모습 이 삽시간에 승주의 눈앞에 펼쳐졌다. 승주는 진저리치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게 잊으려 하면 할수록 기억들은 더 단단하게 그 녀의 뇌리에 와 박혔다. 그러고는 좀처럼 떠날 줄을 모르고 그녀가 잠들었을 때에도 종종 어둠 속에서 찾아들곤 했다. 그럴 때면 온몸이 땀에 흥건히 젖어 가위에라도 눌린 듯 잠에 서 깨어났다. 오히려 그렇게 잠에서 깨어날 때가 속 편했다 꿈이 너무 생생하다 보면 꼭 현 실처럼 느껴지는 법이었다. 요즘 들어 더욱 바빠진 승주는 자주 그 때의 악몽을 꿈 속에서 만나야 했다. 그래서 많은 시간 동안 수면을 취했어도 아침마다 피로를 느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승주는 자신의 시선을 텔레비전에 고정시킨 채 아버지와 나란히 앉아 '6시 내 고향'이라 는 프로를 보았다 시선만 그 곳에 있을 뿐이지 승주의 생각은 딴 곳에 가 있었다. 승주의 눈을 들여다보며 아버지가 말했다. "요새 고단하지야, 서울 댕기랴 공장들 돌아보랴. 그란디 니도 서둘러서 시집을 가야 쓸 것인디 숨겨 논 짝 하나 없다냐?" 승주는 아버지의 마지막 말꼬리를 그제서야 붙잡았는지 고개를 돌리며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아버지,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아버지는 싱겁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원 젊은 애가 어디다 그라고 정신을 빼놓고 사냐. 내 자식이라도 알다가도 모르겄어." 잠시 후 부엌에서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저녁 준비 다 됐응께 빨리 드시요이." 어머니가 밥상을 들고 작은 방으로 들어가셨다. 얼마 전부터 할머니는 따로 독상을 보셨 다. 그래서 식사 준비가 끝나면 어머니는 상을 따로 들고 할머니가 계신 작은 방으로 먼저 가셨던 것이다. 모두들 상에 둘러 앉았다. 승주가 숟가락을 들어 아욱국을 입에 넣으려고 할 때 전화벨이 울렸다. 김제 댁이 일어나서 전화를 받았다. "여보쇼이, 여긴 상원리인디.」 "김현호라고 합니다. 실례지만 이승주 씨 부탁합니다." "저기 회사 사람이랑가?" "아, 아닙니다. 서울 광고 회사라고 하면 아실 겁니다." "총각, 끊지 말고 기다리쇼이." "승주야, 전화 받거라." "어디예요?" "서울이랴. 광고 회사라고 안 허냐." 승주는 김제 댁이 서울이라고 하는 말에 마루에 있던 무선전화기를 들고 2층 방으로 훌쩍 들어가 버렸다. "김제 댁. 친구헌테 온 전화랑가?" "친구는 아니고 서울 사람이지라. 승주네 회사 광고 맨들어 준 사람인가 싶은디 저도 잘 모르겄어라." "그랬당가? 알겄네." 남산 댁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뭔가 잘 되어 가는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예, 전화 바꿨습니다." "김현호입니다. 쉬는데 방해가 되지 않았나 모르겠어요." "무슨 말씀을‥‥. 이제 초저녁 인데요, 뭘." "방금 직원들하고CF나가는 걸 봤습니다. 보셨죠?" "네. 텔레비전으로 보니까 느낌이 또 다르더라구요. 참 좋았어요." 승주는 그제야 현호가 다른 이유가 아닌 광고 때문에 전화한 것에 실망했는지 목소리가 처음보다 가라앉았다. "저희도 광고 보고 지금 저녁 먹던 참이에요. 김 이사님이 애써 주신 덕분이에요. 언제 한 번 찾아뵈야 할 텐데..." "나중에 서울 올라오실 일 있을 때 한 번 들러 주세요. 일부러 찾아 올 것까지는 없구요." 현호의 말에는 승주를 배려하는 마음이 묻어 있었다. "무슨 소리예요. 당연히 인사드리러 가야죠. 안 그래도 장상무님도 한 번 뵈야겠다고 하시 던걸요." "그렇게 해 주시면 저야 고맙죠." "요즘은 어떠세요, 바쁘세요?~ "그럼요. 놀 틈이 있나요? 지금도 일하는 중이에요. 저희들은 지금 초저녁이죠." "일을 좋아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리듬을 가지고 살 수 있겠어요. 건강 조심하세요. 일을 하고 싶어도 못 하는 사람도 많은데 거기에 비하면 김 이사님은 행복한 거예요." "하하하, 걱정해 주시니까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기분도 좋구요." "특별히 해 드린 일도 없는데요, 뭘..." "자꾸 신세만 지면 다신 얼굴 못 보는데 큰일이군요. 참, 지난번에 사장님이 보내 주신 음 료수 덕분에 직원들이 시원하게 잘 마시고 있습니다. 저희야 그저 상품이 제 값을 하면서 지역발전에 일조한다면 그걸로 보람을 느끼는 거죠. 그리고 다음에 신상품이 나와서 다시 한 번 같이 일하게 된다면 저희에겐 더욱 좋은 일이죠. 이거 식사하시는 데 너무 말이 길어 졌습니다. 제가 또 나중에 연락 드리겠습니다."」 "신경 써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럼, 이만." 전화를 끊고 내려오는 승주를 보고 있던 어머니가 궁금해하며 물었다. "누구다냐?" "예, 광고 회사 김현호 이사예요. 방금 전에 광고 봤냐고 확인 전화한 거예요." "참, 그 사람 자상도 혀다. 남자가 너무 털털해도 못쓴단께. 자상하게 챙겨 주는맛이 있어 야지 안 그러냐?" "예의상 연락한 거예요. 개인적인 일로 전화한 거 아니니 신경 쓰지 마세요." "이상허다. 승주, 너 그 사람 얘기만 나오면 오히려 더 부정적으로 말해 버리는 경향이 있 는디, 왜 그런다냐?" "왜 그러긴요. 일로 만난 사람인데 어머니가 너무 관심을 보이니까 그렇죠." 승주는 자신의 감정을 들키지 않으려고 일부러 태연한 척 얼버무렸다. 어머니는 몇 번씩 현호에 대해 물어 보더니 방문을 닫고 나가셨다. 작은 방에서 할머니 진지 수발을 거드시는 지 숟가락과 그릇 부딪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 왔다. 승주는 부엌을 향하면서 누가 들을세라 혼자말을 했다. "은영 오빠가 소개해 준 사람인데 어련하겠어요." 승주는 오늘, 확장 개간된 산비탈 구기자밭을 직접 시찰했다. 시찰이란 말보다는 자기 집 뒤뜰에서 크는 딸기나 나물새들을 둘러본다는 말이 더 어울릴 것이다. 승주에게 구기자밭은 자신의 일부나 다름없이 늘상 가까이에 있었다. 밭을 둘러보던 승주는 어느 새 구기자 나무 들이 그녀의 어깨에까지 닿을 만큼 자란 것을 보고는 뿌듯함에 젖어들었다 더 이상 하늘로 뻗을 수 없다는 듯이 팽팽하게 땅으로 늘어진 가지들마다 소담하게 꽃망울이 맺혀 있었다. 승주를 따라 나선 승진도 그녀의 뒤를 따르며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찬 녹색빛으로 일 렁이는 구기자밭을 거닐었다. 어느 새 달려왔는지 농장 관리인이 승주 앞으로 와서 꾸벅 인 사를 했다. 승주도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풍성하게 자란 구기자잎을 만지며 입을 열었다. "구기자가 제법 많이 자랐네요. 아래쪽은 나무 키가 좀 낮던데 거기는 품종이 다른 건가 요? 아니면 이쪽 토질이 더 좋아서그런 건가요?" 관리인은 질문의 의미를 파악한 듯 아래쪽 밭을 바라보면서말했다. "예, 그건 이 위쪽이 개량종이라서 그렇습니다. 아래쪽은 원래 진도 순토종 구기자고, 금 여기 있는 것은 재작년에 심은개량종입니다. 아주 생장률이 좋고 생산량이 많아서 호응이좋 습니다. 그런데 토종보다는 끈기가 좀 떨어져서 진도 특유의 구기자 맛은 제대로 내지 못하 는 결점이 있죠." 승진도 흥미로운지 관리인이 하는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집중해서 들었다. 관리인은 옆에 세워 둔 삽을 들며 승주에게인사를 하고 종전에 왔던 쪽으로 사라졌다. 승주는 총총걸 음으로 사라져 가는 남자를 보면서 승진에게 말했다. "저 사람 서울에 있는 농대를 나와서 어느 회사 연구원으로있었대. 그런데 정리하고 갑자 기 시골로 내려와 버렸다고 하더라, 그러기가 쉽지 않을 텐데 말이야." 옆에서 듣고 있던 승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미 알고 있었다는 눈짓을 해 보였다. "저 사람을 보면 꼭 경주 형님을 뵙는 것 같어라." 승진의 말을 들은 승주는 더욱 큰오빠 생각이 간절해졌다. 며칠 전 독일에 갔다 귀국한다는 연락이 왔었는데 그녀는 통화를 하지 못했다. 두 사람은 초원 위를 나는 한 쌍의 나비들처럼 그 광활한 구기자밭을 가르며 한껏 자연에 젖어들었다. 농장 입구로 내려온 승주는 농장 한쪽에 마련해 놓은 정자아래에서 햇빛을 피했다. 산정 에서 바람이 불어 올 때마다 검푸르게 물결을 일으키는 구기자밭을 바라보니 승주의 가슴은 올 가을에 거둬들일 구기자를 떠올리며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난간에 걸터앉았던 승주는 모둠발로 다시 한 번 산비탈을 바라보았다. 가을이면 온통 다 홍빛으로 물들 임야를 생각하면서 그녀는 큰오빠를 속으로 불러 보았다. 승주는 오빠를 대신해서 농장을 경영하기로 했지만 사실 앞이 막막했다. 광주에서 짐을 정리해 낙향한 승주는 전에 오빠가 쓰던 방을 사용하기로 했다. 원래는 사랑채에 그녀의 방 이 따로 있었지만 농장 일을 하려면 전화 사용도 그렇고 해서 안채에 비어 있는 오빠 방을 사용하기로 한 것이다. 방을 치우다가 승주는 오빠의 수첩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수첩은 경주가 대학원에 수석 입학했을 때 기념으로 대학 총장으로부터 받은 것이었다. 수첩을 넘기던 승주는 오빠가 이 전에 기획해 놓았던 식품 가공 공장에 대한 사업 계획서를 보게 되었다. 그토록 치밀하게 구상을 해 놓고도 자금 문제로 접어 놓을 수밖에 없었던 오빠의 심정을 생각하면 승주는 가 슴이 아팠다. 승주는 수첩을 보며 그 당시 혼자 고민하고 방황했을 오빠를 떠올릴 수 있었 다. 그러나 아쉽게도 오빠가 구상해 놓은 상품에 대한 자세한 노하우는 아무리 찾으려 해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분명 오빠의 머릿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을 것이다. 깨알 같은 글 씨지만 누가 보아도 금방 알아볼 수 있는 내용들이었다. 더구나 식품 공학을 전공한 승주는 누구보다 이해가 빨랐다. 승주는 구기자 사업 계획서를 손에 움켜쥔 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농장 경영을 책 임지게 된 승주에게 오빠의 사업계획서가 환희와 감동으로 벅차 오르는 것만은 아니었다. 자신보다는 몇 배나 더 고향의 발전을 꿈꾸며 특산물 특화 사업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오 빠의 이상을 실현시킬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처음에 승주는 그것을 오빠처럼 묻어 두려고 했지만 어느 날 김제 댁과 얘기하던 중 무심 코 오빠의 사업 계획들에 대해 말하게 되었다. 그런데 잊고 있는 줄 알았던 김제 댁은 아들 제사 때문에 귀국한 고씨 할머니에게 그 일을 귀띔한 것이다. 제사를 지내고 한 15일 더 머 물던 고씨 할머니는 저녁을 들고 난 후, 승주를 불러 김제 댁에게서 들은 가공 공장 얘기를 물어보았다. 승주는 오빠의 수첩에 있는 계획들을 고씨 할머니에게 자세하게 말씀드렸다. 사업 계획서를 읽어 달라는 김제 댁과 고씨 할머니의 재촉에도 승주는 온통 오빠가 일궈 낸 구기자 농장과 가공 공장 사업계획서만이 머릿속에서 파고를 칠 뿐이었다. 오빠는 고향의 특산물 구기자를 특화하여 국내외로 유통시키는 것이 꿈이었다. 지금이라 도 승주는 오빠의 사업 계획서를 발견한 것이 다행이라 생각되었다. 오빠는 옛날부터 언제 나 제자리를 벗어날 줄 모르던 구기자 농업을 보란 듯이 발전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한가한 날 집에서 해 먹는 술이나 떡의 재료로만 구기자가 사용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쩌면 옥토의 진도가 그저 조그만 섬으로 남지 않길 바랐는지도 몰랐다. 지역 발전과 재정 자립을 위해서라면 고장의 유일한 특산물인 구기자를 특화하는 과정에 서는 차라리 정부의 농수산 부처나 자치 단체에서 더욱 성의껏 관심을 보이고 지원을 했어 야될 거란 기대가 아쉬움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핵심이 없고 방만하기만 한 자치 단체와 농수산 부처의 역할은 현재로서는 기대할 수 없었다. 농촌의 한 젊은이로서 농촌의 후손답게 구기자 농가의 발전을 꾀하며 한국 농촌 경제 기반을 확충할 수 있는 구기자 특화 사업을 위한 각고의 노력 끝에 사업 계획서를 완 성한 오빠가 자랑스러웠던 것이다. 계획서 사이사이에 이리저리 분주히 발길을 옮기며 뛰어 다니는 오빠의 모습이 배어 있었다. 오빠는 무엇보다 구기자 상품 특화는 물론 지방 재정 자립의 극대화를 위한 구기자의 국 제적 상품화를 꿈꿨다. 계획서를 들여다보는 승주의 곁으로 김제 댁이 다가왔다. 그녀는 가만히 승주를 보고 있 었다 승주는 눈을 돌려 김제 댁에게 뭔가를 말하려다 다시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그런 행 동이서너 번 계속되었다. 김제 댁은 그런 승주의 태도에 사뭇 당황하며 묻지 않을 수 없었 다. "뭐 헐 말이라도 있다냐?" 승주는 김제 댁과 고씨 할머니를 번갈아 보며 입을 열었다. "이건 오빠가 며칠 밤을 새워 가면서 세운 계획서인 것 같아요. 이렇게까지 오빠가 구기 자 사업에 열의가 있었는지는 몰랐어요." 찻잔을 받쳐 들고 있던 고씨 할머니는 촘촘히 씌어진 계획서 앞으로 고개를 내밀며 침침 한 눈을 연신 비벼 댔다. "거기에 머시라고 써졌다냐? 그냥 까막눈에 침침허기까지혀서 그냥 시커먼 글씨들만 뵌다. " 계획서를 읽던 승주에게 김제 댁이 물었다. "물이라도 가져올 거나?" 승주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넘겼던 수첩의 첫 장으로 돌아갔다. "오빤 정말 농촌을 사랑하는 사람인 것만은 틀림없어요. 이렇게까지 세세하게 고향을 생 각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거예요. 제가 그냥 읽어 드릴게요. 듣다가 모르시는 거 있으시면 말씀하세요.」 승주는 연필로 수첩을 짚어 가면서 항목들을 차근차근 읽어내려갔다. 김제 댁은 가져온 물을 승주 옆에 내려놓았다. 사업 목적 구기자 상품 특화 및 지방 재정 자립 활성화에 따른 유통과정을 단계별로 개선하여 국제 적 경쟁 상품으로 발전시키는데 있다. 구기자 생산지 진도군 군내면 상원리 산 577번지 25만 평 임야 및 진도군전 지역 재배 농가 대상. 공장 설치 장소 및 시설 진도군 군내면 상원리 산 577번지 1만 평 규모에 단계적으로 설치한다. *보관 및 적재 가공, 건조 시설, 창고, 출.하역장, 사무실, 주차장 등 여기까지 인자 고씨 할머니가 물었 다. "그라믄, 저그 산에다 공장을 맨든단 말이제? 그람 좋제, 좋아. 벽파진 앞바다가 출렁이 는 공기 좋은 우리 야산에 가공 공장을 설치해 놓고 바로 구기자밭에서 열매를 따다가 출하 하면더 좋을 것이 머 있능가. 예로부터 벽파진 항구는 진도의 관문이었고 지금 한 삼십 줄 이상이면 누구든 벽파진 앞바다를 안건널 수가 없었단께. 말이 나왔응께 말이제, 벽파진은 항구로도 유명하지만 싱싱한 어시장과 우리 구기자 상품을 함께 내놓아 시장을 열면 관광지 로는 으뜸이제. 암, 그럴 것이여 ."물을 마신 후, 승주는 사업 계획서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구기자의 일반 특성 구기자는 일명 생약재로 구기엽, 지골피라고도 부른다. 구기자의 생산지로 적합한 곳은 비 옥한 토질을 가진 진도 지방 일대가 가장 좋다. 구기자는 낙엽성이며 줄기는 원추형이다. 또한 독특한 가지가 있으며 잎은 나무 줄기마다 뻗어 있다. 구기자는 해마다 9월경에 자줏빛의 작은 꽃들이 뭉쳐서 핀다. 화칸 안에는 작게 자색의 줄이 피며 열매는 가을에 적색으로 익어 특유한 냄새가 나며 자체에는 약간 쓴맛과 단맛이 있다. 구기자는 생활의 모든 면에 쓰이며 특히 허약 체질을 개선하고 강장제로서 예로부터 한방 의 약재로 사용되어 왔다. 한의학에서는 구기자 열매를 다양하게 사용하고 있으며 뿌리는 당뇨와 소염제, 해열 및 수험생 기억력 유지로 매일 음용하면 건강 체질 보호에 좋다. 구기자의 생장 토질은 사질토나 식질토를 가진 지역이 유리하다. 생성 장소로는 집 안의 뜰이나 임야, 전답 어디에서나 잘 자라는 농작물이다. 구기자의 번식은 삽목(꺾꽃이)에 의해 이루어지며 그 시기는 이른 봄부터 늦가을까지 할수 있지만 가장 적기는 봄과 가을이 좋다. 구기자는 삽목이 끝나면 마른 볏짚이나 등겨를 뿌려 주고 물을 충분히 주어야 한다. 삽목 한 후 한 달 정도면 나무에서 새싹이 나오기 시작한다. 삽목은 겨울을 피해야 하며 삽목한 나무에서 새싹이 3센티미터 정도 자라면 3개 정도의 가지를 뭉쳐 다시 한 터울로 심으면 된 다. 이 때 폭은 40센티미터 간격으로 하면 되고, 한 터울에 심은 나무에 흙을 3분의 1가량 쌓이도록 하면 된다. 구기자는 심는 방법이 편하고 어느 장소, 누구든 관리할 수가 있어 특용 작물로 재배하는 것이 유리하다. 또한 구기자는 번식률이 높아 집 안에는 몇 그루만 심어도 충분하게 약용이 나 음용으로 사용할 수 있다. 구기자는 다른 작물과 달라 일반적인 화학 비료를 쓰지 않고 퇴비, 짐승의 분, 식물 썩힌 것들을 비료로 사용하면 된다. 구기자 잎은 1년에 5회 정도 절단해 주면 되고 새싹이 30센티미터 정도 자랐을 때 수확하 면 된다. 이것을 건조한 통풍에 말리고 구기자 열매는 붉게 익은 것부터 여름 하순부터 늦 가을까지 따면 된다. 병충해를 방제하는 방법으로는 타고 남은 땔감으로 재를 뿌려 주면 좋다. 구기자의 뿌리 는 흙을 털어 내고 씻은 다음 건조시켜 약용으로 쓰면 된다. 구기자의 상품 가치는 이루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구기자를 차로 마실 때에는 잎을 넣고10분 정도 끓이면 되고, 구기 자 술은 가정에서도 얼마든지 담글 수가 있다. 구기자 열매 300그램에 소주 2리터를 섞어 봉합하여 음지에 두었다가 3개월 후 손님 접대용으로 사용하면 된다. 구기자 뿌리 역시 위 의 방법과 동일하다. 구기자 잎으로 전을 부쳐 먹으면 어린이 간식용으로 그만이다. 구기자 열매와 잎을 적당 히 찹쌀과 섞어 구기자 죽을 끓여먹어도 입맛을 돋구는 데 좋으며 구기자 열매와 잎을 9:1 로하여 구기자 떡을 만들어 먹으면 별미로 먹을 수 있다. 승주자 잠시 읽는 것을 멈추자 감탄하듯 김제 댁이 말했다. "어떻게 젊은 사람이 우덜보담도 구기자를 더 잘 안다냐. 아이고 우리가 배어야 쓰겄구 먼." "정말 오빠는 대단한 사람이에요. 다른 건 몰라도 지역 발전에 대한 오빠의 관심은 하나 부터 열까지 빈 틈이 없어요. 이렇게까지 준비해 놓고 실현하지 못해 오빠의 마음 고생이 얼마나 심했을까 싶어요. 정말이지 쉽게 발을 뗄 수가 없었을 거예요." "그래, 누가 아니라냐? 시상에 느그 오라비 같은 사람이 또있을라구." "나머지도 마저 읽어 보거라." 고씨 할머니가 목청을 세워 승주에게 말핼다. 가공 공장 생산품 구기자 드링크, 구기자 캔 음료, 구기자 스넥, 구기자 사탕, 구기자 떡, 구기자 쥬스, 구기 자주, 구기자 엿 등 소비자의 기호에 따라 단계적으로 다양화시킨다. 직원 복지와 후생 대책 복지에 있어서 직원들이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식당 및 구매 활동이 용이하도록 매점 을 설치하며. 출퇴근시 회사 버스를 이용하도록 한다. 기혼 여성 직원들의 펀의를 위해 탁아 소를 설치하고, 직원들의 애사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단체복을 입도록 한다. 직원들에게 공제 긍융을 보장함에 있어서 경조금, 대여금,후생금, 보험금 및 기타 산재 예 금 제도를 실시한다. 직원들의 의료 보건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또한 회사 장기 근 속자에 대해서는 급여 누진제를 실시하고 퇴직자에 대한 노후대책을 회사 차원에서 지원한 다. 갑자기 승주의 입을 가로막으며 김제 댁이 손뼉을 쳤다. 김제 댁의 행동에 고씨 할머니도 놀란 듯 안경을 손끝으로 들어올리며 김제 댁을 쳐다보았다. "엄니, 정말이제 경주 속이 꽉차 부렀어라. 어짜면 저라고 가족이든 남이든 정 많게 생각 혀 주는지 모르겄단께. 승주야! 니는 복도 많다. 안 그렇냐? 저렇게도 정 많고 영리한 큰오 빠를 뒀으니 말이제.」 "그래, 우리 며느리 말이 맞다." 승주는 더욱더 상기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마저 읽어 내려갔다. 지역민의 노동력에 대한 보장 지역 발전 사업이므로 최대한 구기자 재배와 가공 및 생산, 출하와 관련하여 우선적으로 지역민들을 생산 현장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여 부락민들의 소득을 높일 수 있도록 한다. 한참을 읽고 있던 승주를 고씨 할머니가 말렸다. "됐다, 그만하면 알겄구만." "아직도 많아요. 공장 설계 등 그 노하우가 가득하거든요. 그리고 또..." 승주는 아쉬운 듯 고씨 할머니를 쳐다보았다. "아니다, 잘 알았구만. 그 정도면 됐다." "예 . 할머니." 중간까지 읽은 승주는 남아 있던 물을 마셨다. 이미 20년이 넘게 미국 생활에 젖어 있던 고씨 할머니도 경주의 사업 계획서를 들으면서 몇 번이고 경주의 구상이 옳다는 말을 연거푸 하셨다. 다 듣고 난 고씨 할머니는 승주의 의향을 물었다. "얘기를 다 듣고 난께 경주놈에게 믿음이 가는디. 그럼 앞으로 니는 으짤 작정이냐?" "제가 전공한 것과 같은 분야이기도 하고 오빠의 지역 사랑이 담긴 실질적인 계획들이기 에 접어 두기가 너무 아까워요. 그래서 우선 이번 여름부터 공장 신축을 시작할까 해요. 그러고 나서 유통도 익히고 자체 상품도 개발하고 오빠의 계획대로 단계적으로 해 보고 싶어요." 승주의 말을 듣고, 고씨 할머니는 근심스러운 듯이 말했다. "구기자는 산을 갈아서 심은 것인께 괜찮지만 어디 그만한 자본이 있어야 보란 듯이 사업 을 헐틴디." "자본금은 우선 농협이나 은행에서 대출을 받으려고 해요." "대출을 받을라믄 보증인을 세워야 허는디 사람들이 보증을 잘 서 주지 않을 틴디‥‥‥‥. 그래서 말인디 어차피 나도 느그집에 신세진 거 갚으려면 한도 웁겄지만 이번엔 나한티 한 번 맡겨 봐라." 그 말을 남기고 고씨 할머니는 다시 뉴욕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승진이 고모가 귀국했다 뉴욕에서 살고있는 승진의 고모는 상당한 재력가였다. 부동산 중개 법인을 운영하는 남편과 사별하고 지금은 늙은 어머니와 두 자식과함께 살고 있었다. 그녀가 뭔가 뜻 깊은 일을 하고 싶었다며 승주에게 선뜻 사업 자금을 내놓았던 것이다. "저희 어머니께서 어려울 때 많이 도와 주셨다며 한 동기간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모른 체 하고 있을 수 없다고 하시더군요. 더군다나 이번 사업이 이 곳 진도의 발전을 위한 것이라 서더욱 돕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이 곳은 제 고향이기도 하니까 거절하지 않았으면 좋겠 어요." 승진이 고모는 간절한 눈빛으로 승주에게 말했다. 이미 변호사 사무실에 들러서 공증까지 마친 그녀는 고씨 할머니의 간단한 음성이 담긴 테이프까지 전해 주었다. '산모퉁이에, 내가 죽거든 묻힐 땅뙈기만 남겨 주믄 그걸로 족혀. 그라고 한 가지 더 바라 는 것이 있다믄 그 산이 곧 구기자로 덮힐 것이지만서도 아들이 죽은 뒤로 민둥산이 된 지 오래였제. 내 이참에도 한국 가서 그 덤불만 무성한 민둥산을 보고 가슴이 무척 쓰렸네. 개 간을 하고 남은 땅일랑 나무를 심어주었으면 좋겄네‥‥‥. 녹음된 테이프를 듣던 승주는 오빠 생각이 간절하게 났다. '지금 큰오빠가 곁에 있었으면 참 기뻐했을 텐데‥‥‥.' 하지만 승주는 그 사업 추진을 당분간 오빠에게는 비밀로 하기로 가족들과 약속했다. 공부를 하기 위해서 올라간 오빠에게 다시 염려를 끼칠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대신 모든 것을 우영과 긴밀한 연락 을 취하면서 일을 진행해 갔다. 우영 역시 경주와의 우정을 위해 승주와 함께 경주의 계획들을 착실히 실행해 나갔다. 고씨 할머니로 인해 다시 일어설 기회를 얻은 승주는 먼저제조 가공 공장 설립을 위해 사 람들을 모았다 우선 공장 부지를 다지고 기초를 세우는 작업은 김 의원의 도움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그가 소개시켜 준 중장비 기사들이 공장 부지를 성실하게 닦아 준 덕분에 그 다 음 일들은 수월하게 진행시킬 수 있었다. 초여름에 접어들면서 승주는 본격적으로 공장 설립에 박차를 가했다. 우영이 관공서를 돌 며 관련 서류 준비를 도와 준 덕분에 승주는 진도를 벗어나지 않고서 곧장 건설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승주는 건설 일에 경험이 풍부한 김 의원에게 공사를 감독해 줄 것을 부탁 드렸 다 김 의원은 승주의 제의를 받아들였고 그는 어느 감독관 못지않게 아주 꼼꼼히 작업을 확 인해 가며 공장 건설 일을 도맡아 처리했다. 일은 생각보다 빠르게 진척되었다. 그래서 승주는 틈이 나는대로 인근 도시에 있는 농공 단지를 돌아다니면서 유통 구조 익히기에 빠듯한 날들을 보냈다. 공사가 시작된 지 6개월 만에 공장이 완공되었다 완공식이있던 날은 콧날에 스치는 바람 이 제법 차가워진 2월이었다. 그제서야 승주는 광주에서 학교 공부로 하루가 바쁘게 생활하 고있는 오빠의 얼굴을 떠올렸다. 연락하면 금방이라도 달려와서 휘둥그래진 눈으로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을 오빠였지만 승주는 오빠의 학업을 위해 알리지 않기로 했다. 그러고선 오 빠와 만났을 때를 혼자 상상하며 흐뭇함에 젖었다. '이게 다 큰오빠 덕분이야. 사실 큰오빠가 구상해 놓은 걸 나는 단지 그대로 실천했을 뿐 이야. 미안해, 사실을 숨겨서. 다시 공부 시작한 오빠에게 부담 주기 싫어서 일부러 숨긴 거야. 이해해 주는 거지?' 그 때 승주는 오빠의 수첩을 움켜쥐고 환희의 눈물을 흘렸다. 이제 그녀에게 남겨진 일은 구기자 자체의 상품화 방안이었다. 대부분의 대학이 방학이었지만, 승주는 대학 연구소와 한 국 식품 개발 연구소를 찾아다니며 구기자의 음 ·복용에 대한 연구 자료들을 수집했다. 특히 전남 대학 식품 공학과를 졸업한 승주는 모교의 교수진이 진행 중이던 구기자의 식 품화에 관한 결정적 단서를 제공받을 수 있었다. 교수 중에는 이미 오빠의 적극적인 노력에 감동하여 구기자 식품 개발의 노하우를 전달해 준 교수도 있었다. 구기자엔 신진 대사를 돕는 성분이 함유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눈에 영양을 공급해 주어 시력을 보호해야 하는 수험생들에게는 더없는 건강 식품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기타 구강 질환이나 각기병을 예방하는 비타민이 풍부하게 들어 있으며. 특히 비타민 C가 많이 함유되어 있어서 세균에 대한 저항력을 키우는 데 큰 역할을 한다. 겨우내 그녀는 쉴새없이 전국을 돌아다니며 구기자에 관한 정보 수집으로 시간을 보냈다. 이듬 해 봄이 되면서 공장 내에 작은 실험실이 마련되었고 본격적인 연구 작업에 들어갔 다. 또한 제도적인 절차를 거쳐 인가를 받아 '바다 농산물' 이란 현판을 내걸고 회사를 열었 다. 상호에 '바다'가 들어간 것은 오빠의 사업 계획서 안에 미리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또 한 가족 회의에서 나온 이름으로 보배섬 진도를 이어 태평양을 표방한다는 의도에서 연유된 것이기도 하다. 그렇게 회사명까지 정한 승주는 공개 채용을 통해서 직원들을 모집했다. 작은 회사라서인 지 사람들의 호응이 기대만큼크지는 않았지만 공채였기 때문에 능력 있는 사람을 채용할 수 는 있었다 그 때 장 상무를 처음 만났다 그 당시 상무가 아닌 부장이었지만 점차 회사 규모가 커져 상무로 승진된 것이다. 장 상무는전국 4H 연합회장을 젊은 시절에 역임하고 농촌 지도소에 서 지도소장직에 오를 만큼 그 곳에서 몸이 굵은 사람이었다. 그런 자리를 박차고 뜻이 있 어 바다 농산물 공채에 응시했던 것이다. 회사의 조직이 체계화되면서 사업은 날로 번창해 갔다. 그해 가을 첫 수확을 통해 만든 식품이 구기자를 발효해 빛은 구기자주였다. 그러나 아직 판로가 개척되지 않은 때라서 대 부분이 농협을 통해서 시판되었고, 승주는 직접 소비자들과 만날 유통 구조를 확보할 수 있 는 방법을 고민해야 했다. 그러던중 우영의 소개로 큰오빠의 대학 후배들이 그녀를 찾아왔 다. 그들은 아르바이트로 직접 홍보를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을 했다.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인 승주는 전국 5대 도시와 수도권 지역에 직접 홍보를 시작했다. 그 결과 인근 도시 들과 대도시 세 곳에 대리점을 낼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이 때부터 대기업으로부터 계약 제의가 들어왔지만 오빠의 계획서와는 상반된 조건일 뿐 아니라 승주 도 원하는 바가 아니라 단번에 거절해 버렸다. 첫 출하 상품인 구기자주에 대한 소비자들의 반응이 좋자 승주는 김제 댁의 제의로 흑염 소 농장을 산 옆에 따로 마련하여 이듬 해부터 구기자 즙과 더불어 흑염소도 시판했다. 사업을 시작했지만 운영하는 게 만만치 않았다. 대리점을 개설할 때도 자신이 여자면서 나이가 어려 그들과 거래하는 데 많은 애로점이 있었다. 승주는 그럴수록 더욱 당차게 행동 해야만 했다. 승주는 거의 매일같이 우영에게 전화로 긴 시간 동안 자문을 구했다. 그러나 승주가 걸어 야 할 길은 너무나도 멀었다. 오빠가 없는 자리에 혼자 힘으로 거래처를 개설하고 중소 도 시를돌아니기엔 하루가 벅찼다. 그나마 공장 업무와 작물 실험은해 볼 만했지만 도무지 소 비자를 파고드는 유통 면에 있어 제품에 대한 소비자들의 기호와 시장 인식도에서 자신이 서질 않았다. 승주는 모교의 과 사무실에 직원 공모를 의뢰하기로 했다. 아무래도 경험이 없는 사람보 다는 같은 전공을 한 과 후배들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과 사무실 은 졸업생들이 취업 정보를 얻는 곳이었으므로 많은 호응이 있을 거라고 기대를 했다. 조립식으로 지은 임시 사무실에서 한없이 넓게 펼쳐진 구기자밭을 바라보던 승주는, 문득 기막힌 생각이라도 난 듯한 표정으로 창가에서 물러나 책상 위에 놓인 백지에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 그 때 전화벨이 울렸다. "어, 승주야! 네 소식 들었어. 회사 차렸다면서? 부럽다." 학부 때부터 과 사무실이라면 단 골처럼 들락거리던 양 선배였다. "언니는 무슨, 죽을 맛이야. 경험이 많은 것도 아니고 처음 해 보는 일이라 생각처럼 쉽진 않아. 여기저기 거래처 알아보는 일로 해서... 특히 사람들 만나는 게 제일 어렵더라." 양 선 배는 한 학년 위였지만 개인 사정으로 휴학했다가 다음해 복학하였고 승주와는 같이 강의를 들으면서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그래도 나처럼 전혀 전공하고 무관하게 학원에서 아이들 수학이나 가르치는 것보단 낫지 ." "하긴 이것도 복에 겨운 거겠지, 언니는?" "나도 이 강사 생활 그만두고 좀 활동적인 일을 해 보고 싶은데 그게 쉽지 않아. 매일 꽉 막힌 공간에서 애들 떠드는 소리나 듣고 있기도 지겯고." "저, 언니‥‥. 아니야." "왜? 무슨 할말 있어?~ "언니 말이야. 거기 그만두고 나 좀 도와 주면 안 될까? 물론 여긴 시작하는 단계라서 보 수는 많이 주지 못하지만 그래도 비전이 있는 회사니까 한 번 같이 일해 보지 않을래?" 양 선배는 갑작스런 승주의 제의를 듣고 아무 말이 없었다. "글쎄, 네가 갑자기 그렇게 얘기하니까 지금 당장은 뭐라고 말하기가 그렇다. 내가 잘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사실 내가 지금 일하고 있는 학원도 형부가 운영하는 데라서 당장 그만두기도 그렇다. 그래도 한 번 생각해 볼게." "언니 , 꼭 같이 일했으면 좋겠다." 양 선배와 통화를 한 뒤, 10여 일 동안 승주의 간곡한 권유에도 불구하고 양 선배는 같이 일을 할 수 없어 아쉽다는 전갈을 보내 왔다. 승주는 팩스로 보낸 공모 응시자를 심사하러 모교로 향했다. 오랜만에 걸어 보는 용봉골은 봄날의 산뜻함으로 더욱 아름다웠다 승주는 채용 설명회를 하 기로 한 강의실을 향해 바쁘게 걸었다. 그러나 308호 강의실엔 ROTC들이 빽빽히 앉아 무 슨 강좌라도 듣는지 통 나을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승주의 예상은 빗나갔다. 그녀가 학부 때에는 308호 강의실이 단과대 사무실 옆에 붙어 있어서 강의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5월 2일 오후 2시 농대 2호관 308호 강의실' 이라 고 했었던 것이다. 그런데 설명회 시작 5분 전이 되었는데도 ROTC들이 강의실을 나올 생 각을 하지 않자 승주는 차츰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20여 분을 강의실 밖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던 승주는 ROTC들이 강의실을 나오자, 채 용 설명회에 찾아올지도 모를 학생들을 생각하며 10여 분을 더 기다렸다. 공고된 시간에서 40여 분이 경과하자 승주는 맥이 풀렸고 학생들이 오지 않을 거란 생각 이 들어가려던 참이었다. 그 때 좌측 계단에서 급하게 달려오는 구둣발 소리가 들려 왔다. 승주는 수업에 늦은 학생이겠거니 생각하고 고개를 숙인 채로 묵묵히 계단으로 향했다. 점 점 구둣발 소리가 가까워지면서 문득 그녀 앞에서 멈춰 섰다. 승주가 가던 길을 멈추지 않 고막 계단으로 내려서려는데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승주 선배, 혹시 승주 선배 아니세요?" 승주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닳아 빠진 청바지에 단 발머리를 더 곱게 빗질한 단정한 모습의 여자였다. 승주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얼굴보다 는 몸 전체를 위아래로 훌어보았다. 굽이 반 뼘 정도 되는 검정하이힐에 옷소매를 살짝 걷 어붙인 횐색 티셔츠의 캐주얼한 차림이었다. 그리고 왼쪽 겨드랑이에는 '식품 공학 원론'을 끼고 있었다. 승주는 자신이 방금 실례되는 행동을 했다는 것을 깨닫고 미안한 표정으로 여자에게 다가 갔다. 사과하려고 보니 한 학번아래인 배영은이었다 맥이 풀려 있던 승주는 다소 희색을 띠면서 영은에게 더 가까이 다가섰다. 영은은 같은 과 후배이기도 했지만 양 선배의 고향 후배로, 승주가 3학년 때부터 점심 시간이면 양 선배 와 함께 구내 식당에서 도시락을 먹던 허물없는 사이였다. "여기서 수업 있니?" "아뇨. 오늘 여기서 식품 회사 채용 설명회가 있다고 해서왔는데 장소를 옮겼는지 사람들 이 안 보이네요. 광주 입구에서 차가 밀리는 바람에 늦었지 뭐예요." 승주는 영은의 말에 기뻐서 어쩔 줄 몰라했다. "너, 혹시 오늘 공개 채용 설명회 때문에 오는 길이었니?~ "예. 오늘은 오전에만 수업이 있는데 두과목 모두 휴강하는 바람에 집에서 늦게 나왔더니 지각을 하게 됐어요." "그러면 제대로 왔어!" "그게 무슨 말이에요?" "자세한 얘기는 어디 들어가서 하자." "네." 둘은 우선 학교 근처에 있는 카페로 가기 위해 학교를 나왔다. 담배 연기가 가득한 카페 에서 둘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지내 온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 한참 지난 후 저녁 무렵 이 되어서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둘은 학교 근처에 있는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녁 시간이라서 식당 안은 손님들로 가 득 차 있었고 홀 중앙 쪽 방엔 학생들이 세미나를 마친 후인지 저녁을 먹고 있었다. 손님들 이 빽빽히 들어차서 승주와 영은은 식당을 나가려 발길을 돌렸다. 그 때 식당 주인이 몸에 밴 친절로 그들을 붙잡으며 주방 옆에 붙은 방으로 안내했다.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마자 홀 안의 손님 한 무리가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막 나서고 있 었다. 곧 이어 말쑥한 넥타이 차림의 사람들이 몇 명씩 짝을 지어 식당 안을 두리번거리다 일행을 찾았는지 손짓을 해 보이면서 들어왔다. 종업원이 컵과 삶은 감자 몇 개가 담긴 보시기를 놓으면서 주문을 종용했다. 승주는 잠시 식당 입구에 붙어 있는 차림표를 바라보았다. 차림표를 바라보던 승주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녀는 좀 전에 들어서던 일행 중 막 구두를 벗으며 방으로 들어서는 큰오빠를 발견한 것이 다. 승주는 자신도 모르게 큰오빠를 불렀다. 경주 또한 놀란 눈빛으로 신발을 벗고 승주 옆으로 다가왔다. 경주는 순간 영은과 눈이 마주쳤다. 인사를 하면서 그녀의 얼굴이 왠지 낯익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가 여기 어쩐 일이야?" "승주 넌?" "학교에 이것 저것 볼 일이 있어서. 같이 온 사람들 오빠네 과 사람들이야?" "응." "참, 오빠 인사해. 이번에 광주 지역 시음회 일을 맡아 줄 후배 배영은이야. 우연하게도 우리 회사 모집 공고 때문에 만났지 뭐야. 인연이 되려고 그랬나 봐." 그렇게 말해 버리고 난 승주는 자신이 내뱉은 말에 후회를 했다. 오빠를 보자 너무 기쁜 나머지 여지껏 오빠에게 비밀로 해 두었던 회사 일을 무심결에 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우리 회사?" 그러나 경주는 승주의 '우리 회사'라는 말보다는 영은의 이름이 먼저 귀에 들어왔다. 승주 의 입에서 '배영은'이란 말이 나오자 경주는 맞은편에 앉은 영은의 얼굴을 다시 쳐다보았다. 영은은 경주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자꾸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경주가 낯설 지 않았다. 한쪽에서 일행이 경주를 부르고 있었다. 경주는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먼저 일어섰다. 인 사를 하기 위해 영은도 따라 일어서자 경주가 오른손을 내밀어 영은에게 악수를 청하려다 멋쩍은 듯이 이내 내려놓았다. 뒤돌아 서던 경주가 생각이 났다는 듯 함박웃음을 지으며 영은을 향해 돌아섰다. "저‥‥‥‥" 경주가 입을 열려다 말았다. "큰오빠, 왜 그래? 서로 아는 사이야?" 승주는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둘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영은이 먼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저, 혹시 전에 금천 오신 적 있으시죠? 법률 상담할 때하고, 저희 교생 선생님 찾아 서‥‥‥‥." "정말 두 사람 전에 만났었어? 자세히 얘기 좀 해 봐." "어쨌든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무슨 대답이 그래? 서로 안다는 거야, 모른다는 거야?" "승주 선배, 저희 주문해야죠?" "어, 아직 식사 전이니?" "응, 우리 지금 금방 들어오는 길이야." "이 집은 삼겹살이 맛있어. 그걸로 먹어라. 난 일행이 있는 곳으로 가 봐야겠다. 그럼, 영 은 씨도 저녁 맛있게 드세요." "예." 영은은 가볍게 인사를 했다. 경주는 일행이 있는 곳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주위의 떠들 썩한 동기들의 말소리에도 경주의 눈은 계속 영은 쪽으로만 향해 있었다. 영은도 몇 번이나 경주와 눈이 마주쳤으나 조금의 흔들림 없이 그저 고기를 먹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영은의 단발머리에선 여릿한 노란 수선화가 송이송이 피어나는 것 같았다. 경주는 멀리서 영은의 수선화 향기에 취해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영은과의 만남이 필연이라도 되는 것처럼 경주는 식당에서 다시 만난 이후 자신도 모르게 그녀에게 사로잡혀 그녀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영은 씨도 역시 나와 마찬가지일까?' 경주는 어젯밤 어쩔 수 없이 대학원생들과 어울릴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떠올리며 아쉬움 을 토해 내듯 영은의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경주의 머릿속은 온통 영은의 생각으로 가득했다. 승주가 자신이 개간해 놓은 구기자 농장을 성장시켜 회사를 반듯하게 세웠다는 사실은 전 화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처음 그 얘기를 듣고 너무 놀랐지만 오빠를 위해 끝까지 혼자 잘 해 나가는 승주가 그저 고맙고 대견스러웠다. 지금은 승주를 통해야만 마음 속의 영은을 만 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로 꽉 차 있었다. 경주는 승주에게 전화를 하려고 밖으로 나왔다 다행히 승주는 구기자 시음회 때문에 광주 에 머물고 있었고 그겻은 경주가 영은을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도서관 앞 공중 전화 부스는 한산했다. 가끔 눈에 띄는 몇 몇 학생들이 묵직한 전공 책을 서너 권씩 들고 다니는 것이 꼭 보따리 장수 같았다. 경주는 버튼을 천천히 눌렀다. "바다 농산물 시음회 사무실입니다."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사장님 좀 바꿔 주십시오." 경주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쩐 일이야, 오빠? 사무실로 전화를 다 하고?" "바쁘진 않니?" "그렇게 바쁘지는 않아. 오빤 어딘데, 학교?" "그래 내가 학교말고 갈 데가 있겠냐? 시간도 없고." "공부는 잘 돼?" "그냥 그래. 승주야, 바쁘지 않으면 너희 시음회 사무실로 갈 테니까 시간 좀 낼 수 있겠 니? 바쁜 일 있으면 관두고." 경주의 말을 들은 승주는 벌써 시음회장 앞에 오빠가 와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해. 아직까진 특별한 일 없어. 6시쯤이 어때?J「좋아, 그 때 보자." 전화를 끊고 도서관으로 향하는 경주의 발걸음이 하늘로 붕붕 떠 오르는 것 같았다. 6시가 다되어 가는데도 오빠에게서 연락이 없었다. 승주는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았다. '길을 못 찾는 것도 아닐 텐데 어디서 헤매는 거지?' 그 때 노크를 하고 여직원이 들어왔다. "사장님, 손님이 오셨는데요." 여직원의 뒤로 다 바랜 청바지와 옅은 감색 점퍼를 입은 경주의 모습이 보였다. "일은 다 끝난 거야?" "응, 저녁 먹으러 가자, 오빠." "그래." 승주가 재킷을 걸치고 핸드백을 들었다. "오빠 나가자." 경주는 소파에 그냥 앉아 있었다. "오빠, 안 나가?" 한참을 망설이던 경주가 머뭇거리며 겨우 입을 열었다. "승주야, 저기.... 한 명 더 같이 가도 되겠냐?" "왜, 함께 온 사람 있어?" "아니, 저.... 지난번에 식당에서 만났던 네 후배 있지? 같이 저녁 먹으면 어떨까 해서." 그 말을 하고서는 누굴 찾는지 경주는 바쁘게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영은이? 오빠도 엉큼하기는...." "어차피 퇴근 시간인데 같이 저녁 먹으면 좋잖아 괜히 실례라도 되면 그냥 두고." "아니야. 나도 영은이랑 맨날 붙어서 일을 하는 게 아니라서 여지껏 밥 한 번 제대로 먹 어 보지 못했어. 그렇게 해, 오빠. 아직 퇴근 전일 거야." 승주가 여직원을 시켜 2층 시음회장에서 일을 하고 있던 영은을 불러 오게 했다. 2층에서 내려오던 영은이 경주를 발견하고는 잠시 멈춰 서서 엷은 미소로 인사를 대신했다. "또, 만나서 반갑습니다." "바쁘신데 여기까지 언제 오셨어요?" "아무리 바빠도 꼭 만날 사람은 만나야죠." 영은이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찰랑거리며 윤기를 더했다. "영은 씨 보러 일부러 왔습니다." "오빠, 수상한데?" "왜?" "이상하잖아. 오빠 후배도 아니고, 내가 알기론 몇 번밖에 안면이 없는 영은이를 보려고 없는 시간 쪼개서 여기까지 왔다는 게 말이야. 아무리 우리 오빠라지만 오빠 속을 알 수가 있어야지." 복도를 나서며 승주가 경주에게 팔짱을 끼면서 말했다. "어? 귀신 같이 알았네. 하하하." 말문을 열지 못할 것 같았던 경주가 의외로 큰소리로 웃었다. 승주는 고개를 갸우뚱거리 며 다시 한 번 오빠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웃었다. 그리고 승주 옆에 있는 영은의 모습을 조 심히 살폈다. 왜 하필 오빠가 이 곳까지 일부러 찾아와 엉뚱하게 후배 영은이를 찾았을까? 본래 사람 만나는 걸 가볍게 생각하는 건주, 희주 오빠라면 이해가 갔을 테지만 평소 큰오빠의 성격을 생각하면 지금 오빠의 행동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들은 근처 갈빗집으로 향했다. 음식점 현관에 들어서기도 전에 갈비 냄새가 진동했다. 각 테이블마다 회식 자리인 듯한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뚜껑이 열린 차가운 소주가 몇 병 씩 늘어서 있었다. "영은 씨, 뭐 좋아하세요?" 경주가 메뉴판을 들여다보며 영은에게 물었다. "좋아하시는 걸로 드세요. 저는 다 잘 먹어요." "영은아, 오늘은 네가 먹고 싶은 걸로 먹어야 한다." "선배도 참...~ "그럴 일이 있어 안 그러면 나중에 내가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모르거든 아무튼 네가 시켜 봐." 영문을 모르는 영은이 승주와 경주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저, 갈비 먹죠. 갈비는 돼지 갈비가 제일 맛있어요. 두 분 저 먹는 것 보면 놀라실 텐 데...." "네가 먹으면 얼마나 먹겠니. 괜찮아, 시키자." "여기요, 돼지 갈비 5인분 주세요. 고기 연하고 맛있는 걸로 주세요. 참, 술도 한 잔 해야 죠?" "그러세요." 골고루 양념이 된 돼지 갈비가 노릇노릇하게 익어 가고, 그들의 대화도 적당히 맛을 더해 갈 때쯤이었다. "학교는 어디서 다녀요? 집이 나주일 텐데." "네, 통학해요. 나주에 아버지밖에 안 계시거든요." "그랬군요. 제 잔 받으시죠." 영은이 경주의 가슴 앞으로 잔을 깊숙이 내밀었다. "영은이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셨어. 그런데도 항상 보면 성격이 구김 없이 밝고 매사 긍 정적이야. 지금 우리 회사에서도 떠오르는 샛별이지. 샘나 죽겠다니까." "선배도 참... 영은이 경주한테 받은 잔을 반쯤 마셨다. 입 안으로 들어간 소주가 꽤나 썼는지 영은은 눈을 잠간 감았다가 떴다. "반칙이에요, 전 한 번에 마셨는데." "오빠, 영은이 술 약해. 많이 권하지 마. 집에 어떻게 보내려구 그래." "별 걱정을 다 하네. 내가 댁까지 모셔다 드려야지.」경주의 말에 놀란 승주는 다시 물었 다 "영은이 집이 나주인데 나주까지 데려다 줄 수 있어?" "물론이지." "영은아, 우리 오빠 네가 정말 맘에 드나 보다. 이런 말을 서슴없이 하는 걸 보니 눈치가 예사롭지 않은데? 다른 오빠들은 모르는데 우리 큰오빠는 정말 안 그렇거든." 옆에서 듣고 있던 영은이 술기운에 그랬는지 아니면 승주의 말을 듣고 그랬는지 얼굴이 금세 달아올랐다. 승주는 오빠와 저녁을 먹으면서 식사시간 내내 영은을 위한 세심한 배려를 느꼈다. 그리 고 영은과 더 있고 싶어하는 오빠의 생각을 뒤로하고 9시쯤 영은을 먼저 보냈다. 승주는 내 내 아쉬운 표정을 한 오빠와 단둘이 자리를 했다. "오빠, 뭐 하나 물어 봐도 돼?" "뭘 또 물어 보시려구요, 우리 막내 동생님!" "장난하지 말구 솔직히 대답해 줘. 영은이랑 언제 만난 거야? 지난번부터 궁금했는데 영 은이한테 물어 봐도 그냥 웃기만 하고..., 오빠 첫사랑이라도 돼?" "첫사랑이라." "오늘 분위기가 예사처럼 보이지가 않아 더욱 궁금한걸. 내 눈은 못 속이는 거 알지?" "그랬냐? 그렇게 보였어?" "활활 타던 걸?" "오빠를 놀리면 못쓴다. 대학교 1학년 때였던 것 같다 영은씨가 다니던 초등 학교로 법률 상담을 해 주러 간 적이 있었어. 그 때 처음 영은 씨를 만났지 초등 학교 4학년이었는데 강 아지를 엄청 좋아하더라. 그 때 내가 백구를 데리고 갔었는데너무 예뻐하길래 잘 키우라고 주었지. 그런데, 또 우연하게 마주친 적이 있었어. 그러니까 우영이가 교생 실습을 나갔던 학교에서 다시 영은 씨를 만났거든. 그런데 그 때는 영은 씨의모습이 쉽게 잊혀지지 않더라. 그러다가 다시 한번 금천으로 법률 상담을 나간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또 본 거야.」 "오빠랑 영은이 어쩜 인연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우연히 세 번이나 만났다는 건 아무에 게나 일어나는 일이 아니잖아. 그런데 정식으로 인사한 게 오늘이 처음이야?" "그렇다고 봐야지. 처음엔 이름도 네가 말해서 기억났어." "그랬구나. 영은이 천성이 곱고 참 착해 요즘 같은 때에 보기 드문 아이야. 일부러 칭찬하려고 없는 소리하는 게 아니라 어 딜 봐도 흠잡을 데가 하나도 없어 내 옆에서 일을 하고 있지만 놓치기 아까운 애야. 아마 학교에서도 눈독 들이는 남자들이 많을 거야. 근데, 진짜 오빠가 보기에도 영은이가 그렇게 예뻐?" "......." 경주는 대답을 하지 않고 생각이 난 듯 승주에게 말했다. "내가 너한테 물어 본다는 게 늦었다." 경주가 지나치면서 들었던 얘기를 무척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회사 얘기지? 내가 가족들에게 오빠에겐 알리지 말라고 했어. 오빠가 일궈 놓은 구기자 밭에 농장을 확장하고 가공 공장을 세운 거야." 승주는 답답한 것을 토해 내듯 얘기하며 기뻐하는 경주를 바라다봤다" "가공 공장까지? 어떻게 그렇게 큰 규모를 해냈어. 야! 승주 대단하구나." "모두가 오빠 덕분이야. 내가 뭘 한 게 있겠어. 오빠가 세워놓은 사업 계획서를 우연히 발 견하고 그대로 한 것뿐인데." "그 많은 자금은 어떻게‥‥‥." "미국서 승진이 고모가 농촌 경제 살리라고 아무 조건 없이 주신 거야. 우리 지역 발전을 위한 외자 유치라고 할 수 있지 ." "아무튼, 잘 했다. 네가 열심히 해서 지역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경주는 승주가 자랑스럽다며 승주의 손목을 힘껏 잡았다. "언제 시간 내서 구기자 농장과 공장 좀 둘러보러 진도에 내려와. 그리고 오빠의 생각도 말해 줬으면 좋겠어. 오빠 도움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니까?" "내가 무슨 도움이 된다고..., 네가 이만큼 잘 해냈는데." "오빠에게 좋은 아이디어가 많이 있을 거야, 안 그래? 농촌경제 발전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각별하잖아." "그래, 연구해 보자. 앞으로 시음회가 끝나면 또 다른 계획이 있냐?" "시음회는 영은이가 맡기로 했고 본사 직원들이 지원해 주면 될 거야. 그것보다 오빠, 이 제 농촌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밖으로 많이 알려야 해. 이제 도시에서 방황하 며보내는 고향 사람들이 우리 농촌을 찾아 자리를 잡았으면 해. 내가 오늘 여기까지 온 것도 오빠의 사업 구상을 이어 간 것이지만, 더 욕심이 생겨. 기혼 여성들도 가만히 있을 게 아니라 고향의 특산물 재배에 관심을 갖고 소비하다 보면 지역 경제 구조가 왕성해져서 국가 경제가 살아날 거라고 생각해. 내 생각에 농촌은 가계 수입확대와 여성의 자아 실현 현장으로 충분하다고 믿어. 사회 현상이 노동을 기피하지만 농촌의 일이 꼭 노동만은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해. 요즘 도시와 농촌의 문화권도 이어져 얼 마나 좋은지 알아야 될 거야." "우리 승주가 정말 지역 경제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구나. 오빠가 못 이룬 일 해 줘서 고 맙다. 그렇게 회사가 성장해서 영은 씨까지 만나게 해 주고 말이야." 금방 헤어졌던 영은의 모습이 떠올랐다. 화장기가 거의 없는 그녀의 얼굴에서 때 묻지 않 은 순수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 후로 몇 번씩 마주칠 때마다 영은은 부드러운 얇은 재킷을 자주 입었다. 은은한 파스 텔 톤의 얇은 재킷은 어느 옷에나 받쳐 입어도 잘 어울렸다. 불편하게 보이는 정장 차림보 다는 간편한 캐주얼 차림을 좋아했던 그녀는 회색빛이 도는 긴 치마를 즐겨 입었다. 셋이서 저녁을 먹은 며칠 후 경주는 영은이 있는 곳으로 전화를 했다. "네, 배영은입니다." "저, 안녕하세요? 이경주입니다." "예?" "그 날은 잘 들어 가셨어요?" "덕분에요." "...." 둘은 벙어리가 된 듯 잠시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퇴근 늦으세요?" "아뇨. 토요일인데 일찍 끝나겠죠." "그래요?" "..." "그럼, 오늘 저에게 시간 좀 빌려 줄 수 있겠어요?" "네?" "영은 씨와 같이 가고 싶은 곳이 있거든요." "승주 선배도 가시나요? 특별하게 오늘은 연락 받은 게 없는데‥‥‥" 경주는 승주의 동행을 묻는 영은에게 뭐라고 얘기해야 할지 정리가 되지 않았다. "......" 영은은 말을 잇지 못하는 경주의 난처한 얼굴을 머리에 그려보았다. 그녀는 당황했던 목 소리를 감추고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 멋진 데라도 있어요?" 오히려 영은이가 궁금해하는 말투였다. 경주는 영은이의 밝은 목소리를 듣자 혹시 실수라 도 하는 건 아닌지 우려했던 마음을 바꿔다. "네. 우선 시간 약속을 하는 게 낫겠어요. 저는 오후 시간이 괜찮거든요. 영은 씨 시간은 어떠세요?" "5시 정도면 좋겠어요. 충장로 앞 우체국 아시죠?" "우체국요?" "네." "알아요. 잘 됐네요. 마침 그 근처에 볼 일이 있었는데 그 일을 같이 보면 되겠어요." "그럼, 이따 뵙겠습니다." 그 후 둘은 서로가 없어서는 안 될 사람들처럼 경주가 영은을 찾아가고 영은이 경주를 찾 게 되었던 것이다. 오랜 시간 동안 햇볕과 바람을 받아 달콤하게 익은 사과처럼 그들은 그 런 풋풋한 사랑을 키워 갔던 것이다. 영은은 시골에서는 보기 드물게 혼자 자랐다. 영은 아버지는 원래 서울에서 중견 공무원 을 지냈는데 그 덕분에 영은네 집은 풍족하고 안락한 중산층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몹시 허약했다. 영은을 어렵게 출산을 했던 터라 둘째는 생각도 못하다가 영은이가 유치원을 수료할 무렵 아이가 들어섰다.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영은 어머니는 기어코 아기를 낳으려고 했다. 영은의 어머니는 스스로 조심을 하면서 가족들을 안심시키느라 많은 노력을 했는데 영은이 초등 학교 1학년 초겨울, 일은 터지고 말았다. 의사는 임신 초기부터 정기 진단을 받던 영은의 어머니에게 임신 중독증이라며 임신 중절 수술을 권했지만 그녀는 한사코 거절했다. 사실 영은 어머니도 자신의 증상이 그렇게 심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러고는 가족들 몰래 병원을 다니면서 버터 나갔던 것이다. 그 러던 차에 출산 예정일을 며칠 앞두고 병원에 입원한 영은 어머니는 병이 악화되면서 결국 사산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 달 후 후유증을 이겨 내지 못하고 영은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어머니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아버지는 실의에 빠져 헤어나지 못한 채 어머니가 묻힌 나주 로 낙향해 버렸고, 그 해는 영은이 초등 학교 2학년이 되던 해였다. 영은 아버지는 그 누구보다도 어머니를 사랑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없는 집은 날로 힘들 었다. 어머니의 빈자리는 무엇으로도 채을 수 없는 공허감이 맴돌 뿐이었다. 더욱 초췌해져 만 갔던 영은의 아버지는 그 동안 마시지도 않던 술을 나주로 내려오면서부터 가끔 만취될 때까지 마시고는 밤늦게 들어오시곤 하셨다. 다행히도 영은의 외가가 근방에 있어서 가끔씩 외할머니가 집에 들러 반찬이며 집안 일을 해 주시며 왔다 갔다하셨다. 외할아버지가 면장 이었으므로 영은의 아버지는 마을사람들과 쉽게 가까워질 수 있었다. 외갓집의 도움으로 영은이 4학년이 되던 해에 배밭을 조금 얻어서 배 농사를 지었다. 그 때 영은은 경주를 만나 백구 금이를 얻으면서 새로운 기쁨을 갖게 되었다. 암컷이었던 금이는 그 다음 해부터 새끼를 낳을 수 있게 되었다. 진돗개라 종자가 좋았던 탓에 영은은 강아지들을 키워 장에 내다 팔아 작으나마 자신의 학비와 용돈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그 후 영은은 전남대 식품 공학과에 입학하게 되어 승주를 알게 된 것이다. 영은은 학교 생활에 충실하면서 과 장학생으로 학비 부담을 덜 수 있었고 선배인 승주도 그런 영은을 칭 찬하며 각별히 친분을 유지하며 지내 오던 터였다. 장마가 물러간 뒤부터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더위는 밤이 되어도 꺾일 줄을 몰랐다. 누군 가가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 노크소리가 가느다랗게 복도를 울렸다. "네, 들어오세요." 문이 뻑뻑한 소리를 내며 열리고 영은이 수줍은 듯이 들어섰다. 영은이 혼자 사무실을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영은의 갑작스런 방문에 경주 또한 당황하고 있었다. "오빠, 마실 거하고 과일 좀 사 왔어요. 하숙집에 전화했더니 아직 안 들어왔다고 하길래 이 곳으로 왔어요." "자, 이리로 앉아 마침 목이 마르던 참인데 잘 됐네." 경주는 옆 책상의 의자를 빼서 영은 앞으로 내민 다음 시음회에 관해 이 일 저 일을 물었다. 영은은 그제야 꼭 쥐었던 손을 풀 며 경주가 묻는 말에 차근차근히 대답했다. 경주는 영은의 그런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경주의 눈빛을 의식한 영은은 다시 두 손을 포 개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비록 무미건조하게 찾아온 사랑이었지만 그들의 뜨거워지는 감정을 연구실의 작은 선풍기로 식히기엔 역부족이었다. 경주가 영은의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 "영은아, 내가 무서운 귀신 이야기 하나 해 줄까?" "좋아요, 그 대신 재미있어야 해요." "아주 재밌고 무서운 이야기야. 한여름 밤에 택시 기사가 다른 날보다 피곤해서 일찍 집 으로 가려고 마음을 먹었어. 그런데 그 때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한 거야. 시간은 이미 자 정이 넘은 시각이라서 사방은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여 있었지. 단지 빛이라고는 택시에서 내뿜는 전조등뿐이었어. 기사는 점점 더 빠르게 차를 몰았어. 그런데 택시가 막 다리위를 지나치려는데 하얀 소복 을 입은 긴 머리의 여자가 양손에 가방을 들고 택시를 가로막는 거야. 기사는 깜짝 놀라서 멈췄지. 그러자 비에 젖은 여자가 뒷좌석으로 오르면서 목적지를 얘기하는 거야 기사는 식 은땀을 겨우 훔쳐 내며 엑셀러레이터를 밟았지 목적지는 몇 개의 터널과 산을 넘어야만 하 는 곳이었어. 가는 도중에 기사는 백미러로 몇 번이나 여자를 확인했지만 여자는 똑같은 자 세로 다소곳이 앉아 있었어. 빗속을 가로질러 목적지에 도착하자 기사는 이제 다 도착했다며 여자에게 내리라는 뜻으 로 뒤를 돌아보았어. 그러자 여자가 얌전히 택시에서 내리려다 말고 갑자기 돌변해서 기사 에게 화를 내는 거야. 겁먹은 기사는 여자에게 왜 그러느냐고 물었지. 여자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글쎄... 뭐라고 했는데요?" " '가방을 놓고 왔잖아요' 라고 말했대." 영은은 다시 경주의 눈을 은근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서 택시 기사가 어떻게 했어요?" "어떻게 하긴 그냥 그 길로 돌아가서 가방을 싣고 왔지 뭐." "그러면 별 얘기도 아니잖아 요. 오빠도 시시하기는‥‥. 그런데 오빠, 오빠는 귀신이 존재한다고 믿어요?" "귀신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지. 무속인이나 초능력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일반적 으로 귀신이 있다고들 하잖아. 하지만 과학자들은 인간의 무의식에서 체득한 것이라고 말하지. 귀신의 존재를 부정한다는 소리야. 한 마디로 나도 단정지을 순 없지만 귀신은 사람들의 약한 상상력에서 나온 거라고 생각해." 경주가 영은을 넌지시 바라보며 달아오르는 자신의 감정을 애써 감추려고 태연한 척했다. 영은이 일어섰다. "저 이제 그만 가 봐야겠어요. 얘기를 듣다 보니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요." "내가 너무 오래 붙잡았나 봐." 경주는 영은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문득 문으로 다가서는 영은을 붙들어 자신의 가슴에 안았다. 경직된 영은의 몸에서들려 오는 심장 박동이 경주를 더욱 자극했다. 경주는 영은의 숙인 고개를 비집고 들어가 촉촉하게 젖은 입술을 더듬었다. 영은은 몸에서 힘이 풀려 나가 는 걸 느꼈다. 영은과 오빠 사이를 일찍 알아챈 승주는 혼기가 찬 오빠를 위해 영은과의 결혼을 추진했 고, 그 해 가을 광주의 '무등산호텔' 에서 경주와 영은은 약혼식을 올렸다. 경주가 대학원을 마치는 다음 해 봄에 결혼식을 올리기로 하고 우선 약혼식부터 치른 것 이다. 양가의 허락을 받은 영은과 경주는 예전보다 자유스럽게 서로의 집을 오가며 만날 수 있었다. 예측할 수 없는 연극 정문에서부터 쭉 늘어선 메타세쿼이아는 연둣빛으로 물이 올라 눈이 시릴 정도로 아름다 웠다. '저 가로수들처럼 말없이 바람과 강렬한 햇빛을 이겨 내면서 푸르게 일어서는 거다.' 경주가 진도에서 올라와 대학원에 복학한 지 이틀 정도가 지났을 때였다. 학과장이 경주 를 불러 지도 교수를 찾아가 보라고 했다. 지도 교수는 경주에게 자료들을 내보이며 말했다. "이번에 설치되는 '대학 장학회' 를 자네가 맡아 주었으면 하네. 자네도 알고 있다시피 장 학회 대표는 반드시 대학원생이해야 한다네. 그래서 우리 과에서는 자네가 수석으로 입학했 고, 모든 면에서 성실하게 적극적으로 임하니 자네에게 맡기려 하네. 꼭 맡아 주게나." 경주는 생각지도 않은 제의에 몸둘 바를 몰랐다. 장학회의업무를 떠나 그 자리는 중소 기 업체들의 끊임없는 후원과 지도 교수가 지켜 주고 있었다. 고작 장학회에서 하는 일은 업체 의 상품 홍보뿐이었으므로 대표를 맡아 살림을 늘려 보라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경주가 이 일에 대해 적극적일 수 있었던 건 우리 농산물 보호와 환경 지원 업체의 일이라는 데에 가장 큰 호감이 갔다. 경주는 지도 교수가 주선해 주는 장학회 대표 자리를 선뜻 거절할 수가 없었고, 또 한편 으로 미약하나마 부모님들의 시름을 이제서야 조금이라도 덜어 들일 수 있는 기회인 것 같 아 한결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그렇지 않아도 경주는 집으로부터 별 도움을 받지 않고서도 공부를 계속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생각이었다. 그 후로 그의 연구실은 장학회 사무실로 옮겨졌다. 지난 석사 1년차 때와 마찬가지로 그 에겐 많은 후배들이 찾아왔다. 대부분이 장학회를 통해 알게 된 후배들이었고, 그런 후배들 을 보면서 듬직한 동반자가 생긴 것 같아 마음 한편으로 무척 고마웠고 그런 후배들이 대견 했다. 모두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지만 어두운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전에 신 문사 일을 했던 경험 덕분에 경주는 업체들과 관련된 장학회 업무를 민첩하게 처리할 수 있 었다. 또한 경주 밑에서 일하는 근로 장학생만도 자그마치 300여명이 넘었다. 그들은 각자의 맡은 일을 열심히 해 주었다. 점차 학교 생활에 자리를 잡으면서 장학회 사무실의 불은 꺼 지지 않는 날이 많아졌다. 새벽의 어스름을 밟으며 하숙집으로 향하는 경주에게 아침해를 바라보는 것은 일상이 되 어 버렸다. 경주가 하숙집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하숙집 주인 명옥은 밤새 기다렸는지 졸린 얼굴로 경주를 맞이했다. "아이 참, 어젯밤도 언니가 얼마나 기다리다 갔는지 몰라요. 요즘 부쩍 더 늦으시네요. 몸 축나게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니에요?" 명옥이 말하는 언니란 시내 교회의 정 집사라는 사십대 후반의 여자를 말하는 거였다. 그 여자와는 전에 최 선배 하숙방에 들렀을 때 눈인사만 몇 번 했을 뿐, 개인적으로 만나 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근래 세 달 동안이나 정 집사는 경주를 전도한답시고 거의 매일 명옥을 통해 경주 에 대한 신상을 물어 보는가 하면 경주와 한 번 자리를 마련해 달라며 몇 번씩 부탁을 했다 고 들었다. 그러나 경주는 바쁜 학과 공부와 장학회 일로 눈 코 뜰새 없이 바빠 정 집사의 권유대로 교회에 나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10여 일 전 장학회 간부들과 점심 식사를 마치고 하숙방에서 각 업체들과의 계약 만료 건 에 대한 채권 업무 얘기를 하는데 문 앞에서 서성거리는 명옥과 정 집사를 보게 되었다. 경 주는 그들에게 가벼운 목례를 하고 간부들과 학교로 돌아왔다고 후로 정 집사는 경주를 보 기 위해 하루 종일 하숙집에서 보내기도 하고, 어느 날은 경주가 수업 중임에도 하루에 몇 번씩 장학회 사무실까지 찾아오곤 했다. "이 선생님은 또 학교에서 밤 새셨나 봐요." 명옥이 경주를 반갑게 맞이하자 경주는 멋쩍게 웃으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언제 해 놓았는지 방 안에는 양말과 티셔츠가 단정하게 개켜져 아랫목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하 숙생이 두 명뿐이라서 그런지 명옥은 하숙생들에게 무척 잘 해주었다. 경주는 명옥이 꼭 어 머니처럼 따뜻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경주는 전에도 그 하숙집에 자주 왔었다. 전에 진도에서 막올라왔을 때 한 학년 위인 최 선배가 하숙하던 집이었다. 가끔씩 최 선배는 이상하다는 듯이 얘기를 했다. "아주머니도 좋으시고 대접도 괜찮아. 무엇보다 하숙집에 사람이 얼마 없어 번잡하지 않 아좋아. 그런데 이상하게 잊을만 하면 한 번씩 물건의 위치가 바뀐단 말이야. 주인집 아주머 니가 따로 청소를 해 주시는데 방 청소를 사람 없을 때 한다는게 좀 께름칙해." "문 안 잠그고 다니세요? 아무렴 같은 하숙생이 그러려구요. 객지에서 고생하는 게 안쓰 러워 아주머니께서 청소해 주는 거겠죠." "그렇긴 해." 최 선배는 수긍하는 표정을 지었다. 명옥은 경주가 갈 때마다 반갑게 맞아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녀는 언제나 친절하고 인정이 많아 매우 인상 깊었다. 그리고 학기 초에 마땅한 하숙집을 구하지 못하던 경주는 우연찮게 최 선배를 만나 이 하 숙집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어느 날 아침 7시쯤 씻기 위해 수돗가로 나오자 명옥이 냉큼따라 붙었다. "이 선생님은 요즘 젊은이답지 않게 심성이 좋으세요.요즘공부하기 힘드시죠? 어째 공부 는 해도해도 끝이 없나 봐요." "별 말씀을요." 머리를 긁적이는 경주를 보며 명옥이 말을 이었다. "이 선생님, 저랑 한 번 교회에 같이 나가 보지 않을래요?" 경주는 씻지도 않고 서서 명 옥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아주머니, 교회 다니세요?" "네. 가까워서 그냥 다녀요. 마음도 편해지고 의지가 많이 되죠. 기도하면서 제일 많이 생 각나는 건 집이에요. 가족들을 위해 기도를 많이 하죠." "그렇겠네요." "괜찮으시면 언제라도 얘기해 주세요. 제가 다녀 보니까 마음이 편해 좋아서 그래요. 이 선생님도 하시는 일이 힘들고 바쁘실 텐데 그럴수록 더 용기를 얻어야 하지 않을까요?" "생각해 볼게요. 오늘은 일찍 나가 봐야 하거든요." 경주는 교회에 같이 나가자는 명옥의 제안에 쉽게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냥 실없이 웃어 버리고 얼굴에 비누질을 한 경주는 그것을 씻어 내면서 명옥이 한 말을 다시 생각해 봤다. 신이라는 절대적 존재가 사실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 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이제껏 그는 선뜻 종교에 발을 들여 놓을 기회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매일 정 집사의 설교 아닌 설교를 듣던 경주는 끝내 정 집사를 따라 교회에 가 게 되었다. 어쩌면 정 집사를 따라 나섰다기보다는 명옥을 따라갔다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천하 교회' 조금은 거부감이 생기는 이름이었으나, 개척 교회라 신선함과 온화함을 교회 곳곳에서 느 낄 수 있었다. 그리고 경주는 인자한 담임 목사에게 호감이 갔다. 경주는 그 해 가을부터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수요 예배와새벽 예배는 참석하지 못했지만, 주일 예배만큼은 빠짐없이 참석했다. 무엇보다 교회 가는 일이 즐거웠던 이유는 목청껏 찬 송가를 부르면 1주일 동안 쌓였던 스트레스가 말끔히 사라져 버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수십 명의 신도들이 정 집사를 둘러싸고 찬양했으며 경주 또한 그 모습에 감탄했다. 그러 나 그녀를 둘러싸는 사람들의 얼굴은 항상 동일했다. 또한 가끔씩 목사님이 하숙집으로 신방을 오기도 했다. 경주는 그들이 가족과 다름없는 역할을 해 주어 부담스럽기보다는 오히려 고마웠고, 그 동안 찾아 헤맸던 보금자리로만 여 겨졌다. 때로는 그들 앞에서 자신이 한없이 작아 보이기도 했으며 영은과의 사랑도 하나님 의 은혜라고 믿고 있었다. 가을이 무르익어 가는 어느 주일이었다. 그 날도 어김없이 경주는 명옥과 교회로 향했다. 전과 마찬가지로 교독문을 낭독하고 찬송을 부른 뒤 목사님의 설교가 계속되었다. 회개의시 간을 갖은 후 마지막으로 축도송을 불렀다. '내 가진 것 모두 바치오니 주님 받으시옵소서....' 정 집사가 경주에게 그 날이 '추수 감사 주일' 이라고 귀띔해주었다. 교인들은 하나둘씩 강단으로 올라가 저마다 하얀 봉투를 내밀며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렸다. 옆에 앉았던 정 집사와 명옥도 일어나 강단으로 갔다. 경주는 난감했다. 자신의 지갑 속에는 만 원짜리 지폐가 달랑 두 장이 있었다. 그는 성경 책 귀퉁이에 꽃아 두었던 봉투를 꺼내 돈을 집어 넣었다. 그리고 조용히 강단을 향해 걸어 나갔다. 목사가 그를 온화한 미소로 바라보았다. 봉투를 내려놓은 다음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렸다 그는 모든 세속에서 벗어난 듯한 기분에 젖어들었다. 그 날 저녁, 집으로 돌아와 식사를 마치고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경주는 별안간 대문으로 들어서는 목사를 보며 몸을 일으켰다 "웬일로 여길 다 찾아오셨는지...."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부엌에 있던 명옥이 급히 거실로 나왔다. "목사님, 빨리 오셨네요." 미리 알고 있었는지 명옥은 목사의 얼굴을 한 번 보고는 다시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커피를 내오며 뭔지 모를 미소로 목사를 바라보았다. "이러실 게 아니라 방으로 들어가세요." 그들을 따라 경주도 방으로 들어섰다. 자리에 앉자 목사는 조용히 기도를 드렸다. 기도가 끝난 후 두 손으로 찻잔을 받쳐든 목사는 말없이 경주를 바라봤다. 예전과는 다른 뭔가를 꿰뚫어 보려는 날카로운 섬광이 느껴졌다. "경주 형제님, 형제님은 하나님이 계시다고 믿습니까?" "그럼요, 하나님의 전능과 사랑을 믿습니다." 경주가 단호하게 대답하자, 목사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고맙습니다, 이 형제님." 경주는 아직은 미약한 자신의 신앙이 부끄러워 무릎 앞에 있는 성경책을 만지작거렸다. "이경주 형제님 , 변함 없는 신앙으로 크게 은혜 받으시길 바랍니다." 목사는 경주에게로 가까이 다가와 그의 두 손을 꼭 잡으며 계속 감사하다는 말을 했다. "이 형제님, 형제님으로 인해 우리 교회가 부흥할 수 있게되어 너무나 감사합니다." "제가 무슨 일을 했다고 그러십니까? 오히려 제가 얻은 것이 더 많습니다." 경주는 목사에게 정중히 얘기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이경주 형제님." 목사의 눈에서 어느 새 눈물이 방울져 흘러내렸다. 경주는 영문을 모른 채 당황하여 옆에 있던 명옥을 한 번 쳐다보았다. 그녀가 무슨 말이라도 해 주기를 바랐지만 그녀 역시 경주 를 보며 그저 웃기만 할 뿐이었다. "이 형제님, 정 집사님으로부터 형제님에 대해 많은 얘기를 들었습니다. 거기다가 이렇게 까지 저희를 도와 주시니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경주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목사님 곁에 항상 붙어 다니던 정 집사도 오늘따라 보이 지 않았고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어리둥절해하는 경주를 외면한 채 그들은 기도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사님이 왔다간 후 여느 때와 같이 경주는 주일 오전 예배를 드리기 위해 정 집사를 따 라 명옥과 함께 교회에 갔다. 축도가 끝나고 나서 목사는 경주가 앉아 있는 곳으로 다가섰 다. "이 형제님의 큰 믿음을 하나님께서 지켜 보고 계십니다." 경주는 세상의 모든 것을 얻은 것 같았고 이 곳이 천국인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의 순결하기만 했던 천국은 초겨울의 문 턱에서 하얗게 산산조각 나 버리고 말았다. 경주가 그렇게 교회에 나간 지 한 달 반이 지난 어느 토요일이었다. 하숙집에서 점심을 먹고 막 일어서려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명옥이 상대방에게 몇 마디를 건네더니 전화를 끊 고 경주에게로 다가왔다. "저, 이 선생님. 방금 언니, 아니 정 집사님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무슨 좋은 일이 있다면 서 이 선생님과 함께 '영생 기도원'으로 와 달라고 하네요." 경주는 그리 바쁜 일도 없고 해서 곧 명옥과 기도원으로 출발했다. 그녀와 집을 나선 경 주는 학교 앞 로터리에서 택시를탔다. 그녀는 택시에 오르자 무한동 '영생 기도원'으로 가자 고 기사에게 말했다. 택시는 30여 분을 지나 목적지인 영생 기도원에 도착했다. 정 집사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둘을 맞이했다. 수목이 빽빽히 들어선 입구를 지 나자 자그마한 기도원이 들어서 있고, 기도원 서쪽으로 널따랗게 펼쳐진 야산이 적어도 수 만평은 더 되어 보였다. 경주와 명옥은 정 집사를 따라 야산 입구에 이르렀다. 정 집사는 야산 입구까지 바쁘게 걸으면서도 경주가 이 곳까지 와줘서 고맙다는 말을 여러 번 반복했다. 야산 입구엔 건설 현장을 방불케 하는 중장비들이 시동을 켠 채 세워져 있었다. 정 집사 는 중장비 앞에 서 있는 노년의 남자와 몇 마디를 나누더니 기도원 마당을 따라 서쪽 맞은 편에 있는 고급 지프로 갔다. 서류를 들고 차에서 내린 중년의 남자와 세련되면서도 왠지 딱딱해 보이는 여자와 뭔가를 얘기하더니 경주에게 손짓을 해 보였다. 정 집사는 경주에게 야산의 주인이라면서 중년 남 자와 여자를 소개했다. 머뭇거리던 경주는 명옥을 한 번 쳐다보고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정 집사님한테서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이경주 씨죠?" "예." 경주는 그들의 말에 쑥스러운 표정으로 가볍게 대답했다. "둘러보면 잘 아시겠지만 좋은 땅입니다. 용도가 괜찮은데, 저희도 급해서 내놓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중년 남자와 여자는 자신들이 타고 왔던 지프에 올라탔다. 경주는 중년 남자 의 말이 자신보다는 정 집사와 옆에 있던 명옥에게 했을 거란 생각에 무관심한 표정만 짓고 서 있었다. 정 집사가 들고 있던 서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경주에게 백지 몇 장을 건네 며 얘기를 꺼냈다. "이 형제님, 사실은 이번에 우리 교회에서 기도원을 세우기로 했어요. 그래서 이쪽에, 저 기도원을 헐어 버리고 이 야산 1만 2천 평에 공사를 시작할 거예요. 그래서 땅을 매입할 때 계약서 초안을 법을 전공한 이 형제님께 부탁하려고 여기에 모신 겁니다. 바쁘실 텐데 현장 도 보여 드릴 겸 오시라고 했어요. 사전에 얘기도 없이 죄송스럽게 됐습니다. 」 정 집사의 말은 그럴 듯했다. 경주가 보기에 정 집사는 자신의 일보다도 교회 일에 더욱 성의를 다하는 것 같았다. 그녀가 뒤에서 교회 일을 저렇게까지 추진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경주는 고개가 절로 숙여질 따름이었다. 경주는 자신에게 그런 부탁 아닌 부탁까지 하는 정 집사가 고맙기까지 했다. "이 선생님, 아울러 공사 계약서도 같이 초안을 잡아 주셨으면 해요. 그리고 계약서 초안 을 잡으실 때 금액과 일자는 꼭넣어 주세요. 공사가 급해서 내일 교회에서 땅 매입금을 주 기로 했어요. 그래서 신용 금고에도 들렀다 오는 길입니다." 그러고는 자신이 들고 있던 부 동산 서류를 짚어 가며 경주에게 일러 주었다. 경주는 정 집사가 불러 주는 대로 간단히 메 모를 했다 "이 땅은 1만 2천 평에 평당 3만 원씩이니 총 3억 6천만 원이고, 소재지는 광주시 서구 무한동 산 84번지래요. 나머지 금액은 내일 교회에서 주기로 했으니 내일 날짜로 적으면 될 거예요." 경주는 간단한 말이라 적지 않아도 되리라고 생각했지만 이왕 적기 시작한 메모라 끝까지 적어 뒷주머니에 꽂았다. 말을 끝낸 정 집사는 자신이 일부러 구해 온 차를 가리키며 야산 을 한 바퀴 돌아보자고 했지만 경주는 내일 교회에서 만나기로 했다. 경주와 명옥이 막 지나는 택시를 잡으려 할 때 정 집사는 잠시 망설이더니 핸드백에서 1 백만 원짜리 수표를 꺼내, 동료들과 식사라도 하라며 경주에게 건넸다. 사양하는 경주에게 몇 번 더 권하더니 그의 고집에 못 당하겠는지 명옥에게 주고 정집사는 기도원 쪽으로 되돌 아갔다. 그들을 태운 택시는 순탄하지 않은 코스로 집을 향해 그대로 질주했다. 학교로 돌아온 경주는 뒷주머니에 넣었던 종이를 꺼내며 쓴웃음을 지었다. 처음엔 법전이 라도 찾아가며 계약서를 작성할까 했는데 매매 계약서는 누구나 다 아는 것이므로 일반 기 준에 의해 초안을 잡았다 경주는 책상 앞에 앉자마자 볼펜으로 백지 위를 긁적이기 시작했다 단 몇 분 만에 한 장 의 계약서를 완성한 경주는 오른손에 볼펜을 든 채 사무실 유리창 쪽으로 다가섰다. 다음 날 경주는 여느 주일과 마찬가지로 명옥과 함께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린 후 교회를 나서려는데 정 집사가 기다렸다는 듯 경주 앞으로 다가왔다. 경주가 계약서 초안을 정중히 정집사에게 건네 주자 정 집사는 한 번 훑어본 후 고마움을 표했다. 경주는 여느 신도들과 마찬가지로 목사님의 전송을 받으며 교회를 나섰다. 경주가정 집사에게 건넨 한 장의 계약서 초안이 경주의 앞날에 먹구름이 될 줄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정 집사의 실명은 정순은이다. 그녀는 단란한 가정을 꾸려오던 평범한 주부였다. 5년 전 토목 공사 업체 지역 본부장이었던 남편이 도로 확장 공사 중 불의의 사고로 척추를 다쳐 하반신이 마비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식들을 돌보는 데 소홀하지 않았다. 그리고 남편의 산재 보상금으로 고급 여성 의류점을 차려 생활해 나갔다. 장사가 잘되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사회 생활에도 익숙해져 갈 때쯤 의류업계 사장들이 이끌고 있는 낙 찰계에 가입하게 되었다. 그런데 우연하게 계모임에서 옛 애인 도용식을 만났다. 두 사람은 욕정을 절제하지 못해 서로를 원하게 되고, 취기가 오른 그들은 호텔을 찾게 되었다. 그 후 그녀는 5년간 누워만 있던 남편에게서 만족하지 못했던 욕정을 보상받으려는 듯 그와의 만남을 계속해서 가졌다. 같은 학교 써클 선배였던 도용식과는 대학교 1학년 여름 방학 MT에서 타오르는 열정을 자 의 반 타의 반으로 불태웠던 것이다. 과에서도 성적이 좋았던 정순은은 그 일로 가족의 눈 을 피해 중절 수술까지 하게 되었다. 그런 연유로 그녀는 2학년을 다니다가 자퇴를 하고 방황하다가 끝내 도용식과도 헤어졌 다. 하지만 지금의 남편을 만나 더욱더 열심히 살았다. 정순은을 다시 만났을 때 도용식은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부도직전의 위기에 놓여 있었 다. 20년 전부터 양복점을 운영하면서 모은 재산으로 그는 부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남성 의류업체 대리점을 개설했던 것이다. 그가 정순은을 다시 만나는 것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탈출구가 필요했고, 정순은은 초 라한 욕정을 위해 더욱 매달리게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만날 때마다 그것이 파멸이라는 것 을 깨닫지 못했다 도용식은 자신의 파산을 막기 위해 정순은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색정에 빠져 있던 정 순은은 도용식의 요구대로 남편의 산재 보상금과 의류점을 처분한 돈을 주었지만 그것만으 로 도용식이 운영하는 대리점을 살리기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이미 남자를 느껴 버린 그 녀로서는 헤어날 길이 없었다. 원래 내성적이었던 정순은은 도용식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타고난 외모는 상당한 끼가 있어 보였고 그녀의 몸에 밴 친절은 사회 어느 구석이나 파고들어 갈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이제 정순은을 손에 넣은 도용식은 이제 그녀를 구슬러서 이용해 먹는 일만 남았다. 대학 시절 종교 동아리를 몇 번 드나들었던 도용식은 그녀를 이용할 수 있는 곳으로 교회 를 선택했던 것이다. 진정한 신앙인도 아니었던 그가 자신을 위해 신앙을 빙자하여 팔아 먹 을 계획이었던 것이다 도용식은 정순은을 교회에 내보내기 전에 성경에 대해 철저히 교육시켰다. 의외로 정순은 은 도용식의 의도대로 잘 따라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두 사람은 계획을 의논하려고 호텔에서 만났다. 도용식의 계획을 들은 정 순은은 모든 것을 포기한 듯 구체적인 방법까지 제시하면서 더 열을 올렸다. "저보다 네 살이 많은 사촌 언니가 있는데 한자만 다르지 저하고 이름이 같아요. 더욱 놀 라운 건 외향하고 목소리까지 비슷하다는 거예요. 언니는 지금 별빛 교회'에서 실제집사로 있어요. 언니는 교회 안팎으로 신망이 대단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말인데 언니를 사칭해서 다른 교회로 들어가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 같아요. 어때요, 내 생각?" 어쩌면 정순은이 도용식보다 한 수 위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도용식은 정순은의 의견에 감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용식이 아무 말이 없자 확신을 주려는 듯 말을 이었다. "고등 학교 다닐 때 언니랑 같은 방을 쓴 적이 있었는데 제가 봐도 우린 서로가 너무 쏙 빼 닮은 거 있죠. 다른 면이 있다면 언니가 좀 활발하고 말이 많다는 것뿐이에요." 도용식은 들떠서 얘기하는 그녀를 흡족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자신의 품 안으로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이제 도용식이 해야 할 일은 실제 인물인 정순은 집사를 관찰하는 것밖에 남지 않았다. 도용식은 정순은을 따라 별빛 교회에서 실제 인물인 정순은 집사를 처음 본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외형이나 생김새는 두말 할 것도 없이 똑같았고 멀리서 듣긴 했지만 가느다란 목소리까지 흡사했다. 도용식은 그 후로 정 집사를 자세히 관찰한 뒤 , 그녀의 의상과 머리 모양은 물론 핸드백 이며 구두까지 똑같이 맞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정순은은 실제 별빛 교회의 집사인 사촌 언니 정순은으로 행세했다. 여름이 막 시작될 무렵, 그들은 먼저 별빛 교회 정순은 집사가 천하 교회로 왔다는 소문 을 퍼뜨렸다. 소문이 퍼지자 정순은은 자기가 마치 집사가 된 양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천하 교회의 목사마저 정순은의 실체를 눈치채지 못했고 그런 상황 속에서 정순은과 도용 식은 그들만의 사욕을 위해 빈틈없이 계획을 추진해 갔다. 더구나 정순은은 목사의 환심을 사기 위해 평일에도 전도나 신방을 스스로 다니곤 했다. 그러던 중 하숙집을 하는 도용식의 여동생 명옥을 통해 하숙생들에게까지 손을 뻗쳤다. 명옥이 하숙생들의 인적 사항, 가족의 부동산, 친인척 관계 등을 알아내어 결국 그들을 한 명한 명 교회로 끌어들인 것이다. 이렇게 그들이 쳐놓은 그물에 경주까지도 꼼짝없이 걸려들고 말았다. 더구나 경주에 대한 그들의 철저한 계획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치밀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경주는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경주는 중소 기업체들의 유수 상품들을 홍보해 주는 장학회 대표를 맡고 있었기 때 문에 자금처를 왜나 확보하고 있었던 점을 정순은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경주가 대표를 맡고 있는 대학 장학회는 전국에 있는 우수 한 중소 기업체 여섯 곳의 우리 농·수산물 및 환경 보전 상품들을 홍보해 주고 있었다. 그런데다 소비자들의 호응이 좋아 계약 기간이 만료 시점에 있었음에도 모든 업체들로부터 연장계약을 하자는 제의를 받고 있 었다. 그런 연유로 해서 9월 말이면 장학회 대표의 임기가 끝나는 경주에게 어느 날,하숙집으로 간부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경주에게 대표직을 연임해 줄 것을 권유했고, 그 날 업체들마다 추가로 지급해 준 홍보 비용과 장학회원 운영비 등을 정산하며 상의했다. 도용식과 정순은 이 그런 정보를 놓칠 리가 없었다. 그들은 경주의 하숙방에 도청 장치를 해 이 내용을 녹음 한 것이다 경주는 이번 장학회 대표직을 마치고 내년 봄 3월에 대학◎논문 준비에 박차를 가할 작정 이었고 영은과 결혼식을 올리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경주는 이미 정순은의 사기극에 자신도 모르게 깊이 빠져 들고 있었다. 장학회원 300여 명에게 6개월간 1인당 하루에 1만 원 꼴로 받아 낸 홍보비 (여섯 개 업체 도합 5억 4천만 원)를 고스란히 그들이 가로챈 것이다 상황은 악화 일로를 달려, 정순은과 도용식은 장학회 대표인 경주와 지도 교수로 사칭해 홍보 계약을 연장한다는 공문서를 발송 하였다. 그들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고 계약 연장을 받아들인 3개의 농산물업체로부터 계약금 조로 각각 1천만 원짜리의 당좌수표를 받아 냈다. 업체들은 홍보를 연장해 준다는 장학회와 경주에게 고마움을 느껴, 뒤늦게 경주와 통화한 결과 그것이 사기임을 알고 수표를 회수하 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이렇게 두 사람의 사기 행각은 물샐틈없이 철저했다. 그들은 이미 업체들이 발송한 수표 를 가로채기 위해 야간에 장학회사무실의 창문까지 뜯어 내고 우편물을 손에 넣었다. 그들 손에 들어온 업체의 수표를 1억 원으로 둔갑시키는 일은 식은죽 먹기였다. 이미 그들은 지 도 교수와 경주의 신분을 도용했고 제반 서류를 위조해 버린 후였기 때문이다. 또한 정순은과 도용식은 전에 경주의 하숙방에서 도청한 내용을 다시 들어 보고는 경주가 수업 중인 틈을 이용해 장학회사무실에 침입하여 허위 예금 통장과 바꾸어 버린 것이다. 경주가 기도원에 갔을 때 그들은 이미 경주에게 결정타를 가한 것이었다. 그 날 그들은 은행 문이 열리자마자 장학회 은행계좌에 남아 있는 돈을 모조리 인출해 버렸다. 또한 자신 들의 행각을 말끔히 지워 버리려는 심산에서 전기 합선을 유도해장학회 사무실에 불을 질렀 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자신들의 사기 행각을 마무리짓는 결정적인 실수가 되었다. 장학회 사무실 옆에 마련된 도서실에서 공부하다 잠이 들었던 장학회원 한 명이 화재로 봉변을 당하려던 찰나에 장학회사무실 앞을 지나던 백구가 솟구치는 불길을 헤치고 사무실 로 들어가 학생을 구한 것이다. 잠시 후 정신이 든 학생이 신고를 해 화재는 금방 진화될 수 있었다. 경주은 또다시 교도소로 향해야만 했다. 그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얼마나 저주했는지 모른 다. 정순은 일행에 대한 분노보다도 자신의 무지에 더욱화가 치밀었던 것이다. 절망의 나락 에 빠진 그에게 그 이상의 나빠질 곳도 존재하지 않았다 유치장에 들어가던 날, 경주의 품 에 안겨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영은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을 뿐이다. 영은이 하루가 멀다 하고 면회를 왔다. "오빠, 밖에서 힘써 보고 있으니까 조금만 기다리세요. 다른 생각은 마세요, 그리고..." 영은은 말을 잇지 못하고 창살에 이마를 기댄 채 흐느꼈다. 한참을 울고 난 영은은 경주 에게 중요한 할말이 있는지 한참을 머뭇거렸다. "태어날 우리 아이를 위해서라도 용기를 잃지 말아요." 영은의 말에 놀란 경주가 확인하 듯 물었다. "태어날 아이 라니 ?" "우리 아이 말이에요. 오빠와 내 아이.... 그러니까 힘내세요. 기다릴 거예요." '우리 아이' 라는 영은의 말을 듣고 경주는 약혼식을 끝내고 떠났던 여행이 생각났다. "내가 영은이에게 못할 짓만 한 것 같군." 경주는 그들을 가로막은 뿌연 유리창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다가가 안을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사랑을 앞에 두고 목메어야하는 자신의 처지를 돌아볼 때, 경주는 한없이 무너져 내리는 자신을 느껴 야 했다 '이것이 나락이다.' 영은을 보내고 차디찬 감방으로 돌아온 경주는 벽에 기댄 채말없이 천장만 쳐다보고 있었 다. 그 때 저 편 구석에서 책을 읽던 백발이 성성한 늙은 죄수가 한 마디 던졌다. "당신은 관상을 보면 이런 데 올 사람이 아닌데, 어찌 들어왔는지 묘하군. 귀가 눈썹 위로 솟은 모양이 필시 큰 일 할 사람이야." 자릿세 문제로 구청 직원들과 몸싸움을 하다 공무 집행 방해죄로 들어왔다는 늙은 죄수는 동양 철학을 한다고 했다. 경주에게 그 한 마디를 던지고는 다시 읽던 백을 목침 삼아서 벽 쪽을 향해 누워 버렸다. 경주는 기댔던 등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문득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지금의 장애들 이 결코 포기해 버릴 만큼 난감한 것들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감방에서 저녁 내내 왔다 갔다 하며 지금까지의 일들을 천천히 생각해 보았다. 젖은 영은 의 눈망울과 앞으로의 상황들이 한 편의 드라마처럼 머릿속에 펼쳐졌다. 이러고 당하고 있 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한 경주는 그 날 밤 동문들에게 긴 편지를 썼다. '그래 영은이 있고, 이제 곧 태어날 내 아이가 있다. 결코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다. ' 그렇게 이를 악물며 결심한 경주는 교도소 생활을 하면서도 자신이 어떻게 해야 이 상황 을 빨리 극복할 수 있들지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불러 오는 배를 하고 면회 오는 영은을 보며 ,경주는 희망과 절대로 포기 할 수 없는 자신의 욕망을 가슴 깊이 새겼다. 한동안 면회를 오지 않던 영은이 어느 날 아이를 안고 면회를 왔다. 그렇지 않아도 아이 를 출산했을 영은을 걱정하던 참이라무척 반가웠다. 영은이 안고 있는 아이는 여자아이였다. 경주는 금방이라도 면회실을 뛰쳐나가 아기를 안아 보고 싶었다. 자신으로 인해 이 세상에 나온 아이가 아내 영은만큼 사랑스러웠다. "많이 힘들었지?" "뭘요, 남들도 다 하는 일인데요. 나보다 오빠가 더 힘들죠. 아이 보여요?" "응, 우리 영은이를 닳아서 참 예쁘구나." 경주가 아이에게 손짓을 해 보였다. "절 닮긴요. 오빨 닮았죠. 눈이며 입술이며 오빠를 쏙 빼 닮았다고 할머니가 그러셨어요." "못난 아빠 닳아서 뭐하겠어, 우리 착한 영은이 닮아야지." "자꾸, 그런 소리 하실 거예 요? 그러면 저 화낼 거예요." 영은의 목소리가 잘게 흐려졌다. "알았어. 첫 딸은 아빠 닮아야 잘 산다고 어머니도 늘 그러셨는데 어른들께서 많이 좋아 하셨겠군. 아이 잘 키워, 내 걱정은 말구. 더 강해져야 해, 영은아." 사실 영은은 친정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난산을 했다. 시어머니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몸을 추스릴 수 있었던 영은은 아이가 삼칠일이 지나기가 무섭게 경주에게 달려온 것이다. 병실에서 출산일을 기다리던 영은은 그처럼 외로울 때도 없었다. 나주에 계셨던 친정 아 버지가 올라오셔서 영은 곁에 있었어도 외로움은 어떻게 달랠 수가 없었다. 저녁마다 산모를 찾아오는 다른 아빠들의 구두발 소리를 들으면서 경주를 떠올렸다. 영은 은 자신보다 멀리서 혼자 고생하고 있는 경주를 생각하며 날마다 눈물로 베갯잇을 적셨다. 진실 경주가 구속되던 날이었다. 이제껏 경주를 소아 왔던 주위사람들은 구속 적부심을 해야 한다며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나섰다. 진도에서 소식을 들은 식구들은 여기저기 변호사를 찾아 사정을 얘기하고, 자주 경주에게 면회를 와 합의를 해서보석으로 풀려날 수 있을 것이 라고 설득시켰지만 경주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합의를 하여 풀려난다고 해도 경주는 쉽게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자신의 결백이 밝혀 질 날이 언젠가는 올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드리워진 얼룩이 말할 수 없을 만큼 치욕스러웠고 무엇보다도 영은에게 합의라는 이름으로 자신이 풀려나는 것을 보여 줄 수 없었다 공소장이 날라오고 재판 기일이 잡히고 소환장이 도착되던 날 교도관이 경주에게 면회를 알렸다. 영은이 경주에게 불편함은 없는지 속속들이 물었다. 영은의 옆에는 우영이가 여유 있게 웃으며 서 있었다. 경주를 안심시키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우영의 뒤에 승주가 눈물을 흘리며 서 있었다. 경주와 우영은 그들의 우정을 재확인이라도 하듯이 그 동안 밀린 이야기 를 하느라 시 칸 가는 줄을 몰랐다 면회 종료를 알리는 종이 울리자 아쉬움을 감추며 우영이 돌아섰고 우영의 뒤에서 가만히 서 있던 승주가 경주를 바라보며 한 마디했다. "큰오빠, 용기 잃지 말구 힘내. 오빠 곁엔 우리가 있잖아. 그리고 오빠가 그렇게 사랑하는 고향에 빨리 가야지." 경주는 포승줄에 묶여 함께 탄 재소자들과 법정에 도착했다. 법원의 지하 차구를 이용해 3층 법정에 들어선 경주는 그 야무진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아무 런 말이 없었다. 경주가 첫 심리를 기다리고 있는 법정은 303호 형사 법정이었다. 한편, 불구속 재판이 열리고 있는 같은 층의 )04호 형사 법정에선 우스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검사가 피고인인 듯한 여자에게 공소장을 시인하느냐고 묻자 그 여자는 절대 아니 라며 오히려 검사에게 호통을 치고 있었다. 다시 판사가 공소 사실을 부인하느냐고 묻자 여 자는 그렇다며 기세 높게 목소리를 높였다. 판사가 다시 물었다. "피고인, 피고인의 이름이 뭐지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여자가 소리쳤다. "판사님 , 함부로 피고인이라고 하지 말아 주세요." 판사는 어이라 없는지 재판석을 한 번 쳐다보고는 피고인석의 여자에게 다시 물었다. "아주머니 성함이 어떻게 되지요?" 공판 검사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재판석을 한 번 쳐다보고는 이내 피고인에게 향했다. "정순은입니다." "직업이 뭡니까?" 판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특별한 직업은 없고, 교회를 다니며 활동하오 있습니다. 교회에서의 직분은 집사입니다." 판사가 자신의 앞에 놓인 자료를 뒤적거렸다. "정순은 씨가 확실합니까?" "예 , 맞습니다." "주민 등록 번호를 말해 보세요." "500608-2684xxx입니다." 판사가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검찰측 심문하시오." 검사가 공소 사실을 다시 조목조목 물었다. "절대 아닙니다. 절대‥‥‥‥. 제가 왜 이 자리에 서 있어야 하는 건지 전 이해가 되지 않을 뿐입니다." 여자의 목청은 더 커지고 있었다. 판사가 3주 후로 재판을 연기하고 심문을 끝내기로 했 다. 기세가 꺾일세라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내는 중년의 여자는 공문서 위조죄로 재판을 받 고있는 중이었다. 경주는 여전히 포승줄에 묶인 채 법정 안을 오가는 재소자들의 창백한 눈빛만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경주가 앉아 있던 대기실은 3층 계단의 복도를 따라 303호 형사 법정 외벽 과304호 형사 법정 외벽 사이에 4평 남짓하게 잘 정돈된 방이었다. 경주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304호 법정에서 들려 오는 여자의 목소리가 어디선가 많이 듣던 목소리 같아 온 신경 이 그쪽으로 쏠려 있었다. 흔히 법원 안의 재소자 대기실은 법정의 출입을 편리하게 하기 위해 법정과 대기실 사이 의 문을 언제나 열어 두었다 대신에 재소자가 도망가지 못하게 경비 교도대와 교도관이 대 기실과 법정 출입문 앞에 곧은 자세로 앉아 있거나 서 있었다. 경주의 뒷좌석에 앉아 있던 재소자가 법정의 부름을 받고 대기실 문 앞으로 나갔다 재소 자가 법정 안케 들어설 때는 대기실의 앞문 교도관이 인솔하는 관계로 경주는 옆문의 경비 교포대에게 소변을 봐야겠다고 말했다. 경주의 소리에 다가오던 경비 교도대의 뒤로 어디서 분명히 본 듯한 중년 여자가 시큰둥 한 표정으로 304호 법정 계단을 내려서고 있었다. 그 여자는 정순은이 분명했다. 정순은은 불만에 가득 찬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단히 어두 워 보였다. 그녀를 본 순간 경주는 앞에 있던 교도대를 밀치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포승줄에 묶여 몸놀림이 자유롭지 못했던 경주는 넘어지기를 몇 번 반복했다. 정순은이 내려간 2층 계단을 따라 떨어지려던 찰나 깜짝 놀란 경비 교도대가 얼른 경주를 낚아챘다. 경주가 정순은의 이름을 외치며 교도대를 밀친 것이 오히려 더 자극적인 행동을 한 것으 로 간주되었다. 기운이 드세 보이는 거구의 교도대들이 경주를 바닥에 질질 끌며 대기실 안 으로 들어와 버렸다. 대기실 의자에 앉은 경주는 마치 고양이가 생선을 물다 놓쳐버린 것처럼 몸부림치며 어찌 할 줄을 몰라했다. 경주의 난동에 주임 교도관이 얼른 달려와 자초지종을 듣고는 즉시 교도 대들을 풀어 법정 안팎을 뒤졌지만 정순은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방금 보았던 중년 여자는 분명 정순은이었다. 흰색 줄무늬와 남색 원피스, 손에 꽉 쥔 검 정 가죽 핸드백, 뒷굽이 낮은 녹색구두를 신고 있는 모습은 정순은이 확실했다 304호 법정에서 울려 퍼지던 이미 바람처럼 사라진 여자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더욱 또 렷하게 들려 오는 것 같았다. 40분쯤 지나 법정 안에서 재판장이 사건 번호를 부르는 소리 가 들리자 교도관이 메모한 사건 번호를 들고 대기실 안으로 들어섰다. 경주 차례였다. 법정 안은 엄숙하다기보다는 침울해 있었다. 재판장의 얼굴을 쳐다봤을 때에야 자신이 피 고인석에 서 있자는 것을 알았고 경주는 웅성거리는 방청석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응당히 보여야 할 할머니 , 부모님 그라고 승주 아니 누구보다도 영은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법 정 정리가 앉을 것을 권하자 그때서야 경주는 재판장에게 목례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경주의 눈에 빨리듯 들어오는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바로 검사석에서 수사 검사였던 현 검사를 발견하였던 것이다. 경주는 뻣뻣한 자세를 고수하면서 검사석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여전히 현 검사는 버릇처럼 오른손으로 흘러내리는 금테안경을 만지작거렸다. "피고인, 이경주." 재판장이 경주를 불렀다. 검사석에서 눈을 떼지 않던 경주는 자신을 부르는 재판장의 목 소리를 듣고 대답했다 "네." "전남 진도군 군내면 상원리 111번지가 본적이지요?" "네." "현주소는 광주시 북구 행운동 517번지가 맞나요?" 재판장은 자상하게 모든 것을 읽어 주었다. "네." 경주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법 학도이시구만." 재판장의 말을 듣는 순간 경주의 머릿속엔 우영과 승주, 영은이 면회 왔던 날이 생각났다. 그리고 영은의 손을 꼭 잡고울먹이던 승주의 말이 떠올랐다. '큰오빠, 용기 잃지 말구 힘내. 오빠 곁엔 우리가 있잖아. 그리고 오빠가 그렇게 사랑하는 고향에 빨리 가야지.' 경주는 수갑으로 꽉 조여 있는 양손에 힘을 주었다. 재판장이 경주에게 물었다. "공소장 받았지요? 공소 사실을 인정합니까?" "아닙니다." 경주는 단호하게 말했다 재판장의 눈디 검사석을 향했다. "검 찰측 심 문하십시 오." 법정 검사는 재팔장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공소 사실을읽어 내려갔다. "피고인, 이 사실이 맞지요?" "아닙니다." 경주는 조금 전과 똑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재판장이 경주를 쳐다보려다가 변호인석으 로 눈을 돌렸다. 하지만 변호인석에는 아무도 없었다. 재판은 몇 번이고 똑같은 방식으로 열렸지만 아무 결론도 없이 끝나기를 연속할 뿐이었 다. 그런 상황에서 경주는 잠자코 있을 수밖에 없었다. 경주가 부인하는 내용을 뒷받침해 줄 증인이 없는 이상 경주로서는 검찰의 도움을 받을 길이 없었다. 더구나 경주는 검찰이나 법정 심리에서조차 묵비권만 행사했고 다른 방법은 찾을 생각도 나지 않았다. 단지 경주가 하지 않았다는 답변만으로는 객관성이 없었고, 자신의 행위를 회 피하는 정도의 변명에 불과했던 것이다. 따라서 검찰의 기소는 고소인의 주장대로 당연한 것이었다. 법정에서도 다른 이유가 없었다. 벌써 몇 번의 심리 끝에 1심 재판도 5개월을 넘겨 버렸다. 마지막 1심의 심리도 다를 바 가 없었다. 재판장은 자신의 손에 들려 있던 서류들을 몇 번이나 뒤적이고는 경주를 바라보 았다. 경주는 재판장과 눈이 마주쳤지만 피하지 않았다. 머뭇거리던 재판장이 입을 열었다. "2주 후에 선고합니다." 교도관이 일으키려고 하자 경주는 급히 외쳤다. "「정순은을 불러 주십시오. 정순은을‥‥‥‥." 경주의 목소리는 메아리만을 남겨 놓은 채 이미 몸은 대기실 밖으로 나와 있었다. 타고 온 호송 버스에서 내려 회색빛의 관구실 앞으로 돌아왔다. 같이 수감되어 있던 사람 들이 경주의 선고에 대해 걱정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경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자리에 돌아가 잠을 청했다. 다음 날 사방 소제가 퍼 준 콩나물 국밥을 먹고 창 쪽을 향해 일어선 경주에게 스포츠형 머리의 봉사원이 다가와 불을 붙인 담배 한 개비를 건네며 어깨를 토닥거려 주었다. 담배를 받아든 경주는 봉사원에게 고맙다는 미소를 보이며 화장실 안으로 들어섰다. 경주는 폐 가 득히 들어 찼던 담배 연기를 다시 밖으로 내뿜었다. 그 잿빛 연기 사이로 구속되던 날의 암 담한 모습들이 스쳐 지나갔다. 경주가 교도관에게 끌려 검사실로 들어섰을 때, 검사실 여직원과 말장난을 하고 있던 장 발의 청년이 경주와 교도관을 의식한 듯 검사 방으로 향했다. 여직원은 수줍었는지 경주의 눈을 피해 버렸다. 돌아서는 청년은 밤색 단화에 말쑥한 옷차림으로 덩치가 왜 커 검사 이 상의 기개를 갖추고 있었다. 보롱 검사실 조서는 검사실 계장이 꾸며 왔지만 사건이 사건인 만큼 이번 경주의 조서만 큼은 검사가 직접 작성했다. 경주가 컴퓨터 앞에 앉자 검사가 방에서 나왔다. 작은 키에 통통한 체격인 검사는 그냥 평범한 얼굴에 금테 안경을 쓴 사람이었다. 검사는 무어라 바쁘게 얘기를 했지만 경주에겐 들리지 않았다. 검사의 묻는 말에 하차부터 끝까지 경주는 '아닙니다, 모릅니다'로만 일관했 다. 경주가 검사의 눈을 바라보며 같은 대답만 반복하자 그도 화가 났는지 씩씩거리며 왼쪽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며 경주를 쏘아보았다. "이경주, 묵비권을 행사하는 건가?" 검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검사 방에서 마치 모든 얘기를 다 듣고 있었다는 듯 밤색 단화를 신은 청년이 뛰쳐나왔다. 그는 경주에게 체구만큼 커다란 오른쪽 손가락을 들이대며 달려들었다. "이런 건방진 짜식이 ,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지껄여, 지껄이긴." 그런 청년의 갑작스런 행동과 말투에 깜짝 놀란 여직원이 서류를 정리하다 말고 의자에서 일어섰다. "...... " 경주는 그런 그의 태도에 일말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쓰레기 같은 놈! 뻔뻔하기는‥‥‥‥." 경주가 더는 못 듣겠다는 표정으로 청년의 눈을 쏘아보았다. 그런 경주에게 청년은 바짝 다가와 어깨를 거칠게 흔들었다. " 이 새끼야, 네가 남의 임야를 빼 돌렸잖아!" 청년은 핏대를 세우며 목소리를 높였다 막무가내로 달려드는 청년을 보다못한 경주가 자 리를 박차고 일어나려는데 교도관이 제지했다. 이 광경을 지켜 보고 있던 검사가 담배를 재 떨이에 비벼 끄며 낮은 톤으로 말했다. "그만 두게. 일도 왜 그러나?" 검사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청년은 실핏줄이 가득 들어선 붉은 눈으로 경주를 쏘아보 며 자리를 뜨려 하지 않았다. 경주는 그 눈 속에서 20여 년 전, 그를 있는 대로 짓밟고 따가운 봄 햇살 사이로 사라져 간 검정 세단의 뒷좌석에 앉아 있던 소년을 떠올렸다. 하지만 경주는 수갑이 채워진 죄인의 신세였고, 자신의 무죄가 명백하게 밝혀질 때까지는 엄연한 범죄자였다. 굴욕은 굴욕으로 받 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단지 미래에 다시 당당하게 맞서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기분 나쁜 자식." 청년은 검사보다도 더 흥분해 있었다. 그가 경주의 아랫도리에 침을 뱉으며 다시 입을 열 려 하자 검사가 사정하듯 청년을 불렀다. "어이 , 일도 이제 그만 해." 검사가 청년의 어깨를 붙들어 자신의 방으로 밀어 넣었다. "선배님 , 이런 자식은 푹 썩혀야 합니다. 쓰레기 같은 놈, 정말 청소 한 번 해야지 안 되 겠어요." 청년은 검사 방으로 들어가면서도 온갖 욕설을 경주에게 퍼부어 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경주는 어이가 없었다. 아니, 어쩌면 청년이 더 불쌍해 보였는지도 모른다 검사는 말을 계속 했다. "이렇게 자필 서류가 명백히 있는데도 계속 묵비권을 행사할 건가?" 경주는 검사가 보여 주는 기도원 계약서 초안을 보았고 터져 오는 가슴을 주체하기가 힘 들었다. "아닙니다." "묵비권은 사실을 인정한다는 것이나 거의 다름없는 거 아니오?" 검사는 이 말을 끝으로 교도관에게 눈짓으로 경주를 데리고 나가라는 사인을 해 보였다. 경주는 검사를 향해 억울한 자신의 심정을 토하듯이 소리를 질렀다. "절대,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피해자...." 경주의 말이 검사에게 전해지기도 전에 교 도관이 경주를 그 자리에서 있는 힘껏 끌어 냈다. 경주는 필터가 다 타 들어가는 줄도 모르고 가늘게 피어나는 연기에만 시선을 두고 있었 다. 그는 배식 반장이 다가와 무어라고 귀띔을 하자 앞 창으로 다가섰다. 교도관이 면회 쪽지 를 내밀었다. "아, 당신이 이경주 씨입니까?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아까운 분이..., 억울하더라도 쪼금만 참으시고 힘내십시오." 처음에 교도관의 말을 들었을 땐, 자신의 처지를 비웃는 것 같아 기분이 언짢았지만 그렇 게 말하는 눈빛은 진실해 보였으므로 교도관이 진심으로 자신의 처지를 동정하고 있다는 것 을 알 수 있었다. "경주 씨 관복 챙겨 드려라." 배식 반장이 걸레땅에게 지시했다. "이경주 씨 우리 인사아 하죠. 저는 보안과의 김 교위라고 합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 다." 철창 안으로 내미는 그의 손을 거절하지 못하고 거칠게 튼 손을 내밀어 응했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따스한 체온이었다. 땜통이 문을 따자 경주와 김 교위는 사방을 나섰다. 교도소의 업무는 여러 과로 나뉘어 처리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백 명의 교도관이 먼저 각 재소자의 신분장을 분류하여 신상 파악을 하고 있어서 교도관 역할은 거의 학교에 서 담임 선생님과 같았다. 그들이 보기에 경주 정도면 VIP의 우대를 받는 것이 당연한 것인 지도 몰랐다. 또한 재소자들 사이에서도 경주를 범털의 자리에 놓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던 것이다. 김 교위를 따라 들어선 곳은 보안과 옆의 특별 면회실이었다. 면회실 앞의 대기석엔 칙칙 한 갈색 빛을 띤 소파가 몇 개 덩그러니 놓여 있고, 그 옆으로 양심수 가족들이 기증한 괘 종시계가 단출하게 놓여 있었다. 경주가 들어서자 보안과장과 담소를 나누고 있던 감빛 양복의 두 사내가 자리를 대기석으 로 옮겼다. 대기석으로 들어서는 그들을 보며 경주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중 한 사람 이 너무도 친한 김 선배였기 때문에 그는 잠시 동안 꼼짝할 수가 없었다. 김 선배는 얼른 손을 내밀어 경주의 등허리를 쓸어 올리며 힘껏 껴안았다. "고생 많았지, 진작 연락을 하지 그랬어 . 못난 사람 같으니. 항소심에서야 연락하는 사람 이 어딨나." "아니 어떻게..." 그런 말을 꺼내면서도 경주는 반가움을 감추지 못했다. "임마, 다 알고 왔어. 그렇잖아도 어제 우영이 만나서 얘기다 들었다." 그런 김 선배의 말을 듣고 경주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법을 공부했다는 사람이 법 의 무법 지대에서 표류하는 자신의 모습을 내세우기가 부끄러웠기 때문이었다. "억울하지만 어쩌겠나.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하고 한 떤 참아 봐." "...." "어, 이거 내 정신 좀 보게. 자, 이 변호사한테 인사하게." 김 선배가 잠시 잊고 있었다는 듯 옆의 남자를 경주에게 소개했다. 경주가 가볍게 목례로 인사를 건네자, 남자는 경주에게 악수를 청하며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편지 잘 받았네. 76학번 이준호라고 하네. 어려움이 많겠지만 잘 견뎌 보게나. 자네 편지 받고 우리 동문들이 얼마나 안타까워했는지 모른다네. 나도 자네의 편지와 박 기자에게 자 세한 이야기를 듣고 분을 삭이질 못했네. 힘들더라도 조금만 참고 우리 노력해 보세." 이 선배는 듬직한 외모만큼 깔끔한 매너로 경주를 위로해 주었다. 경주는 그런 선배들의 위로를 받으며 천군만마를 한꺼번에 얻은 기분이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들." "이번에 법대 동문회 분과위원장을 맡게 된 유능한 사람이야. 아, 그러고 보니 이 변호사 가76학번이니까 경주에게는 3년 선배구만. 게다가 이 변호사가 경주 너와 같은 종씨지 뭐냐. 이 기회에 서로들 잘해 봐 그리고 준호는 3개월 전에 적을 두었던 검찰을 떠나 지금은 서초 동에서 변호사 개업을 했다네. 때가 잘 타협해서 자네의 사건 기록들을 검토해 볼 테니 너 무 염려 말고 기다려 보게." 말을 마친 김 선배는 그 특유의 호탕한 웃음으로 위로하듯 어깨를 두드리며 경주의 눈을 보았다. "경주야, 다 알고 있다. 박 기자도 얼마나 기가 막혔으면 집중 취재라도 해서 텔레비전 뉴 스에 내보내겠다고 야단이겠냐. 그걸 막느라 왜나 채먹었다. 문제는 우리가 얼마나 빨리 정 순은을 찾느냐인데 말이야." 경주는 사건의 해결 방법을 얘기하는 김 선배를 보며 그 동안 꽉 막혔던 체증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맞습니다, 김 선배. 정순은만 있으면 사건의 전모를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런 경주의 확신에 찬 보습을 보며 김 선배는 자못 안심이 되는지 말을 계속했다. "자 그럼, 우린 그만 일어서는 게 좋겠군 그런데 이렇게 모이고 보니까, 이 변호사와 나 그리고 똘똘한 경주도 모두 장남이구만. 이거 다들 무거운 자리에 앉았어, 허허." 그들은 봄비에 젖어 흐느적거리는 버들가지를 뒤로하고, 현관문을 나섰다. 감방으로 돌아 온 경주는 영은에게 보낼 편지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모처럼 찾은 경주의 평안에 함께 있는 사람들은 자못 흐뭇해했다. 스포츠형의 머리를 한 봉사원도 오랜만에 경주의 밝은 모 습을 보면서 창 아래에 쓰러지듯 잠을 청했다. 사랑하는 영은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이렇게밖에 표현하지 못한다는 것이 답답할 뿐이오. 이제는 당신을 만나 면 죽을 때까지 결코 떨어지지 않으리라 다짐했소. 당신의 그 잔잔한 미소 속에서 언제까지 나 살고픈 생각뿐이오. 오늘은 학부 때 조교이셨던 김 선배가 일부러 다녀갔다오. 김 선배의 확신에 찬 모습을 보니 좋은 예감을 몸 전체로 느꼈다오. 어젯밤 꿈에 당신이 내게로 다가와 정답게 웃으며 말하던 모습이 하루 종일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구려. 밖에는 봄비가 무심하게도 땅을 적시고 있소. 마치 내가 당신을 그리워하며 흘린 그 많은 눈물들을 재현이라도 하듯이 그렇게 서글프게 쏟아지고 있소. 당신 역시 비를 바라보며 우 리 아이에게 비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내 가슴이 따뜻해짐을 느낄 수 있소. 당신에겐 언제나 미안한 마음뿐이오. 그래도 내가 당신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내 가슴 안 에 가득한 사랑뿐이라오. 끝도 없이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은 당신을 만나기 위해 태어났다는 것과 당신을 기다려 왔다는 말이오. 그리고 당신만을 언제까지나 사랑할 것이오. 힘들더라도 용기 잃지 말고 잘 견뎌 주길 바라오. 당신을 사랑하는 경주 항소심 재판이 또다시 시작되었다. 그러나 1심과 별다를 게 없이 재판장의 인정 심문과 검찰의 공소 사실에 대해 경주는'아닙니다' 라는 말로만 일관했다. 여전히 변호인석에는 아무도 없었다. 재판이 또다시 1주일 후로 연기되고 경주는 호송 버 스에 실려 다시 교도소로 돌아와야 했다. 1주일 후에 열린 재판에서도 경주는 전과 다름없는 결과로 다시 감방으로 향해야만 했다. 항소 심리가 열리고 난47일 후. 출정 명령서를 들고 감방문을 연 호송 교도관을 따라 경 주는 포승줄에 묶인 채로 다른 재소자들과 함께 차에 올랐다 금요일이라서 그런지 합의부재 판까지 합쳐 네 대의 호송 버스가 법원으로 향했다. 철망 사이로 보이는 시내는 예전 그대 로였고 단지 변한 게 있다면 자신밖에 없다는 생각이 경주를 서글프게 했다. 경주의 재판은 두 번째로 진행되었다. "사건 번호 9X 노 823129XXX." 재판장이 경주를 불렀다. 웬일인지 교도관은 묶여 있던 포승줄을 풀어 주었고 몸의 일부 분이 되다시피 한 수갑마저 풀어주었다. 여느 때와 변함 없이 재판장이 낮을 톤으로 인정 심문을 마쳤다. "피고인의 변호인 반대 심문하십시오." 재판장의 말이 떨어지자 경주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변호인석으로 고개을 돌렸다. 그 때 방청석 동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감색 양복을 입은 사나이가 서류 가방을 들고 변호인석 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경주는 그의 움직임에 따라 시선을 돌리다가 변호인의 얼굴을 보고서야 그 사람이 김 선 배임을 알고는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목마른 사막에서 단 한 방울의 물을 찾은 것 같아 뛸 듯이 기뻤다. 그는 바짝 타오르는 가슴을 애써 잠재우며 그저 고마운 마음을 눈 빛으로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김 선배는 경주의 서울 고등 학교 선배이면서 또한 서울 대 학교 직속 선배이기도 했다. 그와의 인연은 경주가 대학교 1학년 4월 초에 열렸던 법대 총 동문회에서 처음이었을 것이다. 김 선배가 그의 재치 있는 유머와 자신만만한 태도를 본 후 로 경주를 특히 귀애했던 것이다. 경주는 법대 1학년이었고 김 선배는 교수 요원으로 뽑혀 대학원을 다니면서 법학과 조교 를 맡아 보고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학문으로 맺어져 깊은 우애를 나누었고 또한 두 사 람모두 집안에서 장남인 관계로 서로의 고충을 이해하는 그런 돈독한 선후배 사이가 되었 다. 김 선배는 대학원을 졸업할 무렵 사법 시험에 합격하여 사법연수원을 우수한 성적으로 마 쳤다. 하지만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고서도 법조계에 입문하지 않았다. 그것은 본인의 뜻이기 도 했고, 학계의 권유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모교에서 후배양성에 모든 열의를 다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김 선배가 경주와 관련된 이 사건이 복잡하고 난해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후배의 고통을 잠자코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자원하여 변호인 선임계를 낸 것이었다. 그는 함께 선 임계를 내자는 이준호 변호사와 다른 동문들의 권유를 뿌리치고 혼자의 힘으로 경주의 사건 을 맡았던 것이다. 재판장이 변호인석을 향해 한 번 더 반대 심문을 요구했다. 바쁘게 서류를 뒤적거리는 검 찰측에 앉아 있던 두 검사의 모습엔 긴장한 빛이 역력했다. "피고인 이경주 씨, 검찰의 공소 사실을 인정합니까?" 변호인으로서 김 선배의 입에서 어 떤 말이 떨어질까 몹시 궁금해하던 경주는 생각지도 않았던 질문이 나오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당황한 채 굳어 있는 경주에게 김 선배는 종용하듯 다시 물었다 "피고인 이경주 씨는 검찰의 공소 사실을 인정합니까?" 여전히 똑같이 묻고 있었다. 경주 는 입술을 악물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인정하지 않습니다." 경주의 단호한 그 한 마디가 떨어지자 서류를 뒤적거리고 있던 현 검사는 안경 아래로 진 한 그늘을 드리웠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정순은과의 법정 대질을 요구합니다. 이상입니다." 김 선배는 경주의 대답이 끝나자 공판 검사를 향해 힘주어 말했다. "변호인의 요구를 받아들입니다." 기대했던 재판은 그렇게 몇 마디로 공허하게 끝나 버리고 경주를 실은 호송 버스는 5미터 가량의 담벽 안으로 무거운 몸을 비틀었다. 다음 날 아침을 먹고 운동을 가려던 경주는 새벽같이 달려온 영은을 만날 수 있었다. 면 회장으로 향하던 경주는 운동장 모퉁이에 곱게 핀 이름 모를 꽃 한 송이를 꺾어 접견실로 걸음을 재촉했다. 그는 접견실로 들어서자마자 영은에게 꽃을 전하려했지만 방금 전까지만 해도 소담하던 꽃송이가 유리벽에 문질러져 초라하게 시들어 버렸다. 축 처진 꽃을 보자니 경주의 신세와 같다는 생각이 들어 영은은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교도관이 잠시 자리를 피해 주었다. 경주는 영은에게 자신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온몸으 로 표현하려 애썼다. 영은은 그렇게 노력하는 경주의 마음을 전부 받지 못해서 안타까운 듯 경주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면회가 끝나는 벨이 울리고 접견실로 교도관이 들어서자 그 들은 다시 각자의 갈 길을 향해 돌아섰다. 그들이 나간 접견실에는 사랑의 향기만이 쓸쓸하 게 피어 올랐다. 그렇게 돌아간 영은은 하루도 빠짐없이 할머니와 함께 마을 어귀에 있는 운림산방 옆 정 자나무로 가서 지성을 드렸다 서쪽 하늘로 기울어 가는 해의 꼬리를 잡으며 한 가닥 바람이 산허리를 감돌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성심을 다해 기도를 드리고 집으로 발길을 돌리는 것 을 못내 아쉬워했다. 날이 새면 영은은 이슬이 마르기도 전에 해소 기침으로 어렵사리 잠이 드신 할머니 곁을 몰래 빠져 나와 운림산방 아래로 향했다. 희뿌연 새벽 빛을 더듬으며 다가선 운림산방의 정 자나무는 그녀에게 유일한 희망이 되어 준 오래된 믿음이었다. 정자나무는 그녀에게 그리움의 모태인 어머니였고, 사랑하는 남편의 빈자리였다. 그 곳에 서는 아무런 꾸밈없이 솔직한 눈물을 흘릴 수 있었다. 그 누구 앞에서도 마음놓고 울어 보 지 못했던 영은은 이 정자나무 아래서는 실컷 눈물을 흘리며 경주의 앞날을 빌고 또 빌었 다. 경주는 아침에 열릴 재판을 위해 잠을 자 두려 했지만 새벽에 잠을 깨고부터는 좀처럼 다 시 잠을 청할 수 없었다. 장학회사무실의 화재가 있던 날 오전, 교회에서 본 게 마지막이었 던 정순은을 아침에 법정에서 만날 생각을 하니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그렇게 잠을 설 치고 난 뒤라 배식부들이 퍼 준 밥그릇을 몇 번 들여다만 보고는 끝내 숟가락을 놓고 자리 로 돌아가 생각에 잠겼다. 출정 명령이 떨어지자 호송 버스는 재소자들을 태우고 매번 향하던 그 길로 갔다. 호송 버스가 시장 로터리에서 잠시 신호를 기다리며 정차하자 경주는 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호송버스는 시간이 늦었는지 검은 포도를 따라 몇 정거장은 아예 신호조차도 무시하고 법원 으로 직행했다. 경주가 법정에 서자마자 재판장은 법정 서기에게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서류를 읽어 보 던 서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참고인인 중년 여자를 증인석에 세웠다 증인석에 선 중년의 여자는 정순은이었다. 경주는 당장이라도 달려가 허리춤이라도 꺾어 버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애써 감정을 억제했다. 재판장이 증인석을 향해 물었다. "참고인이 정순은 씨 맞습니까?" "참고인이라니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참고인도 증인도 아닌 그냥 평범한 자연인일 뿐입 니다." 정순은의 가늘면서 높은 톤의 목소리는 엄숙한 법정 안에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경주는 여자의 그런 태도를 보며 분노가 끓다 못해 어안이벙벙해지고 말았다. 자기는 아무 죄도 없 다는 듯이 너무도 태연히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피고인, 피고인이 주장하는 대질자인 정순은 씨가 이 사람 맞습니까?" "예, 분명히 맞습니다. 바로 저 여자가 정순은입니다." 경주는 분노에 절리는 목소리로 여 자를 쏘아보았다. "검찰측에게 묻겠습니다. 지금 피고인의 주장대로라면 검찰의 공소 유지를 할 수 있다고 자신하나요?" 공판 검사는 옆의 검사에게 눈길을 주며 채근했다. "예 , 공소 유지가 가능합니다." "피고인의 주장대로라면 검찰 수사 중에 한 번쯤 정순은 씨를 대질해 주었어야 하는데 기 록을 보니 그런 사실이 전혀 없는데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재판장이 공소 유지에 대해 의문을 실어 물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검찰측의 공소 유지에 변함이 없다는 증명을 위해 이 사건의 고소인 을 증인으로 채택하겠으니 받아주십시오." 수사 검사인 현 검사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그렇게 해야만 된다는 간절한 눈빛으로 팔했 다. "검찰측의 증인 신청을 받아들입니다." 재판장이 법정 서기에게 신호를 보내자 방청석으로 돌아간 서기가 고소인인 듯한 오십대 초반의 남자와 짧은 퍼머 머리를 한 사십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여자를 증인석에 앉혔다. "증인 일어서시오." 판사가 힘주어 말했다. "참고인 정순은 씨 , 이 증인들을 아시나요?" "무슨 말이세요? 저는 전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정순은은 자신에게 재판장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냉담한 얼굴이었다. "증인, 증인들은 이 사건의 고소인들이지요?" "예." "그러면 증인들은 앞의 저 여자분을 알고 있거나 본 적이 있나요?" "예. 만난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루에 연달아 두번 만났습니다." "어디서지요?" "기도원에서요." "아니 , 이 사람들이 누굴 함정으로 몰아붙여 ! 몰아붙이길." "참고인은 가만 있으세요." "뭘 가만 있어요?" "좋습니다. 그럼, 증인들은 저 피고인을 아시나요?" "예, 알고 말고요. 저 사람은 순 나쁜 놈‥‥‥‥." "허어." 경주는 증인석에 있는 그들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증인, 잠시 앉으세요." "피고인, 피고인은 고소인 즉 저 증인들을 만난 적이 있나요?" 그 때 경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 때까지만 해도 시끌벅적하던 방청석의 사람들 이 이내 조용했다. "모릅니다, 전혀 ‥‥‥‥." "저런‥‥‥ 피고인!" 현 검사가 경주의 말을 저지하고 나섰다. "검찰의 기습 심문을 저지해 주십시오." 그 동안 묵묵히 듣고만 있던 김 변호사의 눈이 재판장을 날카롭게 쳐다보고 있었다. "검찰측은 검사 심문이 있을 때까지 자제하세요." 현 검사가 멋쩍은 듯 고정된 안경테를 만지작거리다 고개를 떨구었다. "변호인은 심문하십시오." 재판장이 변호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피고인은 증인들을 만나거나 본 적이 없죠?" "예." "참고인에게 묻겠습니다. 참고인은 피고인을 한 번이라도 만난 적이 있나요?" "말 같은 소리를 하십시오. 전혀 만난 적이 없습니다," "참고인, 그렇다면 증인을 본 적이 없다는 게 사실입니까?" "그렇다고 몇 번 말해야 하나요. 저는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습 니다." 정순은은 잔뜩 화난 눈매로 누군가를 찾는지 사방을 살폈다. 이렇게 복잡하고 난해한 법 정이 또 어디에 있을 것인가. 경주와 김 변호사는 어디서부터 사건을 풀어 가야 잘지 방도 가 서지 않았다. "검찰에게 묻겠습니다. 지금 피고인은 증인들을 만난 적이 없다고 했는데 무슨 근거로 피 고인 이경주를 범인으로 지목했나요?" 재판장이 검사석을 향해 말했다. "고소인의 주장도 주장이지만 여기에 그 근거가 있습니다." 현 검사는 자신이 들고 있던 공소서류 중에서 경주가 작성한 계약서를 판사에게 전달했다. "으음." 판사는 고개를 끄덕 였다. "피고인, 이 계약서가 피고인이 작성한 것이 맞나요?" 판사는 계약서를 들여다보고는 서 기를 통해 경주에게 전달했다. "아닙니다. 이것은 저, 저기 참고인 정순은의 짓..." 경주는 분에 복받쳐서 말을 잇지 못하 고 있었다. "뭐야? 젊은 사람이 생사람을 잡는군. 나는 당신을 이 곳에서 처음 본다구." 정순은이 경주에게 큰소리를 쳤다. "증인, 이 계약서상으로 볼 때는 단지 피고인 이경주가 임야대금 지급자로만 되어 있을 뿐 소유자라는 것을 확인할 수 없는데 어떻게 피고인이 임야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고 임대 계약을 했나요?" 재판장은 증인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당했습니다. 저 여자와 피고인에게 완전하게 당한 거예요." "등기부 등본은 확인했나요?" "등기부 등본이 뭐 필요하겠습니까? 이 임야 매매 계약서자체만으로도 소유자가 누구란 걸 뻔히 알 수 있으며 임야를 매매한 액수와 지급인 이름이 있는데 그걸 믿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나요. 저희는 교회 집사라는 참고인과 피고인에게 당한 것입니다." "오늘의 이 사건 재판을 마칩니다. 다음사건 번호는 ‥‥." 경주는 교도관에게 이끌려 대 기실 안으로 들어와야 했다. 백구는 오늘도 밥을 먹지 않았다. 평상시 식성이 좋았던 백구였지만 옆에 살코기며 갈빗 살들이 줄줄이 쌓여 있어도 어느 것 하나 입에 대지 않았다. 오직 경주가 돌아오기만을 기 다려온 지가 9개월이 지나고 있었다. 경주가 집에 들어오지 않자. 백구는 온 동네를 샅샅이 뒤지느라 밖으로만 나돌았다. 경주 가 백구의 곁을 떠난 지 251일이 지났을 때부터 백구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명옥은 그간 경주와의 정을 생각하여 알뜰하게 백구를 챙겨가며 먹을 것을 주어도 전혀 입을 대지 않았다, 간혹 목이 마를 때 물로 목을 축일 뿐 종일 하숙방 판침 아래에 있는 경 주의 흰색 운동화를 앞발과 목덜미 사이에 감싼 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백구의 또랑또랑한 눈은 어느 새 이슬에 젖어 슬픔에 잠겨있음을 알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야위어 흐느적거리는 것이 예전의 건강한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제 백구 는 짖지도, 꼬리를 멋들어지게 흔들어 대지도 않았다. 백구의 눈은 경주에 대한 보고픔과 그 리움뿐이었다 경주 곁에서 백구는 언제나 충견이었다. 장학회 앞뜰과 하숙집을 오가며 항시 경주를 그 림자처럼 따라다녔다. 하루에 몇 번이고 경주와 걷고 뛰며 용봉골의 대지를 누볐지만 이제 는 백구에게도 경주의 체취는 멀어져 가고 있었다. 경주와 함께 했던 곳이면 어디든 구석구 석을 찾아 헤매었다. 그러나 경주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비가 오고 낙엽이 지면서 어느 새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백구는 낑낑거리며 어디론 가 그렇게 휩쓸려 다녔다. 새벽녘 경주와 걸었던 관현로와 아침이면 경주와 같이 산책했던 농대 앞을 샅샅이 뒤졌으며 1교시가 끝나면 명주와 장난치던 법대 신관 계단에서 하루 종일 눈을 비비며 찾아 다녔다. 경주와 점심을 먹었던 구내 식당을 찾아 귀를 종긋 세웠고, 경주와 수업이 끝나면 활보했 던 5·18광장을 찾아 꼬리를 흔들었다. 하지만 이제 백구 곁에는 경주가 없었다. 백구의 곁에 경주는 꼭 있어야 했다. 그러나 아무리 경주를 찾아도 경주는 나타나질 않았 고, 백구의 몸도 허약해져 가기만 했다 뭔가가 잘못 뒤집힌 것 같았다. 배식 반장이 양재반을 통해 다려 온 수의를 경주에게 주었다. 출정식에 나간 경주는 다시 호송 버스에 올라탔다. 호송 버스는 검은 트림을 해대며 제3통문을 빠져 나가고 있었다. 버스 안을 가득 채운 재 소자들은 모두가 약속이나 한 듯 침묵을 지이고 있었다. 경주도 창 밖만 바라볼 뿐 숨소리 도 내지 않았다 조밀한 철제 나사가 박힌 차창 너머로 보이는 겨을 풍경은 쌀쌀하고 황량했 다. 그의 머릿속엔 오늘 법정에 거는 기대도 컸지만 이 한겨울에도 단 한 번도 빼지 않고 진 도와 교도소를 오가며 고생했던 영은을 생각하고 있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자신을 찾아 와 날마다 새 힘과 사랑을 한꺼번에 주고 가는 영은의 사랑스런 눈빛을 떠올렸다. 버스는 무심하게도 그런 경주의 행복한 기억을 훼방이라도 하려는 듯 무섭게 달려 법원에 바로 도착했다. 대기실을 벗어나 법정 안으로 들어서던 경주는 웅성거리는 방청석을 한 번 쳐다보았다. 오늘도 여전히 장학회원들이 방청석을 지켜 주고 있었다. 무엇보다 변함 없는 영은의 눈 빛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경주는 방금까지도 다물었던 입을 열어 영은에게 미소를 보 이며 피고인석으로 앉았다. 법정 안은 잠시 숙연해졌다. 하지만 언제 그랬느냐는 듯 다시 술렁이기 시작했다. 정순은이 피고인석으로 다가와 경주의 얼굴을 한 번 쏘아보고는 앉았다. 고소인인 오십대 남자와 사 십대의 여자도 증인석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당당하게도 경주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변호인이 자리에 들어서자 재판이 시작되었다. "검찰측은 공소 사실 심문을 하시오." 재판장이 검사석을 바라보며 말했다. 묵직한 서류들 중 몇개를 빼내어 현 검사가 인어 내 려갔다 "피고인 이경주는 생활 정보지 광고를 통해 피해자들이 급히 농장을 구입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후, 실제 수만 평의 농장지대를 구입하려던 피해자를 기망하여 마치 자신이 광주시 서구 무한동 산 84번지 임야의 소유자인 양 행세하고, 그것을 사실로 믿고 찾아온 피해자들 에게 199x년 8월 )0일 저녁 9시 광주시 충장동 소재 '문화 커피숍' 에서 만나 자신이 작성 한 계약서를 직접 건네 주면서 피해자로부터 2억 )천만 원을 편취한것이다." 현 검사는 할 일을 모두 마친 사람처럼 만족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피고인은 이 사실을 인정합니까?" 공판 검사가 다시 물었다. "그건 사실과 다릅니다." "재판장님, 보시다시피 이렇습니다. 피고인은 자신의 행위를 반성하기보다는 시종일관 부 인만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무조건적인 부인은 인정이나 다름없는 것이죠." "이의 있습니다. 아직 재판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검사는 공소 사실만 말해야지 재판부에 예단까지 주는 결과적인 말을 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안경테를 만지작거리던 현 검사는 변호인의 눈을 피해 말없이 마리에 가 앉았다. "동의합니다. 변호인 반대 심문하시오." "증인, 증인의 주장대로라면 피고인이 범인이라는 게 틀림없는 것 같은데, 몇 가지 의문점 이 있습니다. 증인은 언제 피고인을 처음 보았나요?" "기도원에서였어요." 증인석의 사십대 여자가 분노에 찬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 날이 언제지요?" "8월 27일 토요일이었을 거예요." "프럼 , 증인과 만날 때 목격자나 참고인은 있었나요?~ "예. 제가 옆에 있었습니다." 오십대 남자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몇 번 만났습니다." "두 번입니다." "단 두 번 만났다고 했는데 피고인 얼굴이 기억나던가요?" "예." 여자가 머리를 긁적이며 경주를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증인, 증인은 시력이 좋습니까?" 변호사가 자리에서 나와 증인석 앞으로 다가서며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그저 그렇습니다." "증인은 어떤가요?" 이번엔 김 변호사가 남자에게 물었다. "보통입니다." 중년 남자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 "농장을 경영한다고 했는데, 농장을 경영하다 보면 수목이나 화초 등에 농약을 많이 주실 텐데, 그럴 때마다 농약이 묻은 손으로 눈을 비벼 시력이 더 나빠질 수 있다고 보아도 되겠 죠? 거의 30년간이나 농장 일을 했으니 말입니다." 김 변호사의 말이 끝날 즈음에 현 검사가 일어섰다. "재판장님 , 지금 변호인은 증인에게 유도 심문을 하고 있습니다." "동의합니다. 변호인은 심적으로 부담 주는 말을 자제하세요" 재판장은 즉시 변호인석을 내려다보며 검사의 동의를 받아들였다. "증인, 증인이 피고인을 두 번째 만났던 날이 언젠가요?" "... ..." "어서 말씀하세요." 김 변호사가 다시 물었다. "저 사람에게 돈을 넣기 전날 밤이었던 것 같아요‥‥‥." 여자는 말끝을 흐리며 대답다. "밤이라면 어디에서 몇 시 정도인지 기억하고 있나요?" "시내 커피숍에서 밤 9시 정도였 을 거예요. 아, 맞아요. 경제문제 기자 회견에 관한 뉴스를 하고 있었어요." 여자는 자신의 말이 확실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커피숍 이름을 알고 있나요?" "문화 커피숍이었습니다." "피고인, 피고인은 증인과 문화 커피숍에서 만난 사실이 있나요?" 변호사의 눈이 경주에게 옮겨졌다. "없습니다." "증인, 커피숍 규모가 어느 정도였나요?" 김 변호사가 증인의 눈을 빨아들일 듯 쳐다보며 물었다. "굉장히 컸어요.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큰 소리로 웅성거렸고 텔레비전을 보는 손님도 많 았어요." "피고인과 같이 앉았던 자리를 알고 있나요?~ "텔레비전이 있던 옆자리였습니다."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참고인 정순은 씨는 증인과 피고인을 전혀 모릅니까?" "전혀 모릅니다. 저를 이 사건에 끌어들이지 말아 주세요." 정순은은 재판장을 바라다보며 애원하듯 말했다. "재판장님. 증인이 주장하는 커피숍 현장을 증거로 채택합니다." 김 변호사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현장 증거 채택을 받아들입니다." 재판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공판 검사를 향했다 검사는 변호인의 요구를 받아들인 재판장이 못마땅하다는 표정이었지만 애써 그 표정을 감춘 채 자신이 들고 있던 빨간 색 수성 펜으로 그 날짜를 기 록하고 있었다. 경주를 실은 호송 버스는 둔한 검정 타이어를 이끌고 시내로 접어들었다. 호송 버스 안의 사람들은 창 밖을 바라보며 이내 한숨만 쉬며 아무 말이 없었다. 교도관은 달리는 차 안에 서까지 몇 번이고 큰 소리로 머릿수를 하다하나 세었다. 차가 교도소 앞 로터리에 이르자, 한 차선 안에서 신호 대기를 받고 있던 1톤 트럭 위에 는 어디론가 팔려 가는 듯한 개들이 짐짝 쟁이듯 실려 있었다. 차가 신호등을 막 벗어나자 경주의 눈은 1톤 트럭과 마주쳤다 경주는 고개를 돌려 트럭을 계속 주시했지만 호송 버스는 이미 회색 정문으로 접어들었다. 경주는 다시 그 곳에서 벌어질 일을 생각하면 곤욕스러워 눈을 감아 버렸다. 교도소 앞 로터리에서 달리던 1톤 트럭을 봤을 때 경주는 잠시 잊고 있었던 백구 생각이 났다. 1주일 전 법정 심리를 마친 후 호송 버스로 걸어가던 경주를 발견하고 달려온 백구와 한바탕 소동을 벌였던 기억이 쉽게 잊혀지지 않았다. 1주일 전 경주의 항소심 재판이 열리는 날이었다 백구가 경주를 보게 된 것은 장학회원들 덕분이었다. 재판 일정이 잡혀있던 아침에 장학회 사무실에서 홍보 전략을 짜고 있던 간부 중 한 명이 회원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역시 홍보 전략만큼은 대표님이 그 동안 꼼꼼하게 잘 챙겼어. 쉽게 봤더니 정말 만만치 않은 일이군. 큰일이야. 그렇다고 매번 일이 생길 때마다 대표님과 따로 연락을 할 수도 없 고...." 그 때 장학회 사무실 뒷문에 걸려 있던 달력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여자 회원이 말 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오후가 경주 선배, 아니 저희 대표님의 심리 날인데요?" 여자 회원의 말을 듣고 몇 명의 간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회원들은 경주를 '대표님'이라 고 호칭하였다. "벌써 심리 날이구나." "정말, 재판이 생각보다 오래 가네요. 저희 쪽에선 도대체 이해가 가질 않아요. 대표님처 럼 사리가 밝으신 분이 어떻게 그런 일에 말려들었는지." 누군가가 길게 한숨을 쉬며 얘기했다. "이럴 게 아니라 오늘은 우리 간부들이 법정으로 갑시다. 우리가 그 동안 대표님을 위해 서 지원해 준 게 아무것도 없지 않습니까? 기껏해야 돌아가며 법정 구경이나 간 것 외에는 없습니다. 마침 대강의 홍보 전략도 구상되었으니 법정에는 물론면회도 가는 게 좋을 것 같 습니다. 가서 먹을 거라도 넣어 드립시다." "좋습니다. 우리 간부들만이라도 그렇게 합시다." "저 , 괜찮을지는 모르겠지만 백구를 데려가면 어떨까요? 대표님도 반가워하실 겁니다." 장학회 사무실 화재 때 백구가 구해 줬던 회원이 말했다. "그러죠. 그런데 법정에 백구가 들어가게 그냥 둘까요?" "글쎄요. 우선은 부딪쳐 보고 그 때 가서 판단해 봅시다. 백구가 정말 좋아하겠군요. 그 동안 풀이 죽어 있는 것을 보고 안 됐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맞아요. 그릇이 큰 사람이라 백구도 한눈에 알아보나 봅니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들 하지 않습니까 백구가 사람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 역시 동감하고 있는 부분이지요. 개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대표님이 백구를 데리고 이 곳 사무실에 나오신 지 왜 오래돼서 이젠 제법 정이 들었나 봐요." 장학회 버스를 타고 법정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재판이 시작되어 있었다. 회원 중 한 명 이 백구를 데리고 법정 안으로 들어서려 하자 법정 안 출입문에서 수위가 저지했다. 법정 심리가 끝나고 회원들 중 한 간부가 대기실 앞마당의 호송 버스로 가자 모두 호송 버스 쪽으로 옮겨 갔다. 몇 명의회원은 장학회 버스에 올라탔고 간부들은 호송 버스 앞으로 몰려갔다. 백구도 회원을 따라 호송 버스 주위에서 떠나질 않았다. 호송 버스 부근에서 한참을 기다 리자 푸른 수의를 입은 사람들이 포승줄에 줄줄이 묶인 채 호송 버스로 다가섰다. 장학회 간부가 경주를 발견하고는 큰 소리로 외쳤다 "이경주 대표님, 힘내십시오." "대표님 !" 어느 새 회원들이 경주 옆으로 다가서며 목례를 했다. 백구도 회원을 따라 다가섰다. "대표님 ! 여기 좀 보세요. 백구가 왔어요!" 백구를 데리고 있던 회원이 경주 가까이로 다가갔다. "백구야!" 경주는 놀라 눈이 휘둥그래져 묶여 있는 자신의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 다. 자신을 부르는 경주의 목소리에 백구가 달려와 품에 안겼다. 컹컹컹.. 백구는 좋아서 어쩔 줄 몰라했다 백구는 네 발을 함께 모아 경주의 몸에 지탱한 채 경주 를 묶고 있는 포승줄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컹컹컹. 경주는 백구를 쓰다듬고 싶었지만 양손이 묶여 있어 움직이지 않았다. 백구가 경주의 주 위를 돌며 야단법석을 떨자 깜짝 놀란 교도관들이 재빠른 동작으로 재소자들을 호송 버스 안으로 밀어넣었다. 경주가 호송 버스 안으로 밀리며 올라섰다 백구도 뒤질세라 가볍게 발 을 올리자 교도관들이 금세 가로막고 앞문을 닫아 버렸다. 컹컹컹. 백구는 경주가 들어선 호송 버스 앞문이 떨어져 나갈 듯 짖어 댔다 이런 백구를 바라보던 교도관들은 놀라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회원 한 명이 백구를 안고 장학회 버스로 데려왔다. 백구는 버스 안에서도 그칠 줄 모르는 신음을 해댔다. 떠나는 호송 버스의 꽁무니에서 뒤틀 리듯 퍼져 나오는 검은 연기 사이로 작은 울음이 새어 나왔다 장학회 버스가 차선을 좁혔다 넓혔다 하며 몇 차례 호송 버스를 앞서 갔다. 두 버스가 교 차로에서 긴 매연을 뿜어 내고 장학회 버스가 교도소 앞에 먼저 다다랐고 회색 철문이 열리 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호송 버스의 엔진 소리와 함께 경주의긴 한숨이 터져 나왔다. 몇 명 의 장학회 회원들이 호송 버스 곁으로 다가가자 경주가 그들 속에서 백구를 발견하고는 휘 파람을 불었다. 백구가 경주의 휘파람 소리를 듣고 껑충껑충 뛰며 경주를 향해 달려가려던 순간 정문이 열리고 호송 버스는 거친 숨을 내뿜으며 정문 안으로 사라졌다. 백구도 쏜살같이 뛰었다. 질 주하던 차가 제3통문에 이르자 통문 경계 직원들이 차를 수색하고 한 대가 빠져 나갈 만큼 만 차로를 열어 주었다. 백구가 들어갈 틈도 없이 호송 버스는 사라졌다. 경주가 들어간 통문 아래서 울부짖던 백구는 5미터 가량의 회색 담을 수차례 올라타기를 시도했으나 경계 직원들이 퍼부은 물 세례로 뒷걸음질만 쳤다. 썰물처럼 빠져 나오던 면회객들의 둔탁한 발치에 떠밀려 백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 렸다. 회원들은 노을이 질 때까지 백구를 찾았지만 백구는 보이지 않았다. 모두가 지친 표정 으로 교도소를 떠났고 해는 기울었다. 달님도 백구의 설움즐 알아차린 듯 구름에 가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늦은 밤 오로지 교도소 바깥 마당을 비춰 주는 건 별빛도 달님도 아닌 강렬히 쏘아 대는 경계 조명뿐이었 다. 자정이 지날 무렵 유난히도 경계 조명의 직사 광선이 백옥 빛 털북숭이를 내리쬐고 있었 다. 지독하게도 밝은 섬광이 강렬하게 백구를 비추고 있었다. 아직까치 백구는 교도소 바깥 마당을 떠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관사와 놀이터 사이의 빽빽한 정원의 나무 숲에서 백구 가 휘청거리며 통문 쪽으로 다가섰다. 백구는 일직선으로 쭉 솟은 회색 담벼락을 몇 번이고 앞발로 건드려 보았다. 미동도 하지 않는 5미터 가량의 회색 벽은 백구가 넘기엔 역부족이었다. 백구는 이 통문을 지나지 않고 는 경주를 만날 수 없음을 알았는지 다시 한 번 통문 벽에 콧잔등을 문질러 보았다 경주의 휘파람 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코로 문지르고 발로 건드려 보아도 회색 벽은 목석처럼 꿈쩍 도 하지 않았다. 회색 벽에서 눈이 떨어지지 않고 있던 백구에게 찌를 듯한 불빛이 멈추더니 곧 경보 등이 깜박거리며 비상 조나 밀물같이 달려왔다. 백구는 그들을 얼른 피하려 했지만 다리는 마비 되어 있었다. 누군가가 백구의 허리춤을 세게 찼다 어디로 나가떨어졌는지 백구는 보이지 않았고 그들 은 왔단 길로 되돌아가 버렸다. 그 다음 날 햇볕이 내리쬐는 정오까지도 백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교도소 밖의 넓은 마당에는 면회객들이 발 디딜 틈 없이 북적대고 있었다. 해가 서산으로 기울 때쯤 법정에 나갔던 호송 버스가 정문을 들어서며 제3통문을 통과하 려 하고 있었다. 통문 경계 직원이 차의 수색을 끝내고 만족스런 표정을 지으며 막 뒤들아 서려할 때 백구가 어디선가 튀어 나와 통문에 바짝 붙었다. 백구를 발견한 경계 직원이 가 지고 있던 곤봉으로 백구를 내리쳤고 백구는 뒷걸음치다가 고꾸라져 버렸다. 경계 직원이 손을 들어 곤봉을 다시 한 번 휘두르려 하자 백구가 총총걸음으로 달아났다. 백구가 서럽게 짖어 댔다. 백구의 눈물이 목덜미까지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뒷걸음질치는 백구의 걸음은 어딘지 모르게 어색해 보였다. 땅바닥과 맞닿는 왼쪽 뒷발은 이미 보도 블록 에 반 치나 떠서 평형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아픈 몸을 하고 절룩거리며 면회객 들의 틈에 끼여 사라졌다. 교도소의 밤은 으슥하기보다는 스산했다. 이내 나타날 줄 알았던 백구는 보이지 않았다. 경계망의 직사 광선도 하늘 끝의 은하수도 백구를 찾지 못했다. 대낮이 되어도 노을이 다 할 개까지도 교도소 앞마당엔 백구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새벽으로 접어들자 직사 광선처럼 쭉 뻗은 불빛이 백설기처럼 하얀 것을 비추고 있었다. 쓰러져 꿈틀거리는 것은 분명 백구였다. 백구는 일어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백구가 휘청거리는 몸을 세워 통문으로 향했다. 백구가 5미터 회색 담벽에 회전을 하며 공중 구르 기를 시도했지만 절고 있던 왼쪽 뒷발이 벽에 부딪치며 미끄러졌다. 백구는 몸을 다시 일으켜 직사 광선이 비추지 않는 정원의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섰다. 백구가 꼬리를 치켜 세우며 회색 담벽 쪽을 향해 발을 내딛는 순간 그물망이 백구의 등을 덮쳤다. 비호처럼 몸을 피한 백구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앞발을 옮기려던 백구의 허리춤을 갑자기 채찍처럼 쇠줄이 휘감았다. 혼비백산하여 정원의 큰 나무로 몸을 숨긴 백 구에게, 뒤쫓아 달려온 잿빛 무리들이 곤봉을 휘둘렀다. 곤봉을 피하려던 백구의 머리가 철조망에 찢기면서 붉은 피가 솟구쳤다 잿빛 군홧발이 기 회를 놓칠세라 백구의 뒷다리를 힘껏 짓이겼다. 백구는 몸을 움찔하며 군홧발의 허벅지를 물었다. 백구에게 물어뜯긴 사내는 큰 소리로 비명을 지르며 마구 뛰었고 백구는 밟힌 다리 를 질질 끌며 겨우 일어섰다. 비상 경보가 울리고 잿빛 무리들이 백구를 찾아 포위망을 좁혔다. 백구의 잘생긴 팔각형 용모가 구겨진 종잇장처럼 형편없는 모양새로 쓰러졌다. 그물망에 백구의 앞다리가 걸치려 하자. 백구는 다시 기운을 내어 잿빛 군화의 가랑이를 빠져 나와 가뿐히 그들 무리를 뛰어 넘었다. 그러고는 교도소 외각 철조망에 온몸이 찢긴 채 비닐하우스가 있는 농로로 달음질쳤다. 달아나는 백구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무리들도 백구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언제 백 구를 쫒았느냐는 듯 황망히 사라졌다. 백구가 장학회원을 따라 경주를 만나러 하숙집을 떠난 지 5일이 지났지만 백구는 하숙집 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6일째 되던 날 이른 아침 하숙집으로 피투성이가 된 백구를 환 경미화원이 리어카에 싣고 왔다 백구의 목에는 경주가 새겨 준 '진도 백구-광주시 북구 행운동 517번지' 라는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백구를 받아 든 명옥은 환경 미화원에게 감사의 뜻을 전할 생각도 하지 않고 힘없는 백구를 보듬고 눈물만 흘렸다. 명옥의 온갖 정성에도 불구하고 그 날 밤, 백구는 경주의 방을 한 번 쳐다보더니 그녀의 발목 밑에 엎드려 그대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명옥은 백구를 끌어안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 렸다. 그리고 백구의 죽음을 보면서 밀려오는 죄책감에 몹시 괴로워했다. 다음 날 아침이 밝아 오자 명옥은 장학회원 한 명을 불러 정원에 백구를 그대로 묻어 주 었다. 김 교위가 변호사 접견을 알려 왔다. 아침 일찍부터 김 선배가 경주를 찾아온 것이다. 변 호사 접견실은 일반 접견실 옆 2층에 마련되어 있었다. 경주가 계단을 올라 접견 용지를 접 수하고 들어서자 벌써부터 수감자들은 저마다의 선임 변호사들과 열띤 논쟁을 벌이고 있었 다. 경주가 김 선배는 다가서자 김 선배가 악수를 청하고 경주를 앞에 앉혔다. "경주야, 문제의 열쇠는 너의 하숙집 주인 여자에게 달려 있다는 생각이 든다." 김 선배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경주의 눈을 바라보았다. "...." "다음심리 때 하숙집 여인을 증인으로 채택해 참고인 정순은과 인정 대질을 해야겠어. 아 무래도 참고인의 자격이 의심이 간단 말이야." 김 선배는 들고 있던 서류들을 경주에게 내밀며 뭔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경주의 대답을 기다렸다. "선배님, 저도 하숙집 주인의 도움을 절실히 느끼고 있습니다만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경주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1주일 전에 내가 하숙집 여자를 찾아가 만나보았다 2시간 동안이나 사건 개요 얘기해 줬는데 여자가 한마디도 하지 않더구나. 그런데 느낌이 이상했어. 무언가감추고 있는 것 같았단 말이야." "선배님, 이제 항소심 만기도 한 달밖에 안 남았습니다. 이러다간 1심 형기를 다 마치고 출옥하는 게 아닌가 하는 불길한 생각이 듭니다." 김 선배를 바라보는 경주의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재판부에 탄원서는 써 보냈겠지. 검찰로선 네가 쓴 계약서자체만으로 1심 형량 유지가 가능하다는 눈치야 고소인이 너를 확실하게 범인으로 밀어 붙이는 이상 항소심 재판부도 원 심을 존중할 수밖에 없지." 김 선배의 말은 절망을 나타내는 거나 다름없었다. 다만, 그런 낌새를 보이지 않으려는 듯 김 선배가 손끝으로 넥타이를 어루만졌다. "그렇다면 저의 억울함을 누가 풀어 줍니까? 그 동안 허비한 시간과 가족들의 고통을 누 가 책임져야 하느냐구요." 경주는 주먹을 쥐며 억올함을 호소했다. "이해하지만 어떻게 하겠니 다행히도 참고인 정순은이 완강하게 고소인 주장을 반박하고 있으니 그나마 심리 연장이 가능하다고 본다." "진작 1심 때부터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한 게 후회됩니다. 」말을 끝낸 경주는 머리를 움 켜쥐었다. 왜 자신이 처음부터 여기에서 빨리 헤어 나오려 하지 않고 무언으로만 자신의 결 백을 주장했는지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게 말이야 너의 묵비권이 이 엄청난 결과를 낳아 버린 거나 다름없어. 물론, 계약서 의 자필 자체만으로도 목격자가 없는 이상 유죄 인정이 충분했지만 1심을 그냥 놓친 것 같 아 그게 제일 안타깝다." 김 선배는 이제까지의 경주 행동으로 인해 불리해질 결과를 염려했다. "이번에 목격자가 없다면 항소심도 하나마나겠죠." "하지만 최선을 다해 보는 수밖에 ‥‥. 하숙집 주인이 증언만 해 준다면 너의 주장이 어 느 정도 타당성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쉽진 않을 거예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우선 기대를 하고 마지막까지 희망을 버리진 말자. 또 하숙 집 주인 여자가 증언을 거절할 것을 대비하는 수밖에 ‥‥‥‥." 김 선배는 무슨 약속이라도 있는지 서둘렀다. 선배의 말을 듣고 있던 경주의 등줄기에서 는 싸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명옥은 밤새껏 불을 켜 놓은 채 정원에 묻은 백구의 곁을 떠 나지 않고 눈물을 흘렸다. 백구가 묻힌 정원의 흙을 몇 번이고 어루만지다가 명옥은 경주의 빈 방을 향해 몇 걸음 옮기더니 애달픈 통곡을 했다. '이 선땡님, 제가 죽일 년이에요.' 다음 날 아침, 명옥은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무엇인가 결심한 듯 화장대에서 목욕용품을 챙겨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욕조 안의 비누 거품 사이로 그녀의 횐 피부가 살짝 드러나 있었다. 명옥은 짧은 커트 머 리를 여러 번 헹구어 내고는 몸에 묻은 비누 거품을 닦아 내기 시작했다. 거울 앞에 선 명옥은 몇 번이나 머리를 털며 거울을 보았다. 무엇인가 결심한 그녀의 얼 굴은 이제 평온한 기운마저 감돌았다. 화장대 앞에 앉아 바라본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기보 다는 무척 야위었으며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누가 보아도 어딘가 몹시 아픈 곳이 있을 거 라 생각했을 것이다. 뻐꾸기 시계가 9시를 가리켰다. 명옥은 그 때서야 자신이 화장대에 너무 오래 앉아 있었 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거울에 비친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혀 있었고 그런 자신의 모습을 뒤로한 채 옷장 문을 열었다. 감방은 아침부터 시끄러웠다 이감자들이 입방 거부를 하고 한바탕 싸우는 바람에 관구실 직원들이 이미 수감된 사람들과 이감자를 화해시키느라 정신이 없었다. '못 받겠다. 못 들어가겠다, 안 들어가면 독방에 처넣겠다. '라는 식의 대화가 오고 간 지 1시간째가 되었다. 교도소에서는 남의 방에 대해서 이래라저래라 할 처지도 못 되어서 그런 지 경주 방 사람들은 모두가 꼼짝달싹하지 않았다. 방은 조용하다 못해 고요하기까지 했다. 동양 철학을 했다던 쉰 목소리의 백발 노인으로부터 신수에 관한 얘기를 듣고 있던 터라 더욱 그랬다. 이렇게 매번 경주의 방에서는 노인으로부터 인생 철학을 배우고 있었다. 노인 의 해박한 지식에 수감자들은 두 귀를 세워 경청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미 관구실 안에서 는 경주의 방이 모점수의 방이라고 소문이 나 있었다. 노인은 풍수에 대한 이야기를 끝내자 고사 성어를 펼쳐 보이며 말했다. "오늘은 예기의 곡예편 중 하나를 살펴보세나. '아버지의 원수는 반드시 죽여야 하며, 또 한 아버지의 원수와는 한 하늘 아래서 살 수 없으며, 또한 형제의 원수를 보고 무기를 가지 러 가면 늦으리. 즉 형제의 원수를 만나면 무기를 가지러갈 틈이 없이 쳐야 한다는 소릴세. 오늘날 이 고사는 형제, 부자간의 천륜지정과 또한 우애와 가족애를 나타내는 말로 가족 은 그 누구도 침범해서는 아니되며, 가족의 구성원 또는 타인의 침해를 용인하거나 부도덕 한 마음을 먹어서는 안 꾄다는 말이오." 모두들 노인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을 살다 보면 억울하고 분한 일들이 많이 있잖소. 인간 사가 다 그렇겠지만 특히나 억울하게 들어온 사람이라면 한번쯤 알아 두어야 할 유익한 성 어 같아 함께 배우면서 알고 살자는 것이라오." 노인의 눈은 자신이 공무 집행 방해죄로 억울하게 들어왔다는 가체가 불쾌하다는 표정이 었다. 모두들 노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경주도 그들 틈에 끼 여 노인의 눈빛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용서 "이경주 씨 면회요." 면회실로 가는 소로를 따라 포플러 나무가 한참 푸르러 있었다. 경주는 면회실에서 자신 의 번호가 불려질 때까지 나무 의자에 앉아 펀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경주의 면회 순번 은 8회차였다. 벨이 울리고 7회차 면회가 끝나자 송사리 떼처럼 푸른 수의를 입은 사람들이 접견실을 빠져 나왔다. 경주가 지정된 접견실로 들어서자 머리를 숙인 채 한 여자가 흐느끼고 있었다. 경주는 자 신의 눈을 다시 한 번 비비며 창살에 가린 유리벽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여자는 경주가 앞에 앉은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유리벽에 기댄 채 눈물만 흘리고있었다. 그녀의 울음소리 에 교도관이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다가 여자를 향해 말을 꺼냈다. "아주머니, 면회 시작되었습니다." 여자는 얼굴을 들지 못하고 있었다. 경주는 말없이 여자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녀는 유리 벽에 묻었던 고개를 들어 올리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이 선생님 , 모두가 제 잘못이에요. 혹흑흑...." 명옥이 처음 말문을 열었다 경주는 명옥을 보자 너무나 반가워 어떤 말을 먼저 해야 할지 망설였다. "잘 오셨습니다." "얼마나 고생이 많으세요. 건강은 괜찮으세요?" "괜찮습니다. 그 동안 잘 계셨죠? 하숙집 학생들은 많이 늘었습니까?" 경주는 명옥의 안부를 먼저 묻고 있었다. "이제야 찾아온 것을 용서하세요. 제가 들어갈 자리를 죄 없는 이 선생님께서 지키고 계 시다니." "난데없이 그게 무슨 소리예요?" "어제 아침에 백구가 죽었어요." "네, 백구가 죽다니요?" 경주는 두 손을 유리벽에 바짝 갖다 대며 너무 놀라 다시 한번 물었다. "백구가 왜요? 사고라도 난 건가요?" "다 제 잘못이에요. 용서해 주세요." "백구가 죽었다니 어떻게 된 영문인지 자세히 좀 얘기해 주세요." "백구가 장학회 회원을 따라 이 선생님을 보러 간 날 이후, 5일 동안 행방 불명이 되어 들어오질 않았어요. 그런데 어제 아침에 피범벅이 된 백구를 환경 미화원이 발견하고 집으 로 데려왔어요. 제가 알고 있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왜 백구가 피투성이가 되었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명옥은 흐르는 눈물을 손수건으로 닦아 냈다. 두 사람의 대화에 관싱이 있는 듯 교도관은 유리벽 안과 밖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이 선생님, 용서하세요. 이렇게 된 것이 모두 저.... 언니 때문애..." 그 말에 경주는 그녀 쪽으로 한 발짝 다가서며 금방 뛰쳐나갈 것처럼 재촉하며 물었다. "언니라면 정 집사 말입니까?" "맞아요. 지금 그 정 집사는 시내에서 의류 대리점을 하고있어요." 명옥은 정순은과 관련된 지금까지의 모든 이야기를 경주에게 사실대로 말해 주었다. 그러 고는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이제야 알겠습니다. 이것은 법보다 인간 사슬의 덫이란 말이 더 옳겠군요." "이 선생님, 제가 다 잘못했어요. 이 선생님 같은 분을 지켜드리지 못하고...." "아주머니, 이제라도 저를 도와 주신다면 모든 걸 용서해 드릴개요." 경주는 명옥을 바라보며 힘주어 말했다. "백구의 눈물을 보면서 저는 모든 것을 결심했어요. 이 선생님과 백구가 인간도 넘지 못 할 정을 이어 가는 그 아름다움에,제 마음은 깨끗이 씻겨 내려갔답니다." "감사합니다. 아주머니." "제가 도와 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세요. 저는 이 길로 자수하러 가려고 합니다." 명옥의 눈까풀이 파리하게 떨리고 있었다 얼마 후 면회 종료를 알리는 벨이 울렸다 교도 관이 시간이 다되었다며 경주를 일으켜 세웠다. 명옥은 자리를 떠날 생각을 하지 않고 경주 를 계속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주머니, 자수는 안 됩니다. 그리고 정 집사에게 절대 연락해서도 안 됩니다. 아셨죠, 아 주머니?" 교도관이 경주를 접견실 밖으로 끌어 내자 그는 화난 표범처럼 교도관-을 밀쳐 버렸다. "아주머니 ! 명심하십시오. 모레가 제 마지막 심리입니다. 오전 10시에 형사 법정으로 꼭 나와 주십시오." 교도관에게 끌려 접견실 밖으로 끌며나가는 경주의 간곡한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 다. "아주머니, 아주머니." 애타게 명옥을 부르는 경주의 목소리는 접견실 안에 메아리쳤다. 경주를 실은 호송 버스는 법원 정문을 통과하여 법정 대기실1 있는 콘크리트 건물로 바짝 붙어 전다. 경주와 함께 묶인 재소자들이 한숨을 쉬며 대기실 안에 하나둘씩 자리를 잡았다. 경주는 자리에 앉아 손으로 머리를 움켜쥔 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고 있었다. 오늘이 경주에 게 있어 가장 중요한 항소심 마지막 심리 날이다. 경주의 머릿속은 온통 명옥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경주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자리 에서 일어나 대기실 담당 교도관을 찾았고, 담당 교도관이 법정 안 정리에게 몇 마디를 건 넸다. 말쑥한 정장 차림의 한 사내가 대기실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경주는 기다렸다는 듯 이 걸어 들어오는 김 선배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했다. 김 선배는 경주의 말에 흠칫 놀라며 경주의 손을 굳게 잡았다. "됐다. 이제야 심리다운 재판이 되겠구나." "선배님, 과연 나타날까요?" 경주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김 선배의 눈을 응시했다. "걱정 마. 하숙집 여자가심경의 변화를 일으켰으니 그것으로 우리에겐 유리한 증거가 되 는 거야." 김 선배는 경주를 위로하며 잡았던 손을 놓고 안심하라는 듯 어깨를 토닥인 후 방금 자신 이 앉아 있던 변호사 대기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앞에 앉아 있던 대기실 안의 죄수들이 반정도가 빠져 가가고 경주가 법정 안에 들어섰다. 법정 안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변한 거라곤 하나도 없었다. 경주와 정면으로 앉아 있는 재판 장과 배석 판사들은 졸린 듯한 눈으로 서류 뭉치들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변호사가 변호인석에 도착하자 재판장이 법정 서기를 시켜 증인과 참고인을 불렀다. "피고인 이경주에 대한 결심을 하겠습니다. 검사측은 구형하시오!" "원심 형량과 같습니다." 검사가 재빠르게 일어섰다가 자신 있는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변호인 변론하시오!" 재판장이 변호인을 향해 강한 어투로 말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피고인 이경주의 최후 변론에 앞서 먼저 제 자신부터가 인간의 도리 를 다하고 있는지 반성하며 변론에 임하고자 합니다. 이 사건을 살펴볼때 원심의 형량을 몸 과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피고인을 불쌍하게 생각합니다. 피고인 이경주는 지역민들의 기대에 부흥하고자 고등 학교 때부터 서울로 유학 가서 자신이 하고 싶은 공부와 가야 할 길을 위한 뚜렷한 목표를 정하여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그 총명함 과 지식을 함께 겸비한 피고인에게도 인간이 만들어 낸 덫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사건을 전체적으로 볼 때 피고인 이경주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그 턴에 걸리면 빠 져 나을 수 없었을 겁니다. 계획적인 함정에 빠져 오늘의 피고인 이경주가서 있는 것입니다. 물론. 검찰에서는 피고인의 자필로 씌어진 계약서만으로도 공소 유지가 가능했다는 것을 인 정합니다. 그것은 고소인의 강한 주장이 뒷받침되었을 것이고 피고인입장에서는 목격자가 없는 상태 에서 항변하기란 오히려 자신의 유죄를 인정하는 결과라 생각되어 검찰 조사와 1심 재판에 서도 단지 '아닙니다, 모릅니다' 로만 대답했을 것입니다. 또한 고소인이 주장하는 사건의 중요 대목대목에서는 묵비권을 행사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피고인 의입장은 이러했습니다. 피고인의 성격으로 보아 피고인을 계획적으로 함정에 빠뜨린 누군가에 대한 원망보다는 피고인 자신에게 학대와 채찍을 가할 시간적 여유조차 없었다는 것입니다. 피고인은 법학도입니다. 그것도 학계에서는 인정받을 정도로 유능한 인재였습니다. 그런 피고인으로서는 피고인 자신이 앉아 있어야 할 법조석이 아닌 피고인의 입장에서 무얼 생각 했겠습니까? 그것은 피고인 이경주가 아니고서는 그 누구도그의 마음을 대신 얘기해 줄 수 없을 것입니다 천성적으로 타고난 피고인의 외고집은 범죄의 사실보다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자학이 앞섰던 것입니다. 다음은 이번 사건이 절대적으로 피고인과 무관하다는 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첫째로 항소 심 재판 중에 변호인의 요청으로 실시된 현장 검증을 통해 볼 때 고소인의 주장은 맞으나 그 범죄의 자리에는 피고인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고소인이 피고인과 만났다는 문화 커피숍 은 100여 평의 넓은 공간으로서 하루에도 약 500여 명의 손님이 오고 가는 큰 곳입니다. 당시 고소인과 피고인이 만났다는 저녁 9시경은 하루 중 손님들이 가장 많은 시간대였고, 더구나 그 날은 경제 문제 기자회견에 관한 특별 뉴스가 집중 보도되고 있던 관계로 더욱더 많은 손님들이 웅성거리고 있었습니다. 하루에 500여 명의 손님이 오고 가는데, 그 날은 뉴스를 보기 위해 커피숍에 들른 손님도 있었을 것이므로 평균치에 어느 정도는 더해야 옳을 시간임을 밝히고자 합니다. 그리고 고소인의 주장대로라면 고소인과 피고인이 앉아 있던 자리는 텔레비전 옆자리로 2 미터 크기의 사긱헝 탁자였습니다. 고소인과의 거찌는 2미터 이상의 간격이 있었고, 따라서 고소인이 텔레비전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면 앞사람의 생김새에는 별 관심이 없었을 것입니 다 또한, 텔레비전 앞에 모인 손님들이 피우는 담배 연기로 인하여 앞이 잘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더욱 고소인이 피고인과 얘기를 나눴다는 시간도 단 5분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데 단 5분간에 걸쳐 인상 착의를 기억한다는 것 자체도 의문 입니다. 둘째로 고소인은 피고인과 기도원의 임야에서 한 번, 그리고 커피숍에서 한 번, 도합 두 번의 만남을 가졌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고소인이 만난 사람은 피고인이 아닌 제3의 인물일 가능성이 크며, 또한 피고인이 기도원 입구에서 만난사람은 고소인이 아니었습니다. 셋째로 고소인은 피고인과 전화 통화로서 거래를 한다는 승낙을 주고받았을 뿐 실제의 만 남을 통해 음성을 확인한 것은 커피숍에서의 단 5분뿐입니다. 넷째로 항소심에서야 만나게 된 참고인과 피고인의 대면 관계에서 참고인과 피고인 간에 일면식도 없었다는 참고인의 주장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참고인의 주장을 볼 때 항 소심 재판에서야 난생 처음 피고인과 고소인을 보게 되었다는 말을 좀더 심도 있게 받아들 여야 할 것입니다. 다섯째로 피고인은 비록 검찰과 1심 재판에서는 묵비권을 행사하였지만 1심의 유죄에 대 해서는 즉시 항소하여 적극적으로 재판에 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본 변호인은 위 내용들을 살펴볼 때 피고인은 이번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사실에 도달하였으므로 무죄를 주장하는 바입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고소인, 피고인, 참고인의아 픔을 이루 말할 수가 없겠지만 그들 모두는 똑같은 피해자입니다. 이 사건은 제3자의 계획 된 범행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증거로서 다음과 같은 자료를 입증하고자 합니다 먼저 참고인 인 정순은 씨는 이 사건 외에도 현재 헝사 304호 법정에서 공문서 위조죄로 재판 계류 중에 있으나 참고인 정순은 씨는 그 사건과도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사건을 원점으로 돌려 놓고 볼 때 지금의 참고인인 정순은 씨는 피고인 및 고 소인과는 사건 자체를 떠나 사회적으로도 전혀 무관하다는 사실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여 러 정황들을 검토해 볼 때 참고인 정순은 씨를 가장한 제3의 인물이 계획적으로, 피고인은 물론 참고인을 함정에 빠뜨리게 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만약에 참고인을 가장한 제3의 인물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거증 책임을 검찰측에 요구하고 싶으나, 촌각을 다루는 사건인 만큼 항소심 만기가 얼마 남지 않은 관계로 본 변호인은 이 자리에서 정식으로 재판부에 신원 확인을 요청하고자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1950년생 전후의 정순은이라는 실명에 대한 신원을 재판부가 직권 조 사하여 주셨으면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제3의 인물은 법대생인 피고인을 최대한 이용했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보아 일반인이라면 누구나 법대생이 법을 이용했으면 했지, 법에 이용당할 수 있겠느냐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바로 그 사실이 이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 인지도 모릅니다. 감히 범인은 피고인이 법대생이라는 점을 십분 활용하여 교묘한 계획으로 끌어들였던 것입니다. 그러나본 변호인의 주장도제3의 인물인 범인이 나타나지 않는 이상피 고인에게는 계약서 자체와 고소인의 증언 내용만으로도 유죄를 받아야 마땅할 것이라 생각 합니다. 하지만 본 사건은 참고인과 피고인을 사칭한 제3의 인물들이 있습니다. 법조인으로서도 내다볼 수 있는 한계가 있고, 유죄 판결이 내려지면 범인이 잡힐 때까지 피고인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해야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누구의 잘못에서 온 것 이겠습니까? 피고인은 개인주의적인 이 사회가 방관한 유산을 한몸에 안고 쓰러져야만 할 것입니다. 모든 것을 피고인의 책임으로 돌려 간단하게 끝낼 수도 있겠지만, 균등한 정의 실 현을 사명으로 하는 법조인의 한 사람으로서 그냥 돌아서기에는 마음이 무겁습니다. 이상으로 변호인의 최후 변론을 마치면서 변론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증인을 세우고자 합1다. 이상입니다." 김 변호사는 자신 있는 눈빛을 경주에게 한 번 보내고는 자리에 앉았다. 방청석은 변론을 듣고 숙연해졌다. 김 변호사가 변론을 하기 전부터 방청석 앞자리에서 작은 소리로 흐느끼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한없이 흐르는 여자의 눈물은 하얀 블라우스 아래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고개만 숙이고 있던 경주의 손은 땀에 흥건히 젖어 있었다. "변호인의 증인 요청을 받아들입니다." 재판장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법정 서기에게 한 장의 서류를 받았다. 재판장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란 경주는 주위를 한 번 둘러보더니 다시 고개를 숙였다. 재판장은 변호인이 건네 준 서류를 체크해 나가다가 방청석으로 눈을 돌렸다. "피고인에게 유리한 증거가 있다는 말씀이죠? 좋습니다. 피고인의 하숙집 주인을 증인으 로 채택합니다. 증인 나오시오." 갑자기 법정 안찌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재판과정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지켜보 고 있던 영은은 두 손에 배어나온 땀을 옷에 문지른 뒤 마른 침을 겨우 삼켰다. 다리가 후 들거렸다. 암전이었던 연극 무대에 밝은 스포트라이트가 강하게 비춰지는 것 같았다. "증인은 증인석으로 나와 주세요.」 방청석 앞자리에서 흐느끼고 있던 명옥이 일어섰다. 방청석은 또다시 침묵이 흘렀고 명옥이 구둣발 소리를 내며 증인석에 다가가 앉았다. 검사석은 긴장이 흐르고 있었다. 증인 선서가 끝나고 한참을 명옥이 말을 이어 갔다. 명옥 은 한 번도 재판장을 응시하지 않은 채 경주만을 쳐다보면서 증언을 마쳤다. 참고인석의 여자는 증인의 말에 안절부절못하는 신음을 토해 냈다 "사실이죠? 허위 증언을 했을 경우 위증죄로 처벌받을 수도 있습니다." "예, 모두가 사실입니다." 현 검사가 증인을 쳐다보고는 이마의 땀을 닦았다. "검사는 증거 보존하십시오. 재판부의 직권으로 정순은의 신병을 확보합니다. 2주 후에 선 고하겠습니다." 침묵이 흐르던 법정 안의 열기가 찜통 속 같았다.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자리를 떠났 다. 법정 안은 너무나 조용했다. 영은은 할머니의 팔을 꼭 붙들고 경주 바로 뒤에 자리를 잡았다. 장학회원들은 방청석 여 기저기에 앉아 저마다의 생각에 잠겼다. 재판정의 정리가 기립을 알리자 재판장이 희끗희끗한 머리를 휘날리며 자리에 앉았다. 재 판장을 중앙으로 하여 양 옆에 배석 판사들도 따라 앉았다. 그러나 검사석은 비어 있었다. 재판장이 무거운 한숨을 쉬며 법정 서기가 미리 준비해 놓은 서류 뭉치를 빼 들었다. "사건 번호 9X노 823129XXX피고인 이경주에 대한 원심을 파기하고 무죄를 선고한다." 재판장의 입술은 말라 있었다. 재판장은 서류를 제자리에 두고 검정색 법의를 걸친 채 자 리에서 일어나 들어왔던 문으로 사라졌다. 배석 판사들도 그를 따라 나섰다 재판장은 그 한 마디를 하기 위해 이 고요한 법정 안을 찾은 것이다. 재판장이 나가자 법 정 안은 여기저기서 웅성거렸다. 회원들의 함성과 박수 소리가 법정 안을 가득 채웠다. 영은 은 경주의 품에 안겨 끝내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고, 경주는 그 자리에서 할머니에게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렸다. "그려, 그려... 내 손주, 장하다. 암, 장하고 말고...." 검버섯이 핀 할머니의 여린 손은 경주 의 머리를 연신 쓰다듬었다. 법정 안을 꽉 메웠던 장학회 회원과 방청객들이 떠나고 장학회 간부 몇 명이 나란히 말을 주고받으며 법원 마당을 나서고있었다. "글쎄 말이야, 하마터면 대표님 사건이 미궁에 빠질 뻔 했지. 강한 사람들만이 살아가는 세상인 줄 알았는데 간사한 사람들이 더 잘 사는 세상이야." 키가 큰 회원이 옆의 하늘색 점퍼를 입은 회원의 옆구리를 가볍게 치며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어떻게 사촌 간에 한문 이름이 끝자인 은과 은이 다르다고 이용할 수 있었을까요?" 하늘색 점퍼를 입은 회원도 쓰디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살레살레 흔들었다. "여자가 바람을 피우면 더 영리해진다는 말이 맞나 봐 남자와 짜고 감히 사촌 언니의 신 분과 서류를 위조했다니 엄청난일이야." "계획이 철저했다는데 무슨 말이 필요하겠어요. 고소인이 땅이 급하다는 걸 알고 고소인 을 속여, 범인이 먼저 가짜 임야서류를 보내 주고 고소인이 찾아오자 기도원 여자로 가장하 여 미리 계획한 대로 대표님을 끌어들인 거래요." "교회에서 그렇게 인연을 맺어 대표님과 비슷한 하수인에게 전화를 받게 하고 고소인을 만나게 했다고 하더군. 완전 무결하니 고소인도 당할 수밖에 없었고...." "대표님을 살린 건 고향집에서 데려온 진돗개였대요. 그 백구가 대표님을 다시 한 번 살 렸다고 하더라고요. 개가 죽어 주인을 살리는 걸 보면, 개만도 못한 사람이 있다는 말이 맞 기는 한가봐요. 결국 백구의 일편단심 충정이 하숙집 주인 여자의 마음을 변하게 했대요. 백 구의 눈물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게 해 주었어요." 덩치가 왜소한 간부 회원이 허공에 발길질을 하며 말했다. "백구가 보통 영리한 놈이 아니었지. 그런 말 있잖아, 임란때 왜놈들이 진도 벽파진에서 잡아 둔 호랑이에게 진돗개를 먹이로 주었대. 그런데 다음 날 보니 호랑이는 죽고 진돗개만 피투성이가 되어 살아 있었다는 얘기 말이야. 아마도 대표님네 백구도 그 진돗개의 혈통을 타고나 용맹스러웠나 봐. 누가 그 열쇠가 되었겠나? 정말 창피할 노릇이지 . 백구가 사람보 다 몇 배는 더 낫지 않은가." 뒤안길 지난한 날들이었지만 이제 경주에게 더 이상 두려울 것은 없었다. 앞으로 그에게 남은 것 은 법을 통한 정의 실현뿐이었다. 경주는 늦었지만 선배와 동기들에게 진 빛을 갚기 위해 사법시험에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거의 10개월 만에 구치소 문을 나서게 되었다. 지나 온 계절처럼 야박하게 철문이 턱 하 니 닫혔다. 경주는 일부러 정문으로 가지 않고 쪽문으로 향했다. 시원한 바람이 한 줄기 불 어와 경주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씻어 주었다. 경주는 간절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그는 자신이 지쳤다는 생각이 틀어서 허탈한 웃음을 웃고는 정류장을 향해 발길을 옮겼 다. 몇 걸음 걷지 않아 뒤에서 클랙슨 소리가 들렸고 경주 옆으로 차 한 대가 멈췄다. 운전 석의 창문이 열리고 우영이가 얼굴을 내밀었다. "오는데 정문에서 막히는 바람에 늦었다. 두부도 안 먹고 교도소 문 나서는 놈이 어딨 냐?" 그 때 영은이 아이를 안고 뒷좌석에서 내렸다. 영은이 두부를 건네자 경주는 말없이 웃으 며 그것을 받아 들었다. 비릿한콩 냄새가 났다. 그간 저 회색 담벽 속에서 보낸 시간들을 단 숨에 삼켜 버리려는 듯이 허겁지겁 두부를 먹어 치웠다. "야, 체하겠다. 영은 씨가 너 저 안에서 맨날 굶은 줄로 알겠다. 누가 안 뺏어 먹으니까, 천천히 먹어라 가다가 게워 내면 나만 고하니까." 영은은 경주 손에 묻은 두부 조각들을 꼼꼼히 닦아 주었다. "누군 좋겠다. 영은 씨가 너한테 지극 정성들이는 것 보면서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고 보면 너 , 정말 복 많은 놈이야." "...." 경주는 우영이가 하는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영은을 고생시킨 것에 대해서는 정 말이지 할말이 없었다. 무엇보다 가장 마음에 걸렸던 건 영은이가 아이를 가졌을 때였다. 무 거운 몸으로 시어른들까지 모시느라 힘들었을 걸 생각하면 정말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등에 업힌 아기가 칭얼대자 영은은 아이를 앞으로 돌려 안고는 아기의 벗겨진 노란 꽃모 자를 바로 씌우며 얼굴을 경주에게 내보였다. 아기의 얼굴을 본 경주는 무엇에라도 흘린 바 람처럼 멍하니 아기의 까만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갈색 머리가 보송보송하게 많이 나 있 었다. 아이는 새까만 눈을 서너 번 깜박이고는 다시 제 엄마의 품으로 고개를 묻어 버렸다 영은은 아이의 옷깃을 여며 주고는 아이를 끌어안았다. "지영아, 아빠야. 지영이, 아빠 얼굴 보고 싶다고 엄마 뱃속에서부터 그래 놓고서 숨어 버 리면 어떡해, 응?" "지영아!" 경주는 살짝 무릎을 굽힌 다음 아기에게 눈을 맞추었다. "오빠, 정말 고생 많았어요." "고생은 무슨.... 나 없는 동안 영은이가 고생 많았지. 미안하다." "눈물나서 못보는 영화의 한 장면 같다. 그만해라. 샘나서 어디 보겠냐? 하하하." 쑥스러웠는지 영은이 고개를 숙였다. "눈치 없기는 우리 지금 얼마만인 줄 알면서, 속좁게 그러기냐?" "알았어, 그냥 해 본 소리야. 네가 더 쫀쫀한 거 알아. 임마1?" 세 사람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지영이한테 아빠 얼굴 익히게 하려면 매일 안고 있어야겠구나. 박우영, 너는 집에서 몇 점이냐? 어떻게 해야 100점 아빠가 되는지 가르쳐 줘라." 경주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좀 전에 자신이 나왔던 철문을 바라보았다. 경주는 가방을 왼 쪽 어깨에 메고, 오른팔은 영은에게 두르고 차를 향해 걸었다. 우영이 차에 시동을 걸고 정 문 쪽을 가리키며 경주에게 말했다. "야, 저기 좀 봐. 네가 출감한다는 걸 알고 벌써부터 진치고 있는 거야. 너 만나려던 후배 들도 취재 차량들에 밀려서 아마 꼼짝도 못하고 있을 게다. 할 수 없지. 우리라도 먼저 여길 떠이겠다." 우영은 액셀러레이터를 힘껏 밟아 속도를 내 골목길을 질주해 갔다. 우영의 차를 발견한 취재 차량들이 몰려들었으나 이미 차는 포도를 빠져 나간 후였다. 스치는 가로수가 아침 이슬에 젖어 파리하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면서 지난날을 떠올렸다. '다시 봄볕이 들면 덧난 상처에 물기가 돌고 그 딱딱한 껍질을 뚫고 새 순은 돋아날 것이 다. 나는 겨울 나무다. 새 봄을 기다리는 겨울 나무.' 구치소에서 맞은 어느 겨울 날, 뜰에 앙상하게 서 있던 나무를 바라보며 경주는 이런 생 각에 잠기곤 했었다. 지영이가 영은의 품에서 잠이 들었다. 경주는 아이의 볼에 손을 대 보았다 보드란 촉감과 따듯한 온기가 느껴졌다. 영은이 그던 경주를 바라보며 오랜만에 평온한 얼굴이 되었다. 아 이는 경주의 거친 손길을 느꼈는지 두어 번 뒤척이고는 다시 잠 속으로 빠져 들었다. 마치 여름볕 아래서 오수를 즐기는 새끼 곰처럼 평화롭기만 한 표정이었다. "아이 자는 모습이 참신기하죠? 처음에는 눈, 코, 입이 모두 구분이 안 갔어요. 보름 정도 가 지나니까 얼굴선이며 윤곽이 또렷이 잡히는 게 당신을 쏙 빼 닳은 거 있죠." "영은이를 닳아야 예쁜데 왜 자꾸 나를 닳았다고 하는지 모르겠어. 내가 보기엔 당신을 닮았는데...." 영은은 수줍은지 아무 말도 없이 고개만 떨구었다. 핸들을 돌리면서 우영이 경주에게 말 했다. "부부는 살면서 닳는다고 그러잖아. 그런데 경주 너희는 정말 그선 말이 모자랄 정도인 것 같아." "그러냐? 난 도통 모르겠는데. 영은이가 나랑 닮았다고?" "그렇지 않아도 저도 요즘, 그런 말 여러 번 들었어요. 동네어르신께서 오빠랑 남매 같대 요. 승주 고모보다 제가 오빨 더 닮았다나요." 영은도 놓치지 않고 옆에서 거들었다. "그것 봐요. 두 사람이 똑 닳았다니까요, 영은 씨." 우영이는 시원하게 뚫린 도로를 거침없이 달렸다. 그들의 얘기 소리에 지영이가 동그란눈 을 크게 뜨고 제 엄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 지영이가 배가 고픈가 봐요. 저기 가방 속에 젖병 있을 거예요." "이거 맞아?" 경주는 나비가 그려져 있는 젖병을 영은에게 들어 보였다. "네, 맞아요. 뚜껑 좀 열어 주세요." "근데 우유가 너무 차지 알겠어? 배탈이라도 나면 어떻게 하려구." 아빠가 아이 걱정을 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지금껏 아빠의 자리가 비어 있었고, 힘들 때마다 경주가 많이 생각났지만 그런 마음을 행여나 경주가 눈치챌까 싶어 조심하며 영은은 꾹 참았다. 경주를 기다리면서 멍들었던 가슴이 이제야 조금씩 풀릴 것 같았다. 이젠 경주가 영은의 큰 느티나무가 쇠어 주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다. 그 동안 잡힐 것 같으면서도 잡히지 않았던 경주의 숨결이이제야 조금 느껴지는 것 같았 다. 젖병을 지영의 입에 물렸더니, 지영은 꼭지를 빨며 조용히 잠이 들었다. 가끔씩 잔바람만이 부는 정자나무 아래에는 아까부터 먼 언덕빼기를 계속해서 쳐다보며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김제댁이 목을 길게 빼고 경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맘같이 안 되는 것이 자식 농사라 혔는디, 인자는 되었소." 어머니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언덕빼기를 계속 바라보고 있던 김제 댁이 뭔가를 발견한 듯다급히 남산 댁을 불렀다. "성님, 저것이 우영이 차 아니랑가요?" 어머니와 아버지는 동시에 돌아서며 언덕빼기를 뚫터져라쳐다보았다. "맞어, 저건 우영이 차여, 우리 경주가 이제야 온단께." 어머니 눈에는 어느 새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우영이 차를 세우자 경주가 먼저 내렸다. 영은도 함께 내리려고 하자 어머니는 손을 내저 으며 만류했다. "너는 얼른 들어가그라. 지영이 감기 들라. 원 그 먼 길을 왔다 갔다 혔으니 뱅이라도 안 들란가 몰러. 싸게싸게 들어가서 뜨듯한 아랫목에 뉘여라. 어여." 영은은 차 문을 닫으며 인사를 하고는 우영과 함께 먼저 집으로 들어갔다. 아버지는 경주 의 숙인 고개를 세우며 입을 열었다. "인자 다시는 그란 데를 실수로라도 들어가서는 안 되제. 니는 인자 한 가정을. 책임져야 헐 사람이랑께. 나야 니를 믿지만니도 당해 보고 살어 봐서 알 것 아니랑가. 시상이 그리 호 락호락허는 디가 아니란 걸 말이제." 경주의 눈에서는 어느 새 거둘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거칠게 튼 경주의 손을 잡으며 눈물을 글썽였다. 그 모습을 지켜 보던 아버지가 경주에게 입을 열었다. "니 내일꺼정만 여그서 지내고 당장 서울, 거 신림동인가 하는 데로 가서 고시 공부혀라. 니가 싫다고 혀도 내가 어떡커든지 올려 보낼랑께 가서 말뚝을 박어 놓아야 헐 것이랑께. 니도 인자는 삼십 한가운데 처한 나인께 이 애비 말 새겨 들어라. 내 말이 모자르은 내가 엎드려서라도 널 서울로 올려 보낼란다." 경주는 온몸이 떨려 왔다. 그것은 한기를 느껴서도 감정이 복받쳐서도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 안에 있는 가족의 사랑으로 인한 것이었다. '이경주, 다시 시작이다. 너에게는 오직 정해진 곳을 향해 달려가는 것만이 남아 있을 뿐 이다. 더 이상 값싼 자기 연민에 빠질 시기는 이미 지나 버렸다. 너에게는 갚아야 할 빛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경주는 어머니의 손을 힘껏 잡았다 어머니는 눈물이 말라버린 뻑뻑한 눈가죽을 접으며 경 주를 올려다보았다. 대문을 들어서자 한 메의 개들이 우르르 몰련 나와 그들에게 올라탔다. 어머니는 웃으면 서 손을 내저었다 "작년 가을에 백구가 난 놈들인디 참말로 실혀서 사람들이 자꾸 떼어 간다고 한단께. 아 까워서 못내놓고 시방꺼정 데리고 있제. 인자는 너무 커 부러서 끼니 챙겨 주기도 사납고 한께 내다가 팔아야 쓰겄다. 니 거기 가 있으면서 지영이 낳제, 백구도 새끼 낳제, 참말로 집안이 시끌벅적 했단께." 경주는 강아지 한 마리를 들고 마루에 앉아서 문득 생각에 잠겼다. '내가 없는 동안에도 세상은 조금씩 앞으로, 혹은 옆으로 흔들리면서 나가고 있었구나. 내 가 그 곳에서 나오기 위해 몸부림을 쳤던 것처럼 느끼지 못한 사이에 시간은 강물처럼 흘러 가고 있었어. 이젠 이 바깥의 시간 속에서 맘껏 흘러가야 한다. 누구도 강요하지 못할 나의 길을 위해 시간을 타고 넘어서야 한다.' 강아지가 바둥거리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강아지의 어깻죽지를 잡고 앉았던 경주는 우 영이 어깨를 툭 치자 그제서야 겨우 정신을 차기고 우영을 쳐다보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고 있냐? 할머니께 인사부터 드려야지." 우영이 안방으로 들어서자 경주는 운동화 끈을 풀고 마루로 올라섰다. 강아지는 경주의 눈치를 살피더니 사랑채 쪽으로 잽싸게 뛰어갔다. 법정에서 얼핏 할머니를 뵈었지만 집에서 뵈니 많이 노쇠해지셨다. 그 어디케도 예전의 꼿꼿함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경주가 큰절을 올리자 할머니는 가래 섞인 목소리로 경주에게 가까이 오라고 했다. "니도 인자는 여그서 살으랑께. 이 할매 죽을 때꺼정은." 어렵사리 숨을 몰아쉬며 말을 마 친 할머니는 다시 뒤로 놓인 침상으로 몸을 누이시고는 눈을 감으셨다. 단지 심장 부분이 조금씩이라도 움직이지 않았다면 죽은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할머니의 얼굴엔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깔려있었다. 저녁이 되자 승주가 회사에서 돌아왔다. 경주를 보자마자 승주의 눈은 금세 붉어졌다. "오빠..." "그래, 나도 집에 온 지 얼마 안 돼 썬지도 못했다." 경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승주는 경주 가슴에 안겼다. "짜식, 창피하게 다 큰 애가 울긴 왜 울어." "‥‥." 영은도 승주의 그런 모습을 보며 목이 메어 왔다. 가족 모두 승주와 경주의 모습을 지켜 보며 북받치는 눈물을 참느라 억지로 시선을 딴 곳에 두었다 "오빠, 아픈 데는 없는 거야?" "그럼. 봐라, 건강하잖냐." "참, 지영이 봤어?" "그래. 지영이 보니까 승주 너 어릴 때 생각나더라. 너도 참 예뻤는데." 경주가 승주의 눈물을 닦아 주며 말했다. "내가 주책이지 . 할머니와 부모님 앞에서 뭐하는 거야. 올케도 가만히 있는데... 언니, 이 젠 좋겠수. 이제 떨어지지 말구 꼭 붙어 살어." "아가씨도 참..." 내숭을 떨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승주 말대로 이젠 경주가 든든하게 옆에 있으니까 말이 다. "오빠, 아무 생각 말고 이젠 오빠가 가고 싶었던 길 가. 오빠는 바른 사람들이랑 분명 다 른 데가 있잖아." "그렇게 치켜 세우니까 네 기대에 못 미칠까 봐 벌써부터 겁난다." "그런 뜻 아닌 줄 알면서.... 오빠도, 참." 경주는 승주의 말이 패 어른스럽게 들려 말을 잇지 못했다. 승주는 언제나 경주의 열렬한 후원자였다. 오빠가 잠시 그곳에 있었던 시간은, 오히려 어 려움이 닥쳤을 때 더 단단하게 버틸 수 있는 하나의 힘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분 명 오빠는 큰 일을 할 사람이라고 늘 주문처럼 외우고 다녔다. 사리 판단력이 남다르게 뛰어났던 오빠. 일 처리 능력이 보통이 아니었던 오빠에게 생각 지도 않게 일어났던 일들. 하지만 이제 그 어떤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다 하더라도 이젠 누 구보다도 현명하고 더욱 냉철한 이성으로 오빠는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저녁 식사를 한 후 식구들은 앞으로의 일들에 대해 상의한 후 각자의 방으로 향했다 영은 이가 지영이를 재우러 승주 방으로 갔다 하지만 사실은 오랜만에 만난 우영과 경주에게 자 리를 마련해 주기 위해 일부러 피한 것이다. 그 덕에 둘은 조촐하게나마 그간의 회포를 풀 며 잔을 기울일 수 있었다. "너도 오랜만에 제수 씨 만났는데 이렇게 늦게까지 술 마셔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괜히 눈치가 보이는데...." "너 언제부터 친구 마누라 눈치보기 시작했냐? 잔이나 들어. 영은이가 아까 슬쩍 승주 방에서 지영이랑 같이 잔다고 하더라." "너한테 제일 부러운 게 뭔 줄 아냐?" "새삼스럽게 부러울 게 뭐 있다고 갖다 붙이냐, 붙이길." "영은 씨야." "영은이?" "그래, 제수 씨 말이야." "그런 소리 자꾸 하지 마라. 내 마음이라고 좋을 리 있냐? 영은이에 대해서는 할말이 없 어. 뭐 하나 제대로 해 준 것도 없이 붙들고 있는 것 같아 하여튼 속상하다." "지금이니까 하는 말인데, 너 없을 때 제수 씨 정말 고생 많았다. 지영이 임신했을 때도 몸이 힘들어서 말이 아닐 텐데도 시부모, 시할머니에 시누이까지.... 우리 집사람 같았으면 벌써 친정으로 가지 않았을까 싶거든. 좋은 말 다 갖다 붙여도 모자라지 않을 거야. 승주한 테서 전해 들었는데 지영이 날 때 난산이었다고 하더라. 제수 씨 대단한 여자야. 이제 네가 잘해. 하긴 내가 말 안 해도 잘 하겠지만 말이야." "그 곳에 있으면서 제일 견디기 힘들었던 게 영은이가 임신했다는 소식이었어. 지영이 가 졌다는 얘기 들은 후로는 아무생각도 하기 싫어지더라.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있어야지. 아이 낳을 때 그렇게까지 고생했다는 거 지금 너한테 처음 듣는 거야. 승주나 어머니나 얘 기를 안 해 주셨으니까. 하기야 얘기 들었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도 있었겠지만, 이제 네 말 대로 저 사람한테 잘 하는 수밖에 없지 뭐." "알면 됐다. 이제부터라도 잘 해 줘라." "영은이가 나한테 부담 주지 않으려고 워낙 얘기를 안 하니까 속이 어떤지를 통 알 수가 있어야지. 속이 깊은 사람이야. 내가 거기에 못 미처 안타깝지. 영은이 고생만 시키고, 몹쓸 짓만 골라 했다." 경주는 속풀이라도 하려는지 소주를 연거푸 마셨다. "고맙다, 너도 바쁜 일 많을 텐데. 내가 변변치 못 해서 못 갈 곳을 두 번씩이나 갔다 오 니까 세상이 좀 달라 보인다. 어쨌든 내 속이 지금 말이 아니다. 막상 나오니까 혼란스럽기 도 하고 뭐부터 해야 할지도 모르겠구. 천천히 정리해 나가야지. 한 잔 하자." "그래. 모두 잘 될 거야. 그럼, 누구 친군데...." 경주는 술병을 들어 우영의 잔을 채웠다. 얼마만큼의 술잔을비운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 도 없이 바로 쓰러져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우영은 아침을 먹고 서울로 떠났다. 경주는 반 나절 동안은 잠든 지영이를 보며 지냈다. 지영이가 아빠의 마음을 알아채기라 도 했는지 말똥말똥한 눈으로 경주를 바라보았다. 가끔씩 동네 어으신들이 경주를 보러 오 셨고 경주도 그렇게 신경 써 주시는 것에 대해 정중히 인사를 드린 것 외에는 별다른 일 없 이 보냈다. 영은은 하루 종일 경주가 서울에 갈 준비를 하느라 분주했다. '바보 같은 사람.신흔도 제대로 지내지 못하고.... 억센 여자도 못 되는데 매번 내 앞에서 강해져야만 했어. 영은아, 정말이지 할말이 없다. 싸지만 이젠 내가 보여 줄 차례야. 그래, 내가 보여 줄게.' 경주는 영은에게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누구보다도 영은과 지영을 두고 간다는 것이 마음 에 걸려 발길이 쉽게 떨어질 것같지 않았지만, 앞으로 더 큰 행복을 위해 당연한 일이었으 니 어쩔 수 없었다. 영은은 제 아빠도 알아보지 못하고 우는 지영을 보면서 뭔지모르게 속상했다. 그리고 우 는 지영이를 어르고 달래느라 진땀을 빼는 경주에게서 눈길을떼지 않았다. 경주는 영은의 가방 꾸리는 손을 잡았다. 영은의 가슴은 잔잔하게 뛰고 있었다. "영은아, 조금만 더 참자. 얼마 있지 않으면 모든 일이 잘 될 거야. 우리 그 때까지만 참 고 견뎌 보자. 너한테 할 수 있는 말은 이 말밖엔 없다." "알았어요. 조급하게 마음먹지 말아요. 식사는 때 맞추어 잘 챙겨 먹고 전화 자주 못 하더 라도 서운해하지 말구요." "말 안 해도 영은이 네 맘 다 알아." 경주는 영은의 손을 잡아 가슴으로 끌어안았다. 경주가 서울로 떠나는 날 아침 지영이는 신열이 있는지 눈을 뜨면서부터 보챘다 그런 아 이를 어르면서 영은은 조심스럽게 어른들 눈치를 보며 마루턱에서 경주를 보내야만 했다. "여그 걱정은 혀지 말고, 고시 공부만 전념허고 있어야 한단께. 전화비도 비싼께 자주 혀 지 말고 알았제?" 어머니는 찬거리를 챙기며 말했다. "오빠, 건강해야 뭐든 잘 할 수 있는 거 알지? 혼자 있다고대충 살면 안 돼. 오타는 임자 있는 몸이라구. 알았지?" 경주는 지영을 업고 있는 영은을 보았다. '영은아, 갈게. 힘들어하지 말고, 아프지 말고.... 지영이 너처럼 예쁘게 잘 키우고 있어.' 경주는 돌아서며 입술을 깨물었다. "경주야, 니는 큰 인물이 될 거여 . 어디 가서 기죽지 말고 식구들 생각혀서 열심히 혀야 헌다. 알아 부렀냐? 우리 장한 큰 손주. 경주 니가 잘 돼야 우리 집안이 다시 일어서지 않겄 냐. 지영이도 지 아빠 닳아서 잘 할 것이고...." "할머니, 걱정 마세요. 제가 누구예요. 우리 멋쟁이 할머니 손자잖아요. 빨리 마치고 돌아 올게요." "가자. 갈 길이 먼 데 사내가 너무 오래 지체하면 못쓴다." 아버지가 헛기침을 하며 대문 을 먼저 나가셨다. 경주는 마을을 떠나 서울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터미널로 향했다. 승진이가 터미널까 지 태워다 준다고 했으나 아버지가 만류하시며 직접 배웅을 해 주셨다.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경주를 차로 올려 보내고는 두어 번 손을 흔들었을 뿐이셨다. 차창에 기댄 경주는 감방에서의 일들을 떠올렸다. 그가 감금된 지 한 달 남짓되었을 때였 다. 감방 안에서는 영은의 편지로 하루가 시작되고 끝이 났다. 편지를 몇 번이고 다시 읽는 것이 그 곳에서의 유일한 낙이었다. 수감자들은 저마다 취미가 한 가지씩 있었다. 어디서 들 여왔는지 종일 화투로 점을 쳐 보는 사람, 벽에 그려 놓은 달력을 시간이 지나기가 무섭게 들여다보는 사람, 하루같이 주역 같은 책에 파묻혀 혼자 중얼거리는 노인 등 가지각색의 사 람들이 있었다. 그 중 들어온 지 얼마 단 된 서너 살 아래의 청년은 그저 작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을 따라 계속 자리를 옮겨다녔다. 영은에게서 모처럼 만에 편지가 왔고 청년에게도 한 통의 편지가 왔다. 감방 사람들은 편 지가 올 때마다 궁금하다며 내용을 물어 보고는 했는데 편지를 받은 청년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 나왔고 경주뿐만 아니라 감방 안의 모든 사람의 눈이 그에게로 쏠렸다. 편지를 든 청 년의 손이 바르르 떨렸고, 신음은 분노가 뒤엉킨 울음으로 변해 버렸다. 매일같이 주역을 들고 있던 노인이 그에게 말했다. "얼굴에 풍기는 분위기를 보니까 분명 여자 문제 같은데, 헤어지제? 쯧쯧. 여기 처음 들어 오는 사람들 대부분이 쥐는 일인데 그리 속상해할 것까진 없지. 잊을 건 잊어야지. 미련에서 못 벗어나면 견디기 힘들어. 검사 양반들 하나같이 하는 소리 못 들었어? 그렇게 후회하려 면 왜 죄지었냐고 하잖아." 청년은 편지를 움켜쥐고 노인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노인의 멱살을 바짝 죄며 죽일 것만 같았다. 사람들은 그를 말리려고 하기는커녕 오랜만에 스포츠 경기라도 보는 것떠럼 휘파람 과 환호성을 지르면서 그들 곁으로 모여들었다. 경주는 하는 수 없이 구석에서 일어나 노인의 목을 조르고있는 청년의 손목을 잡았다. 그 가 경주를 째려 보자 경주는 안된다는 눈빛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노인의 목을 조 르고 있던 청년은 손을 놓았고, 노인은 왼손으로 이마의 식은땀을 닦으며 꼬리 내린 개마냥 조용히 구석으로 가서 누웠다. 그러자 감방 안사람들은 시시하다는 야유를 보내며 다시 저 마다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아직까지 경주는 청년의 손목을 놓지 않고 있었다. 청년의 눈 에 비친 눈물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눈물인지 콧물인지 모를 것이 그의 수의를 적시고 있었다. 그는 코를 몇 번이나 훌쩍이고 난 뒤 그의 손목에서 미꾸라지처럼 빠져 나가 구석에 가서 머리를 파묻어 버렸다. 그는 눈만 감고 있을 뿐 자는 것 같지 않았다. 아직도 진정되지 않았는지 가슴께가 상당 히 들썩거렸다. 한참을 그렇게 누워 있던 청년이 경주에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경주 옆에 나 란히 앉아 무슨 말을 하려는지 경주의 옆 모습을 힐끗 바라보았다. 경주와 눈이 마주친 그 는 하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저, 법을 공부했다고 하셨죠?" 경주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경주에게로 바짝 붙어 앉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사실 그렇 게 소곤거린다고 해 봐야 감방 안에서 비밀로 남겨지는 법은 없었다. "그럼 뭐 하나 물어 봐도 괜찮을까요?" 이번에는 경주가 입을 열었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도와 드리죠." "식은 올리지 않았어도 혼인 신고는 했습니다. 그런데 여자가 헤어지자고 하는데 내가 서 류에 도장 찍기 전까지는 이혼이 안 되는 건가 궁금해서‥‥‥." 경주는 좀 전의 노인의 말이 맞았음을 확인하면서 청년에게 말했다. "법정까지 가지 않는다면이야 이혼이 될 수가 없죠. 부인께서 이혼 소송을 걸지 않는 한 은 아직..." 경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는 벽 쪽으로 가더니 주먹으로 벽을 치기 시작했다. 껍 질이 벗겨졌는지 벽에 빨간 혈흔이 묻어 나왔다. 사람들은 다시 싸움이라도 난 줄 알고 모여들었다가 별일이 아님을 알고는 제자리로 돌아 갔다. 이번에는 경주도 그를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단지 옆에서 지켜 볼 수밖에 달리 방법 이 없었던 것이다. 몇 번인가 더 벽을 친 후에야 그는 돌아누웠다. 앞가슴 새로 쉼 없이 한 숨을 쉬었다. 꼭 호흡기 질환 환자처럼 아직도 정신이 들지 않은 것 같았다. 문득 그가 입을 열었다. "들어오기 전에 그 사람이 아들을 낳았어요. 저를 참 많이 닳았는데... ." 그는 허탈해차는 몸짓으로 다 벗겨진 손등을 매만지며 바보처럼 웃고는, 자신의 자리로 가서 누웠다. 이번에는 거의 미동도 없었다. 그렇게 그가 꼼짝도 하지 않자 오히려 경주가 답답해졌다. 경주와 비슷한 나이여서 청년이 처한 상황에 동정이 갔고 자신의 위치가 불안 해진 것은 그 곳에 들어가고 그 날이 처음이었다. 그가 법정 공방을 처음으로 생각해 본 것은 그 때였다. '이대로 여기서 몇 년을 더 보내게 되면 나도 저 사람처럼 벽을 치며 울 날이 있을지도 모르지...' 그리고 사흘 후 청년에게 누군가가 면회를 왔다. 한참만에 돌아온 청년은 매섭지만 몽롱 한 눈빛으로 방으로 돌아와 구석자리에 주저앉으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서류에 도장 찍으라고 집사람 오빠가 왔다 갔어요. 물론 애도 안 데리고 왔고 집사람도 안 왔죠. 그냥 있는 힘껏 지장을 찍어 줬죠, 후후후." 마냥 허탈하게 웃고 있는 그를 보며 경주는 더 이상 그를 보고 싶지도 넋두리를 들어 주 고 싶지도 않았다. 한 20년은 늙어버린 듯한 그가 괴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날부터 그는 허공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30여 분 간의 운동 시간도 없었다면 그 는 아마 엉덩이 한 쪽이 벌써 짓무러서 종기가 생겼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에겐 삶의 의 지가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경주는 그의 죄목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대부분 감방 안에서는 본인이 스스로 말하기 전까지는 들어오게 된 이유를 묻지 않는 것이 상례였다. 그래서 경수도 묻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부터 그의 눈에 새록새록 생기가 돌면서 더 이상 허공을 주시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경주 곁으로 다가와 앉더니 말했다. "저 , 이 형은 무슨 일로 여기로 들어오셨소?" "여기 죄가 없어서 들어온 사람이 있겠소만‥‥. 글쎄요, 내가 왜 여기에 이러고 앉아 있 는지 모르겠소. 혹시 여기 들어오기 전에 텔레비전에서 '정순은 사건'이라고 들어본 적 있 소? 거기에 말려들어서 이런 신세가 됐다오." 청년은 그제야 알겠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사람을 치고 여기로 왔어요. 그 때 음주 운전만 안 했더라면 이렇게까진 형이 무거 워지지 않았을 텐데. 지금 생각해도 그가 꼭 죽으려고 작정한 사람처럼 내 차로 뛰어들었는 데 누가 술취한 사람 말을 듣겠어요. 일 끝나고 사람들하고 술마시고 집으로 가던 길에 그 랬는데 누가 여기까지 올 거라고 생각이나 했겠냐구요?" 그는 씁쓸하게 웃으며 경주를 바라보았다. 문득 경주는 그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 에게 물어 보았다. "그럼 변호사라도 선임해터 해결해 보지 그랬어요?" 그는 어 림도 없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어디 그만한 돈이 있어야죠. 그리고 처음부터 별의별 협박을 다 하니 그런 건 생각도 못 했어요. 못 배우고 가난하면 당하는 수밖에 더 있나요?" 청년은 모든 것을 포기한 듯이 말하고 있었다. '이렇게 법의 혜택을 누리지 못한 사람이 이 세상엔 많다. 법은, 있는 차나 가진 자의 것 만이 아닌 만인의 것이다.' 경주는 이 때부터 사법 시험을 볼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마음 한켠으로 변함 없이 자신을 염려해 주고 사랑하는 영은에 대한 고마움과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해야 할 일이었 다. 경주는 힘없이 벽에 기대 앉은 청년을 돌아보았다. 그는 체념한 듯 이젠 한숨조차도 내쉬 지 않고 있었다. 한꺼번에 가정과 모든 것을 송두리째 빼앗겨 버린 그를 보면서 경주는 스 스로가 자신은 나락에서 헤매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기다림 고시촌의 봄은 유난히 텁텁하게 느껴졌다. 저녁이 되면 고시원 현관에는 식사를 마친 고 시생들이 머리를 식힐 겸해서 삼삼오오로 짝을 지어 담배를 피운다 경주도 그 사이에 끼여 담배에 불을 붙이지도 않은 채 필터를 자근자근 씹으며 손에 들린 횐 봉투를 뜯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희색이 감돌았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영은에게서 온 편지였다. 서울로 올라온 후로 경주는 다시 군에 입 대한 기분이 들었다 매일같이 영은에게서 오는 편지는 지친 그의 몸과 마음에 충분한 활력 소가 되었다. 겉봉투에 빨간 펜으로 '사진 재중'이라고 정성스럽게 씌어있었다. 살짝 찢은 봉투 귀퉁이 사이로 검지를 넣어, 봉투를 반듯이 잘랐다. 제법 많이 자란 지영의 독사진과 지영을 안고 찍은 영은의 사진이었다. 마을 정자나무 너 머에 있는 언덕빼기 길가에서 찍은 것이었다. 샛노란 개나리 사이에서 천진스럽게 웃고 있 는 지영과 영은을 번갈아 보며 경주는 미소를 지었다. 개나리가 흐드러지게 핀 그 길 위를 경주 역시 수없이 걸어다녔었다. 경주는 모르고 지나칠 뻔했던 향긋한 봄 내음을 영은의 세심한 배려로 남보다 먼저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마치 영은과 지영이랑 그 길을 걷고 있는 환상에 빠져 들었다. 손에 잡실 듯한 바람 소리와 이마로 내려앉은 봄 햇살을 그도 전처럼 평화롭게 마중 나가고 싶었다. 오빠에게 개나리가 곱게 피었어요. 사진 보셨어요? 공부하느라 따로 시간 내어 보지 못할 것 같아 지영이와 함께 찍은 사진을 보냈는데 어땠는지 모르겠네요. 우리 지영이 참 예쁘죠? 저는 이 곳에서 가족들과 즐겁게 보내고 있어요. 할머니께서도 건강이 한결 좋아지셔서 틈만 나 면 지영이 데리고 집 앞으로 산보를 가세요. 어제는 김제 댁 아주머니와 쑥을 뜯어 떡을 했어요. 어렸을 때부터 쭉 혼자 자라서 제대 로 할 줄 아는 게 없어도 어머니께서 잘 가르쳐 주시고 귀여워해 주시니 고마울 뿐이에요. 여기서 이것 저것 배우면서 지영이만 보고 살아교. 지영이를 보고 있으면 당신을 보고 있는 것 같거든요. 지영이가 얼마나 많이 예뻐졌는지 아세요? 갈수록 오빠얼굴을 닳는 것 같아요. 아이가 순 한 편이라, 말썸도 피우지 않고 예쁜 짓만 골라 해요. 요즘 유행성 감기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이 많다는데 오빠는 괜찮은지 모르겠어요. 혼자 타지에 있으면서 몸이라도 아프면 얼마나 서러운지 제가 잘 알아요. 그러니 건강 잘 챙기세 요. 제가 대학에 처음 들어가던 해 3밀이었나 봐요. 학교기숙사에서 혼자 밤새 앓은 적이 있 었는데 돌아가신 엄마생각이 어지나 나던지 한참을 울었답니다. 그저께 찍은 사진을 하루라도 빨리 오빠에게 보여 주고싶어 오늘 읍내에서 찾아왔어요. 오후에 기영이를 재우다가 저도 깜박 잠이 들었는데 누렁이가 짖는 소리에 깼어요. 그런데 갑자기 오빠 생각이 많이 나더라구요. 날씨가 이렇게 사람을 늘어지게 하는데, 그 답답한 고 시원에서 머리를 싸매고 있을 오빠를 생각하니 너무 보고 싶어지더군요. 가끔씩 오빠가 보고 싶을 때는 당장에라도 서울에 올라가고 싶지만 꾹 참고 있어요. 기다린 만큼 아름다운 결실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저를 붙들어요. 오빠도 저나 우리 지영이 그리고 식구들이 많이 보고 싶어도 꾹 참고 있을 거란 생각을 하고 있답니다. 지영이가 배가 고픈 가 봐요. 그럼, 오늘은 이만 쓰고 다음에 또 편지할게요. 건강 조심하시구요. 오빠를 사랑하는 영은 다시 한 번 흐뭇한 표정으로 사진을 바라보던 경주는 사진과 편지를 가지런히 봉투에 넣 었다. 경주는 봉투를 셔츠 주머니에 넣으며 물고 있던 담배에 불을 붙였다. 한참 동안 물고 있었던 탓인지 불이 쉽사리 붙지 않았다. 그는 바지 주머니를 뒤져 담뱃갑을 꺼냈다. 한 개 비 남아 있는 것이 대가 으스러져 피울 수가 없었다. 지난 일요일에 샀던 참배가 벌써 다 떨어졌다 경주는 슬리퍼를 끌며 두 블록 지나 있는 구멍 가게로 향했다. 주인도 방금 식사를 마쳤는지 손에는 이쑤시개가 들려 있었다. 주인은 낯익은 경주를 보며 반가워했다. "저, 담배 한 갑 주세요." "이번에는 담배가 빨리 떨어졌구만. 하기야 봄 햇볕이 사람을 좀 졸리게 해야지." 주인은 나른한 봄 날씨 타령을 은근히 늘어놓았다. 천장에 거의 닿은 선반에서 담배를 내 린 주인은 경주에게 담배를 건네 주기 전에 냉장고 문을 열고 우유를 하나 꺼냈다. "좀 앉았다 가시지 그래요. 방금 저녁을 들고 온 것 같은데‥‥‥‥ 이럴 때 잠시 쉬지 못하면 언제 또 쉬겠어요?" 가게 주인이 우유를 건네며 말했다. 사양하는 경주에게 극구 권 하는 주인의 성의에 경주는 못 이기는 척하고 우유를 받아마셨다. "이 선생이 올해 몇이라고 했더라?" 경주는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서른하고도 셋입니다." 주인은 담배를 피워 물며 말했다. "한참 때군요. 내가 서울로 올라왔을 때가 서른 정도였으니까. 가만히 앉아 논 것도 아닌 데‥‥‥. 시간 가는 것 보면 무섭다니까요." "가게 이름이 '남도 슈퍼' 인데 혹시 고향이 어디세요? 전부터 물어 본다는 게 지금에야 여쭤 보네요." 주인은 한 번 크게 담배를 빨아들인 후 말했다. "고향이 남쪽이라서 '남도 슈퍼'라 했죠. 그런데 이제는 서울이 고향이나 다름없이 되어 버렸어요. 서울 올라와서 먹고사는 데 쫓기다 보니 고향도 저만치 멀어집디다." 주인도 목이 탔는지 돌라 하나를 꺼내 마셨다. "저는 고향이 전남 진도입니다. 그래서 혹시 고향분이 아니신가 해서 물었습니다." 주인은 반가움보다는 놀랍다는 눈빛으로 경주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이 선생이 진도분이라구요? 나하고 바로 옆 동네 사람이었네요. 저는 해남이 고향입니다. 고향 선산을 찾아가 본 지가 벌써 1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명절 때가 되면 고향이 그립죠." 경주는 슈퍼 주인과 나이 터울이 열댓 살은 제법 나 보였음에도 어릴 적 친구라도 만난 듯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주인은 다시 경주에게 물었다. "그럼 나이도 나이니까 처자식도 있을 텐데‥‥‥‥." "두 살박이 딸 아이와 애 엄마가 고향집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주인은 경주의 십정이 착잡하리라 넘겨 짚었는지 담배 한 대를 권했다. "이 선생도 부담이 이만저만이 아니겠군요 커 가는 자식들보면 다른 일을 해 보고 싶어도 용기가 안 나죠. 그러다가 나도 이렇게 구멍 가게 주인으로 눌러앉았습니다." 경주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슬쩍 시계를 들여다봤다 7시 5분 전이었다. 주인은 눈치를 챘 는지 재촉하듯이 말했다. "아이고,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요. 이거 바쁘신 분을 제가 너무 붙들었습니다. 오랜만 에 흙 냄새 나는 고향 사람 만나서 이야기다운 이야기를 해 본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종종 머리 식힐 겸해서 자주 들러 주세요." 경주는 주인에게 인사를 하고 가게를 나섰다. 어느 새 골목마다 가로등이 켜져 있었다. 가 로등 밑으로 걸어가는 경주의 그림자가 떨리는 불빛 때문인지 가늘게 흔들렸다. '오늘은 영은이에게 답장을 써야겠다.' 고시원 문을 들어서며 다시 한 번 사진을 꺼내 보았다. 액자라도 있었으면 싶지만 이렇게 생각날 때마다 한 번씩 꺼내 보는 것이 더 깊은 애정이 생길 듯싶어 근처 문방구에 들러 보 려던 마음을 고쳐 먹고 고시원으로 들어갔다. 좀 전에 보일러를 올렸는지 방바닥이 뜨듯했다. 경주는 책상 위에서 노트와 펜을 들고 아 랫목으로 내려앉았다 그는 언제나 처럼 주소를 먼저 쓴 후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쓰는 편지라 너무 어색했다. 사실 그는 영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몇 번 해 보 지 못했다. 어렵게 쓴 첫 장을 경주는 찢어 버렸다. 몇 번을 고친 후에야 마음에 드는 인사 말을 쓸 수 있었다. 영은에게 편지 잘 받았다는 말 전하고 싶어 이렇게 펜을 들었소. 사실 이제껏 당신이 보내 주는 편 지에 반가운 마음이 앞섰으면서도 쉽사리 답장이 써지지 않았소. 당신이 보내 주는 이 펀지들이 내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당신은 잘 모를 것이오. 가끔 씩 캐가 군대에 다시 온 기분이 드는 건 아마도 쉬는 시간에 당신 편지를 읽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기 때문일 것이오. 우리 지영이는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데, 너무 오래 떨어져있어 아빠 얼굴을 잊어버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소, 조금 전에 저녁을 먹고 담배 사러 슈퍼에 갔다가 주인 어른과 잠깐 얘 기를 했는데, 내가 당신에게 참 못할 짓을 많이 한다는 생각이 들었소. 그래도 아무 군소리 없이 잘 지내고있는 당신에게 나는 더 바랄 것이 없다오. 단지 이제 내가 당신을 위해 무얼 하느냐 하는 과제만 남은 것 같소. 처음 여기에 왔을 때는 당신하고 지영이 얼굴만 떠올라 당장이라도 짐을 챙겨 집으로 내 려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었소. 하지만 그런 미약한 의지로는 이 세상에서 어떤 일도 해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소. 애써 참고 견디는 당신에 대한 예의도 아니고, 뒷전에서 아들을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지켜 봐 주시는 부모님에 대한 도리도 아닐 듯싶어 그런 마음은 꾹 눌러 버렸소. 이젠 나 자신과의 싸움에 자신이 생겼소. 항상 나를 기다리고 나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세상의 행복을 다 얻은 것 같소. 당신이 보내 준 사진, 언제나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려고 하오. 너무 탈아 볼 수 없게 되면 내 다시 부탁하리다. 앞으로도 종종 편지하려고 노력하겠소. 부모님과 주위 어르신들께 안부 전해 주시오. 사랑하오. 당신을 사랑하는 경주 편지를 다 쓴 경주는 봉투 입구를 봉한 다음 방을 나섰다. 그는 손에 든 편지가 귀중한 서류라도 되는 것처럼 꼭 쥐고 문구 점 앞에 있는 우체통으로 향했다. 그는 편지를 우체통 에 넣고 한참 동안 우체통을 바라보았다. 문방구 옆에 있는 공중 전화를 보자 시골집에 전화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지만 이틀 전에 전화를 했었으므로 생각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경주는 고시원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는 가로등을 벌써 다섯 개나 지나치고 있었다. 문방 구에서 고시원까지는 가로등을 두개만 지나면 되었다. 이상하게도 그는 걸으면서도 가로등 수를 버릇처럼 세고 다녔다. 하지만 더 알 수 없는 것은 고시원까지는 단 두 개만 지나치면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세 개나 더 지나쳐 왔다는 것이다. 경주는 가로등 밑에 우두커니 서 버렸다. 영은의 웃는 얼굴이 나트륨등 불빛 아래로 원을 그리며 퍼져 나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아래 깔리는 빛은 딸아이 지영의 재잘거림처럼 느껴졌다. 경주는 자기 자신을 이 겨 낸다는 것이 이렇게도 힘들 줄 몰랐다. 그는 지나쳐 온 길을 다시 되돌아가야만 했다. 8시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고시촌은 쥐죽은 듯이 조용했다. 머리를 식히기 위해 소줏집을 찾으려고 했지만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방향을 튼 경주는 걸음을 재촉해 문방구로 다시 들 어갔다. "사진 넣을 만한 액자 하나 주세요. 아니 두 개요." 문방구 주인이 어떤 형을 원하느냐고 물었다. "그냥 네모난 거면 됩니다." 주인은 포장된 액자 두 개를 건네 주었다. 경주는 포장을 뜯어보지도 않고 문방구를 나왔 다 슬리퍼 끄는 소리가 골목에 울렸다. 걸음을 재촉한 탓인지 발바닥이 훗훗했다. 경주는 방 에 들어서자마자 액자를 조립한 다음 그것에 사진을 끼웠다. 책상 좌우로 액자를 세우며 경 주는 말없이 웃었다. '이경주, 너는 행복한 놈이다.' 그리고 경주는 심호흡을 한 다음 옆으로 밀쳐 두었던 법전을 다시 펴 들었다. 고시촌 사람들과도 이제 제법 안면을 익혔다. 가끔씩 그들과 무리를 지어 특별 메뉴를 먹 겠다고 몇몇 식당을 찾는 여유도 부리게 되었다. 경주는 동네의 터줏대감들을 만나서 신세 타령도 듣고, 때론 짬을 내어 대폿잔도 기울이면서 고시촌의 지리한 날들과 싸워 나갔다. 장마가 끝나고 한풀 꺾일 줄 알았던 더위는 결코 꺾일 기세를 보이지 않았다. 찌는 듯한 더위 앞에서는 장사가 없다고 했지만 장사 행세라도 하지 않으면 배겨 낼 수 없는 곳이었 다. 경주는 며칠 전부터 생활 패턴을 바꿨다. 오전 11시 무렵부터 오후 4시까지를 취침 시간 으로 정하고 밤과 새벽에 공부를 하려고 적응 기간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경주만 하는 특 별한 방법이 아니라 경주말고도 고시원에서는 대여섯 명이 벌써 몇 주 전부터 그렇게 지내 고 있었다. 그 덕에 몇몇의 야식 팀이 꾸려졌다 모두7명이 한 팀을 이뤘는데 가지각색의 사 람들이다 있었다. 그 중에는 한참 잘 나갔던 사십대의 의사도 끼여있었다. 주로 야식을 먹는 시간은 자정에서 새벽 2시 사이였으며 , 보쌈과 만두, 해장국을 먹었다. 때로는 거기에 소주 를 한 병씩 곁들이기도 했다 소주를 마시는 날은 술기운 덕에 그 동안 하지 못했던 이야기 를 슬슬 풀며 날이 새는 줄도 모르고 밤새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어느 날 저녁 무렵이 되어 잠에서 깨어난 경주는 사람들과 해장국집이라도 가려고 방을 막 나서던 창이었다. 그 때 옆 방에서 공부하고 있는 김 형이 방문을 열며 들어섰다 "어디 나가시려던 참인가 본데 제가 발목을 붙들었네요." "저녁을 먹어야 할 것 같아 해 장국이라도 먹으러 나가려던 참입니다. 안 드셨으면 같이 가시죠." 김 형은 손에 든 대접을 경주에게 내밀었다. "제가 하초 술을 좋아해서 집사람이 꿀 한 통 보냈는데, 여기와서는 통 술 생각이 없어 마시지 않았거든요. 이 형이 오늘따라 늦는 것 같아 한 대접 타 가지고 왔어요." 경주는 미안해 어쩔 줄을 몰라했다. "아이고 이런 것까지 신경 쓰시고‥‥‥‥." 경주는 목이 타던 차에 잘 됐다 싶어 얼른 받아서 단숨에 들이켰다. 그러나 마시면서도 그렇게까지 신경 써 주는 김 형이 내심 고마웠다. 타지에서 남에게 신경 써 준다는 것이 그 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경주는 김 형에게 대접을 다시 건넸다. "이거 고맙습니다 혹시 저녁 안 드셨으면 같이하시죠." "하긴 저도 밥 생각이 없어서 지 금까지 저녁을먹지 않았습니다. 그럼 우리 저녁이나 먹으면서 얘기나 하죠." 경주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두 사람은 근처에 잘 아는 해장국집으로 갔다. 주인 여자 가 경주를 보며 한 마디했다, "좀 전에 고 선생님하고는 벌써 다녀가셨는데 오늘은 이 선 생님이 제일 늦으셨네요." "예, 제가 늦게까지 자는 바람에 그랬습니다." 경주가 국밥 두 그릇을 시켰다. "여름이 되니까 참 견디기 힘들군요. 자꾸 집 생각이 나서 술이라도 마셔 볼까 했는데 예 전 같지가 않아요. 그래도 이 형은 잘 견디는 것 같아 부럽습니다." 경주는 김 형의 말을 듣고 부끄러웠다. 오히려 경주가 김 형을 보면서 열심히 한다고 하 려 했는데 재빠르게 김 형이 먼저 말을 꺼낸 것이다. "별 말씀을요. 저보다야 김 형이 한 수 위죠." 뚝배기에 지글지글 끓는 국밥이 가득 담겨져 나왔다. 두 사람은 숟가락을 들었다. 국밥을 먹고 나니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히고 속이 더워 왔다. 물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으면서 김 형이 먼저 말을 꺼냈다. "저는 초등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처자가 딸린 놈이 이 나이에 고시촌으로 들 어와서 공부한답시고 앉아 있습니다만, 요즘 들어 부쩍 집 걱정 대문에 공부가 잘 되지 않 습니다. 아내와는 학교에서 만났는데, 혼자서 애 둘을 데리고 고생이 많죠. 학교 일 하랴, 집 안일 하랴." 경주가 그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듣자하니 이 형도 처자가 있다던데 이 생각 저 생각 많으시겠어요. 사실 이 고시촌에 들 어온 사람 대부분이 처자가 딸린 사람들인데, 따지고 보면 이 동네에서는 별날 것도 없죠. 궁상 떠는 것 같기도 하고‥‥‥‥. 제가 작년 가을에 여기로 왔으니까 벌써 1년이 다되어 가는군요." 경주는 마지막 남은 국물까지 마신 뒤, 물수건으로 입가를 닦았다. "저도 애 아빠입니다 전에는 고작 대학원에서 공부하다가온 사람이고 ‥‥." 경주는 그런 얘기를 하는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져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신세타령은 하 지 않기로 했다. 두 사람 사이에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경주가 담배를 꺼내 김 형에게 권했다. "여기 들어오면서부터 담배를 끊었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답답할 때 가끔씩 생각나기도 하지만 그것마저 지키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못할 것 같아 애써 참고 있는 중입니다." "저는 담배가 없었으면 어떻게 이 곳 생활을 견딜까 싶은 생각이 드는데 김 형은 저와 다르군요." 김 형이 경주를 쳐다보며 빙긋이 웃었다. "그래도 이 형은 어딘지 모르게 당당한 면이 있어요. 저처럼 생활에 찌들지는 않은 것 같 으니까요. 생각도 긍정적이고 늘 밝은 편이죠." "이 말은 왜 오래 전에 들은 얘긴데. 누가 이런 말을 해 주더군요. 목표를 정했을 매는 열 심히 하기보다는 잘 해야 한다고." 주인 여자가 누룽지를 가져왔다. "바삭바삭해서 맛있어요. 아침에 한 것은 다 떨어졌는데 방금 전에 한 솥 긁으니까 또 생 겼어요. 천천히 얘기하다 가세요. 공부도 중요하지만 여름이니 몸 생각도 하셔야죠," 주인 여자는 눈웃음을 흘리며 부엌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은 보시기에 담겨진 누룽지를 먹으며 묵혀 두었던 시금털털한 속 얘기들을 주고받았다. 얘기를 하다보니 1시간이 넘게 식 당에 앉아 있었다. 경주가 계산을 하고 가게를 나서려는데 주인 여자가 경주를 불렀다. "조금 담았어요. 공부하시다가 출출할 때 드세요." 봉지 안에는 먹음직스런 누룽지가 한 움큼 담겨 있었다. 경주는 갑자기 시골집에 온 듯한 착각이 들었다. 사실 경주는 고향 마을 누나뻘쯤 되는 여주인의 인심에 어쩌면 고향집의 정 과도 같았다. 김 형과 고시원 복도에서 헤어지고 난 경주는 샤워를 한 다음 방으로 들어왔다. 장마가 끝나고 더위 못지않게 모기가 극성을 부렸다. 경주는 수건을 의자에 걸고 서랍장 위에서 모 기향을 꺼내 불을 붙였다 그것을 문간에 놓아 두고 입었던 셔츠를 벗은 다음 메리야스 바람 으로 책상에 앉았다 며칠 전 중고 가전 상가에서 사 온 소형 선풍기를 다리 밑으로 바짝 갖다 놓았다. 비록 낮의 열기 때문에 아직은 더운 바람이 일었지만 없는 것보다는 몇 배 나았다. 9시 무렵이 되면서 복도가 사람들의 발소리로 시끄러웠다. 1층 휴게실로 뉴스를 보러 가 는 사람들이었다. 1시간 정도 공부를 한 경주도 모기향을 방바닥에 내려놓고 방을 나섰다. 열 명이 조금 넘는 사람들이 휴게실에 한 자리씩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문민 정부라는 슬로건을 내건 정치계의 개혁 바람으로 한창 언론계와 정치계가 떠들썩했다. 그래서 요즘 뉴스는 볼거리가 한층 나아졌다. 경주는 커피를 뽑아 들고는 뒤쪽에 앉았다. 어제와 별다른 소식은 없었다. 단지 새로 부임한 대통령에 대한 찬사와 새로운 정치 모색 을 위한 구상들로 화면을 가득 메웠다. 30여 분 앉아 있던 경주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담배 를 피우려고 현관으로 나갔다. 담배에 불을 붙이려고 호주머니를 뒤지던 경주는 라이터 뜰방에 놓고 왔음을 깨닫고 방으 로 가려다가 현관 앞 화단 난간에 앉은 사내에게 다가갔다. "저 담뱃불 좀 빌릴 수 있을까요?"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중이었는지 사내는 흠칫 놀라며 경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담뱃불 좀 빌릴 수 있을까 해서요." 그제야 사내는 라이터를 켜서 경주에게 내밀었다. "전에 못 보던 분인 것 같은데 우리 인사나 나누죠. 저는 314호에 있는 이경주라고 합니 다." 사내는 그다지 사람을 쉽게 못 믿는 모양이었다. 좌우로 고개를 가로젓다가 겨우 말을 꺼 냈다. "저는 며칠 전에 여기로 왔습니다. 저보다 선배이신 것 같은데 말씀 놓으세요. 저는 윤천 식이라고 합니다." "참 힘든 때에 오셨군요. 저는 이 곳에 온 지 1년이 조금 넘었는데 처음에는 버티기 힘들 었지만 요즘은 많이 둔해졌습니다." 경주는 달관한 듯 얘기를 했다. 화단에서 쓸쓸히 담배를 피우는 사내의 모습은 1년 전 자신의 모습이었다. 접수실에서 편지를 받은 경주는 먹으려던 저녁을 잠시 뒤로하고 방으로 들어와 조심스럽 게 편지를 읽었다. 편지를 건네주며 주인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사모님 정성이 대단하네요. 학생 때 문학 소녀였나 봐요." 지영 아빠에게 더위가 식을 줄을 모르고 심술만 더 피우는군요. 그래도 여기는 앞뒤가 트인 시골이라서 시원하지만 거기는 온통 건물들로 둘러싸여 여간 답답하지 않을 듯싶은데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요. 어제는 중복이라고 읍내에서 아버님이 생닭과 인삼, 대추를 사 오셔서 삼계탕을 끓였는데 당신 생각이 많이 나더라구요. 할머니도 드시면서 내내 당신 생각만 난다고 하셨 어요. 이젠 제법 지영이가 밥을 많이 먹어요. 그래서 제 품에 있는 날보다도 어머니나 김제 댁 아주머니에게 안겨 있는 날이 더 많아요. 어찌나 재롱을 피우는지 동네 어르신들이 날마다 오셔서 보고 다세요. 그런데 지영이가 아저씨들만 보면 다 아빠라고 불러서 가끔씩 가슴이 아프기도 해요. 아 빠 얼굴을 보지 못해서 그런가 봐요. 하루에도 몇 번씩 당신 사진 가리키면서 아빠라고 해 도 동네 청년들이나 아저씨들만 보면 아빠라고 좋아해요. 아빠가 많이 보고 싶은가 봐요. 며칠 전에 보건소로 지영이 예방 접종을 하러 갔었는데 어찌나 사람들이 예뻐하는지 제가 엄마라는 게 자랑스러운 거 있죠. 어제 당신 전화 받았을 때 무척 떨려서 말도 제대로 못했어요. 저 정말 바보인가 봐요. 평 소에 하고 싶었던 말들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더라구요. 좀더 멋있고 그럴 듯하게 당신에게 말하고 싶었는데 마음처럼 되지 않았어요. 가끔씩 이런 생각이 들어요. 지금 이렇게 당신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기다림과 그리움으로 인해 오히려 당신의 소중함을 더욱 간절하게 느끼고 있나 봐요. 이 말을 하려고 펜을 들었 어요. 입맛 없다고 식사 거르지 마세요. 그리고 항상 건강 생각해서 담배 많이 피우지 말구 요. 그럼 또 펀지할게요. 당신을 사랑하는 영은 단숨에 편지를 읽은 경주의 입가에는 웃음이 번졌다. 편지지위로 영은의 얼굴이 환하게 떠오를 것만 같았다. 그 기나긴 기다림마저도 행복이라 생각하는 여자를 얻은 자신 또한 얼 마나 행복한 사람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가을로 들어서는 문턱에서 경주는 심한 유행성 독감에 걸렸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오한으 로 떨다가 ,지쳐 잠들기를 여러 날 거듭했다. 경주에게서 소식이 없자 어머니가 고시원으로 전화를 했다. 고시원 주인이 경주에게 전화를 받을 수 있겠느냐고 물었지만 경주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잠이 든 경주를 확인한 주인은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요 며칠 동안 이 선생님이 감기에 걸려 앓고 있습니다 좀 쉬다 올라오라고 해로 막무가 내로 방에만 누워 계시네요. 제 생각으로는 가족분 중 한 분이 올라오셔서 간호하셔야 될 것 같습니다. 식사도 통 못 하고 혼자 저렇게 누워 계시니 옆에서 지켜 보기가 이만저만 딱 한 게 아닙니다. 어지간하면 집에서 누구든 올라오시죠." 전화를 끊은 어머니는 머리를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하니 벽만 바라보고 말이 없었다. 밖에 내놓은 자식은 크나 작으나 어쩔 수 없었다. 정신을 놓고 계신 시어머니를 보고 영은이 다 급하게 물었다. "어머니 , 지영 아빠에게 무슨 일 생겼어요?" 영은은 가슴을 졸이며, 한숨만 쉬고 있는 시어머니의 대답을 기다렸다. "안 되겄다, 새아가. 니가 한 번 서울 좀 올라갔다 와야 쓰겄다. 경주가 독감으로 며칠째 누웠단다. 아프믄 내려와서 몸조리나 허다 다시 올라갈 것이제 지 고집만 세 갖고. 오늘 일 찍 자고 내일 아침 첫차로 서울로 가야 쓰겄다. 지영이는 우리가볼 팅께 그리 알고. 거자 나 은 것 같으은 거그서 한 삼 일 있음서 간병이나 허고, 병이 중헌 것 같으믄 억지로라도 데 리고 내려 와야 쓰겄다." 옆에서 듣고만 있던 시아버지는 얼굴에 근심이 가득 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누구 못지 않게 경주의 소식을 궁금해하던 시아버지셨다. 다음 날 새벽에 영은은 밥을 먹자마자 시아버지의 트럭을 타고 읍내 터미널로 향했다. "서울 가거들랑 전화혀라. 그리고 병이 중한 것 같으믄 꼭 데리고 내려와야 쓰겄다. 그 놈 이 고집부리믄 나헌티 전화혀라. 나라도 올라가서 데려와야 쓸 것잉께." 시아버지는 뒷주머니에서 만 원짜리를 여러 장 꺼내 영은의 손에 쥐어 주었다. "아버님, 이러지 않으셔도 돼요. 저도 돈 있어요." "니가 무슨 돈이 있겄냐? 부담 갖지 말고 니 돈처럼 쓰고 오니라. 경주 생각혀서 더 주는 것잉께 받고, 몸도 허할 틴디 약 몇 첩 지어 주고 오랑께. 알겄냐?" "네. 잘 다녀오겠습니다 도착해서 전화 드릴게요." 영은은 광주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곧장 서울로 향했다. 9월 초순이라서인지 더위는 잠간씩 얼굴을 내밀긴 했지만 제법 쌀쌀했다. 옆에서 자던 아 주머니는 에어컨 바람이 추운지 가방을 뒤져 소매가 긴 옷을 두르고는 다시 잠 속으로 빠졌 다. 창 밖으로 넋을 놓아 버린 영은은 경주의 앓는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려서 종종 눈시울 을 붉혔다. 정오쯤 서울에 떨어진 영은은 신림동을 온통 뒤지다시피 해서 경주가 있는 고시원을 겨우 찾을 수 있었다. 고시원은 동네 깊숙이 자리잡고 있어서 찾기가 여간 사나운 것이 아니었다. 고시원에 도착한 영은은 고시원 접수실 창을 두드렸다. "저 여기 이경주라는 분이 계시죠? 저는 그 분 안사람되는 데요." 주인 남자는 영은을 반갑게 맞았다. "아침 일찍 출발하셨나 봐요. 3층 14호실이에요. 식사하러 안 나간 것 같으니까 올라가 보 세요." 영은은 고시원을 찾는데 정신이 없어 빈손으로 은 것을 늦게야 깨달았다. 다시 현관을 나 서서 근처에 있는 슈퍼로 갔다. "저, 오렌지 주스 두 상자만 푸세요." "캔으로 드릴까요, 병으로 드릴까요?" "병에 든 걸로 주세요." 값을 치르는 영은에게 주인 여자가 물었다. "이 근처 고시원에 가시는 모양이죠?" "예." "여기 고시원에 다녀가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은 모두 똑같아서 금세 알아볼 수가 있어요. 아가씨도 마찬가지네요." "그래요, 그럼 많이 파세요." 영은은 다시 고시원으로 가서 접수실 창을 두드렸다. "제가 너무 급하게 오느라고 빈손으로 왔었어요. 작지만 받아 주세요." 주인이 접수실을 나오며 상자를 받아 들었다. "뭘 이런 걸 다 사 오고 그러세요. 그렇잖아도 경황이 없으실 텐데. 하여튼 고맙게 받겠습 니다 제가 이 선생님 방까지 안내해 드리죠." 주인을 따라 영은은 경주의 방으로 올라갔다. 방문 앞엔 노란 슬리퍼와 흰색 운동화 한 켤레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주인이 문을 두 드리자 방문이 열리면서 경주가 얼굴을 내밀었다. 주인 뒤에 서 있는 영은을 못 보았는지 경주는 주인에게 무슨 일이냐고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시골에서 사모님이 올라오셨어요, 이 선생님 ." 그 때서야 경주는 주인 남자 뒤에 서 있는 영은을 보았다. 경주는 영은을 보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영은의 눈에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주인은 자리를 비켜 주었고 경주와 영은은 방으로 함께 들어갔다. 한참 동안 영은을 껴안은 경주는 자신의 팔을 풀고서 도 몇 분 동안이나 말없이 영은을 바라보았다. "이게 얼마만이야. 면도도 하지 않아 꼴이 말이 아닌데." "못 조고 가면 어쩌나 얼마나 가 슴 졸이며 왔는지 몰라요. 이렇게 만났으니 다행이에요." 경주는 다시 한 번 영은을 힘껏 끌어안으며 말했다. "연락도 안 했는데 어떻게 왔어?" "당신에게 연락이 없으니까 어머님께서 고시원에 연락을 하셨어요.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 요? 할머님과 아버님, 어머님은 또 어떻구요." "와 줘서 고마워. 차차 당신에게 와 달란 말을 할 수가 없었어. 나도 참 멍청한 놈이지." 영은은 경주의 이마에 손을 갖다 대었다. "열은 많이 내렸나 봐요. 아프다는 말 듣고 많이 걱정했는데‥‥‥‥." 병원에 가서 맥이 라도 짚어 봐야 하지 않아요?" 경주는 영은의 걱정스런 말에서 묻어 나오는 따뜻한 사랑을 느꼈다. "이렇게 당신 얼굴 보니까 벌써 다 나은 것 같은데 뭘." 영은은 다시 경주의 품에 안겼다. "당신 왔으니까 오랜만에 근처 공원으로 산책이나 갈까?" "안 돼요. 이런 몸을 해 가지고 어딜 가신다고 그래요," "그럼 밖에서 점심이나 먹고 오 자. 아침을 안 먹었더니 뱃속에서 밥 달라고 요동을 치네." 영은은 안쓰러운 표정을 짓고 금세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제가 식사는 제때 챙겨 드시라고 했잖아요. 당신, 이렇게 끼니 제때 챙겨 드시지 않으면 저 시골에 마음놓고 못 내려가요." 분명 영은은 경주의 사람이었다. 염려스런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영은이 한없이 고마웠 다.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진수성찬 먹으러 가자구." 영은은 먼저 방을 나서는 경주를 바라보았다. "당신, 갈비 먹어 본지 오래됐지? 오랜만에 옛날 생각하면서 갈비나 먹으러 가자." "... ..." 영은과 경주는 고시원에서 멀지 않은 갈빗집으로 갔다. "오늘은 근사한 데 가서 먹으려고 했는데 이거 마누라가 안도와 주는군. 잘은 모르지만 명색이 서울인데 잘 해 놓고 음식파는 데가 한두 곳이어야지 . 그런데 기껏 온 데가 갈빗집 이라니. 좋아, 오늘은 내가 몸이 안 좋으니까 이쯤하고, 다음에 오면 정말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알았지?" "알았어요." "우리 예쁜 각시 보니까, 안 먹어도 배가 부르다." "그만 해요. 창피하잖아요." "창피할 게 뭐가 있어. 오늘은 영은이도 같이 있으니까 마음껏 떼 좀 쓰고 그래야겠다." 경주는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영은을 바라보았다. 영은은 아직도 경주가 걱정이 되는지 경주의 이마에 연신 손을 갖다 대었다. "아직도 미열이 남아 있는데 그걸 보고 누가 멀리 나가겠어요. 그렇게 몸 관리를 안 하니 까...." "영은아, 알았어. 여기서는 잔소리 안 할 줄 알았더니 여전하군. 하기야 내가 잔소리 들을 짓만 골라 했지." 경주는 물수건으로 손을 닦고 먼저 나온 눌은밥을 먹기 시작했다. "야, 이거 진도에서 할머니가 가마솥에 끓여 주시던 것하고 맛이 비슷해, 당신도 먹어 봐." 영은은 말꼬리를 돌리는 경주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많이 야위어 있었고 훌쩍 나이가 들어 버린 것 같았다. "그렇게 눌은밥만 많이 먹으면 고기는 어떻게 먹으려고 그러세요?" "당신은 아직도 나를 잘 모르는군. 고기 배, 밥 배 따로따로 응?" 영은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근처 공원을 산책했다. 조금은 누그러진 더위였지만 햇볕은 여전 히 뜨거웠다. 영은은 또 걱정이 앞서기 시작했다. "오빠, 햇볕이 너무 뜨거워요. 어디 들어가요." "그러자." 경주는 영은이 하자는 대로 여유 있게 굴었다, 지름까지 모든 것이 자신의 의지대로만 한 듯해서 미안했던 것이다. 종업원이 테이블 위에 에메랄드빛 유리잔과 메뉴판을 놓고 갔다. "뭘로 마실까?" "저는 그냥 커피 마실래요. 원두 커피 마셔 본 게 까마득하거든요." "그래, 나는 시원하게 레몬네이드나 시켜야겠군." 커피와 레몬네이드가 나오고 둘은 아무 말 없이 잔을 들었다. 카페에 앉아 있는 1시간 동 안 그들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기다림의 공극이었는지도 모르며 새로운 결합을 위한 인내력이었는지도 모른다. 카페를 나온 경주와 영은은 고속 버스 터미널로 가기 위해 곧장 지하철을 탔다. 영은은 자신을 바로 내려보내려는 경주의 마음을 이해했다. 큰 일을 위해 지금은 모든 것을 애써 견뎌 내야만 했다. 영은이 진도에 도착한 것은 자정 무렵이었다. 대문을 들어서자 백구가 꼬리를 흔들며 그 녀에게 올라섰다. 백구의 칭얼대는 소리를 들었는지 사랑채에서 김제 댁이 나왔다. "워메 워째 벌써 내려왔능가? 오늘 올라갔으믄 하룻밤이라도 자고 내려와야제, 안 그렇겄 냐. 성님, 지영 애미 그냥 왔단께요. 원 젊은 사람들이 그리 재미가 없다냐 안 본 지가 벌써 얼만디." 영은은 웃었다. 안에서 김제 댁의 소리를 들었는지 시어머니가 마당으로 나왔다. "뭐가 바쁜 일 있다고 이렇게 빨리 내려와 부렀냐? 내가 그렇게 당부혀지 않었냐. 여자 없이 고시촌에서 묵을 것도 못 챙겨 묵고 있을 것인디 아픈 사람을 두고 그냥 내려왔다냐. 이번에 올라가은 한 사나흘 있다 오라고 혔더니 원 ‥‥‥." "지영 아빠가 괜찮다고 내려보 내네요. 괜히 어른들 걱정하신다구요." "지 애비 닮아서 그 고집을 누가 꺾는다냐. 그래, 여튼 고생 많았다. 니도 피곤헐 틴디 가 서 자리 펴고 쉬거라." 정작 떠밀리다시피 해서 내려온 영은의 속이 더 좋지 않은데 그 속도 모르고, 다들 경주 걱정이 앞섰다. 시아버지는 영은의 얘기를 얼추 듣고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셨다. 방으로 들어온 영은은 문을 닫자마자 복받치는 눈물을 어찌할 수 없었다. 독하게 마음먹 은 일이었지만 먼저 자신을 내려보내려 한 경주가 조금은 야속했다. 허둥지둥 집으로 돌아 와 좋은 소리 하나 못 듣고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그 때 방문을 열고 승주가 들어왔다. "이러고 있을 줄 알았지. 여기 와서 울게 뭐야, 거기서 울어야지. 둘 다 독하긴 독해. 실컷 울어, 그래야 속이 풀리지. 나가 있을 테니까 신경 쓰지 말고 언니 마음 풀릴 때까지 울어 요. 제 경험으로는 그게 제일 좋은 방법이더라구요." 승주가 문을 열고 나서려 하자 영은이 목멘 소리로 겨우 승주를 불렀다. "아가씨..." 영은이 다녀간 후 가을은 훌쩍 키를 넘어서 냉랭한 겨울로 치달아 버렸다. 지난번 아무렇 지도 않게 영은을 내려보낸 경주는 며칠 간 고시원에서 가슴앓이를 해야만 했다. 어렵사리 잠에 들어서도 방문 앞에 서 있는 영은의 꿈을 꾸었고. 세면대의 거울에서도 영은이 문득문 득 웃고 있었다. 영은을 며칠 동안 옆에 두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지만 결국 혼자 이겨 내야 할 일 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을 이기려고 노력했다. 또한 그런 신념을 저버리지 않는 자신이 대견 스러웠고 그것을 기꺼이 받아 준 영은이 고마웠다. 11월로 접어들면서 서울은 완전한 겨울이 시작되었다. 시골집에서 고시원으로 경주의 겨을 옷가지들을 부쳐 왔다. 소포 안에는 지난번보다 더 자란 지영의 사진과 구기자밭에서 일하는 식구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 함께 들어 있었다. 영은이 보내 준 사진들이 이젠 제법 봉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날씨가 추워지고 나서부 터 경주는 현관으로 담배를 피우러 나가는 시간보다 사진들을 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햇살 고운 봄날의 지영, 여름 물가에서 해맑게 웃고 있는 영은, 그리고 붉은 구기자밭에 너의 식구들 모습. 그에겐 이 모든 것들이 활력소가 되었다. 가끔씩 커피를 뽑아들고 경주의 방으로 들어서는 옆 방의 김 형도 덩달아 그 사진들을 들여다보며 즐거워했다. 하루는 김 형이 경주에게 말했다. "이런 가족들과 헤어져 있어도 이제껏 집에 한 번도 안 내려가는 것을 보면 이 형은 참 신통해요." 경주는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김 형, 우리 오늘은 일찌감치 저녁이나 먹으러 가죠. 오랜만에 국밥 어때요?" "좋지요. 그럼 옷 좀 갈아 입고 오리다." 6시가 조금 안 된 시간임에도 밖은 벌써부터 어두워져 있었다 서편 하늘가로 먹구름이 잔 뜩 끼어 있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눈이 한바탕 쏟아질 것 같군요." 김 형이 하늘을 보며 근심스러운 듯 말했다. 두 사람은 단골 해장국집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눈만 내리지 않았을 뿐이지 완연한 겨울 이었다. 경주가 주렴을 걷으며 들어서자 주인 여자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이 선생님, 오랜만에 저희 집에 오시네요. 요새는 통 얼굴 뵙기가 어렵네요. 자주 좀 오 세요." 주인 여자는 구수한 옥수수 차를 테이블에 내려놓고는 다시 부엌으로 들어갔다. 부엌 안 쪽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들려 왔다. "오늘은 유난히 춥죠?아무래도 오늘 저녁엔 첫눈이 올 것 같아요." 그들이 물잔을 거의 비워갈 무렵 주인 여자는 뚝배기에 담긴 국밥을 가져왔다 경주는 보 던 신문을 접고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김 형, 오랜만에 뱃속 좀 뜨듯하게 데워 보자구요." 초겨울임에도 그들의 이마에는 땀이 방울져 홀러내렸다. "이거 날씨도 이런데 대폿집이라도 가서 술 한 잔 걸치는 게 어때요?" 김 형은 기다렸다는 듯이 활짝 웃으며 장단을 맞췄다. "언제 그 말이 나오나 기다렸습니다. 몇 번 갔던 집이 있는데 거기 가서 맘놓고 한 번 마 셔 봅시다." 김 형이 됫주머니에서 지갑을꺼내 들었따.경주가그의 손을 밀치며 계산을 했다 "좀 있다가 술값 내시면 되잖아요. 밥값은 제가 계산할게요." 결국 경주를 이겨 내지 못하고 김 형은 식당을 나섰다. 밖은 깜깜했다. 김 형이 이끄는 대로 큰 길을 내려가서 오른쪽 골목으로 들어서자 대여섯 평의 허름한 대폿집이 나왔다. 빡빡한 문을 열고 들어서자 오십은 넘어 보이는 주인 여자가 김 형을 보며 인사치레를 했다. "김 선생님. 오랜만에 오시네요. 저는 또 고향에라도 내려가신 줄 알았어요." "요새 마음잡고 공부 좀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날씨 덕분에 술 생각이 간절하더라구요." 김 형은 경주의 의향을 물었다. "뭘로 마실까요, 이 형. 여기는 생태 찌개가 얼큰해서 소주안주에 제격인데, 그걸로 살까 요?" "저야 뭐든 좋습니다. 오랜만에 생태 찌개 먹는 것도 좋을 것 같군요." 주인 여자는 잔과 소주 한 병 그리고 반찬을 내왔다. 반찬이라고 해 봐야 깍두기, 오뎅 볶 음. 콩나물 무침 마늘 장아찌가 전부였다. 김 형이 소줏병을 들고 잔을 권했다. "여기는 초라해서 좋아요. 부담도 없고 주인 아주머니도 큰 누님 같아 종종 오죠. 오늘도 이 형이 술 한 잔 하자는 말 안 했더라도 저 혼자 여기 와서 아주머니하고 술잔을 부딪쳤을 거예요. 하하하." 문득 경주는 김 형의 얼굴에서 근심보다 더 깊이 자리잡은 피곤함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많이 지쳐 있었고, 그것은 또한 자신감이 많이 퇴색해 버렸다는 소리도 될 것이다. 경주는 소주를 단숨에 들이켜고는 김 형에게 건넸다. 그리고 김 형도 잔을 받아 아무 말 없이 단숨에 마시고 경주에게 권했다. 물보다 맑은 소주가 잔 위에서 작게 출렁거렸다. "이 소주처럼 세상이 맑으면 우리들이 이렇게 발버둥 치면서 살진 않아도 될 텐데라는 생 각이 종종 들어요." 경주는 한참 잔을 바라보더니 힘없이 말했다. "이 형도 참 감상적일 때가 많지요. 찌르면 피 한 방을 안 나올 것처럼 단단하면서 말이 오. 그것이 어쩌면 이 형의 매력이고 내가 이 형을 좋아하는 이유죠." 조금 있다 주인 여자가 생태 찌개를 가져왔다. "야, 이거 오늘은 푸짐한데요. 보기만 해도 군침이 절로 도네요." "아이구, 김 선생님은 너스레도 잘 떨어요. 오랜만에 술 드시러 오셨으니까 맛있게 드시고 얘기 나누다가 가세요." 주인 여자는 김 형과 몇 마디 주고받더니 주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다시 술잔이 오갔다. 소주를 몇 병 비우고서부터는 그들이 술을 마시는지 술이 그들을 마시 는지 구분이 안 갔다. 적당히 들뜬 기분이었지만 정신은 절대 놓지 않았다. 사실 안주로 시 킨 찌개에는 거의 손도 대지 않았다. 술이 고팠던 것도 아니었는데 그들은 필사적으로 그 날 밤 술을 마셔 댔다. 둘은 어떻게 계산을 하고 문을 나섰으며 고시원으로 돌아왔는지 생 각이 나지 않았다. 다음 날 정오가 지나서야 목이 말라 일어나 보니 자신들의 방에 누워 있었다. 그들이 서 로 어깨를 두르고 걸어오던 밤길에 싸락눈이 방정맞게 내렸던 것이 언뜻 떠올랐을 뿐 어떤 기억도 나지 않았다. 경주가 일어나 보니 밖이 너무 환했다. 정오가 넘은 시간이긴 했지만 여느 때보다 몇 배 는 더 밝았다. 경주는 창문 쪽으로 다가가서야 어젯밤 서울에 첫눈이 내렸음을 알았다. 싸락 눈이 내리고 나서 함박눈이 밤새 내렸는지 밖은 온통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창문으로 가져 간 손에 찬 기운이 금세 감돌았다. 창틀과 문이 얼어 붙어서 쉽사리 열리지 않았지만 힘껏 밀자 창문이 뻑뻑하게 열렸다. 여전히 밖엔 한두 송이의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경주는 책상맡에 놓았던 담배를 들고 불을 붙였다. 서너 번 빨아들이자 담뱃불이 또렷하 게 일었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겨울도 지나고 창문 너머로 어느새 꼼이 기웃거렸다. 3월 초순 이라 날씨가 풀리지는 않았지만 겨울처럼 사납게 변덕을 부리지는 않았다. 2월부터 시름시금 앓던 김 형은 3월이 되어서 낙향해 버렸다. 의사가 그에게 간이 안 좋 다며 1년 정토는 쉬는 것이 좋겠다는 진단을 내렸고 그의 부인이 와서 강제로 데려갔다. 가끔씩 해장국집을 혼자 들를 때면 으레 김 형 쟁각이 났다. 해장국집에 들어서면 언제나 김 형의 시니컬한 그 독특한 웃음과 말투가 귓가를 쟁쟁하게 울렸다. 경주는 사법 시험을 본격적으로 치를 준비로 3월이 되면서부터 술은 입에 대지 않았다. 사실 경주만 그런 것이 아니라고 시원 전체가 경직되어 시험 준비로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 다. 예전에는 펜을 들면 아무 감촉도 없었지만 지금은 손끝으로 땀이 배어 나왔다. 스스로 긴 장하려고 했던 탓인지 경주는 이제 책상 앞에만 앉으면 시험장에 앉은 것처럼 바짝 긴장되 었다 물론 그것이 애송이의 그런 긴장은 아니었지만, 경주에겐 더없는 자기 제어의 수단이 될 수 있었다. 경주는 봄이 되면서 새로운 습관이 생겼다. 식사 시간 외에는 거의 바깥 출입을 하지 않 았고, 새벽 6시에 일어나 간단한 운동복 차림으로 고시원을 나서 몇 분간 몸을 푼 다음 동 네를 한 바퀴 돌았다. 아침 공기가 폐에 좋으니 나쁘니 하는 것은 경주에게 아무 상관이 없 었다. 스스로가 규칙적으로 몸을 푼다는 것에 더 만족하고 있었다. 고시원을 나서면 가로등이 하나둘씩 꺼지고 여기저기서 환경 미화원들이 부산하게 비질을 해댔다. 동네 조기 축구회나 되는지 20명이 족히 넘어 보이는 장정들이 근처 초등 학교로 달려 들어가는 것을 몇 번 보았다. 가끔씩 시간이 남는 날이면 초등 학교 운동장까지 달려가기도 했다. 거기서 운동장을 서 너 바퀴 돌고는 플라타너스로 빙둘러진 운동장 가의 스탠드로 가서 담배를 한 모금 빠는 것 이 그는 그렇게도 행복할 수가 없었다. 가끔씩 자신에게 아들이 생긴다면 아침마다 새벽 운 동장을 달려야겠다는 생각도 해 보았다. 경주는 3월을 팽팽하게 당기면서 보냈다. 경주는 늘어지지 않기 위해서 늘 수도승처럼 곧 은 자세를 유지하려고 애썼다. 1차 시험이 며칠 남지 않은 어느 팔이었다. 11시가 가까운 시각이었는데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건넌방 사람이었다. "저, 주인 아저씨가 시험 치르기 전에 간단히 한턱내신다고 휴게실로 나오라는데 가 보시 지 않을래요?" 경주는 주인의 성의에 얼굴이라도 보이려고 따라 나섰다. 휴게실에는 벌써 10명이 넘게 앉아 있었다. 둥그런 탁자 위로 몇가지의 과일과 떡, 머릿고기 등이 올라와 있었다. 주인은 돌아가면서 사람들에게 술을 권했다. 다행히 맥주 서너 잔이 오고 갔으므로 기분 좋은 술자리였다. 주인은 시험 잘보라는 말과 함께 몇 사람과 술잔을 주거니받거니 하며 시 간을 보냈다. 자정 무렵이 되어서 술자리는 끝났지만 몇몇 사람들은 아쉬운지 고시원 밖으 로 나갔다. 드디어 시험 날이 왔다. 일찌감치 아침을 먹은 경주는 말끔하게 옷을 차려 입고 고사장으 로 향했다. 다른 시험도 마찬가지겠지만 1차 시험에 유독 신경을 곤두세웠고,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답안을 하나하나 적으면서 그는 점차 편안해지고 느긋해지는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시험을 끝내고 고시장을 나서는 경주는 홀가분했다. 그것은 하나의 고지를 힘껏 올라선 자 의 쾌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시험장을 나서면서 경주는 곧장 진도 집으로 전화 를 했다. "여보세요, 상원리입니다." 영은이 전화를 받았다. 경주는 한참 동안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영은은 확인이라도 하듯 다시 말했다. "여보세요, 말씀하세요?" 경주는 다정스런 꼭소리로 대답했다. "당신이야?" "오빠예요? 어디서 전화하는 거예요?" "방금 시험 보고 나오는 길이야." "시험은 어땠어요? 실수는 안 했죠?" "그저 그랬지 뭐.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집으로 내려가고 싶은데, 결과도 기다려야 하 고 2차 시험 준비도 해야 할 것 같아, 미안해, 오랫동안 당신을 기다리게 해서." 영은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기다리는 게 힘들었다면‥‥‥‥. 앞으론 미안하다는 말 다시는 하지 말아요. 그 말 들으 면 저 섭섭해요. 알았죠?" 말을 잇지 못하고 영은이가 흐느꼈다. 경주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려 참는 것도 힘들었 고, 너무나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남편의 뒤에서 억지스럽게 서 있으려니 고통스러웠다. "어이구, 이젠 말 조심해야겠군. 부모님은 다 안녕하시고?" "방금 전에 이장님 댁에 가셨어요. 그리고 지영이는 김제 댁 아주머니가 데리고 마실 나 갔구요. 지금은 저 혼자예요." 경주는 오랜만에 영은과 터놓고 여유롭게 얘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수화기를 놓으면서 경주는, 앞으로 대여섯 달만 참자고 다짐했다. 경주는 한 달 후 1차 합격 통지서를 받을 수 있었다. 고시원 사람들 중 3분의 1가량이 1 차에 어렵게 통과했다. 2차 시험 준비를 하던 어느 날이었다. 점심을 먹고 방으로 올라온 경 주는 간단한 운동으로 몸을 풀고 있었다. 그 때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네, 열렸습니다." 방문이 열리면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여전하군요, 이 형은‥‥‥‥." 경주는 고향으로 내려갔던 김 형임을 알고 문간으로 나갔다. 그는 맨발로 복도에 내려서 면서 김 형을 끌어안았다. "이거 오랜만이에요. 그 동안 얼굴은 많이 좋아지신 것 같은데. 건강은 좀 어때요?" "여기서 이렇게 서 있다가보낼 거예요? 나도 고시원 방 좀 오랜만에 앉아 보고 싶은 데‥‥‥‥." "내 정신 좀 봐. 들어오세요." 김 형이 신발을 벗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낯벌지 않은 방을 오랜만에 휘 둘러보았 다. "변한 거라곤 이 형밖에 없네요." 경주는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제가 변한 것 같아요?" "예전보다 많이 여유로워지고 또 많이 삭았어요. 저만 혼자호의호식해서 그런지 몰라도 말이에요." 김 형은 들고 온 음료수 상자를 풀어 캔 하나를 건넸다. "역시 김 형밖에 없다니까요. 마침 목마르던 참인데." "이젠 2차 시험만 남았군요. 이 형 은 정신없이 앞만 보고 가는데 나는 이 꼴이 뭔지 모르겠소." 음료수를 반쯤 비운 경주는 상자에서 캔을 꺼내 김 형에게 건넸다. "무슨 말이에요. 아직도 기회는 있어요. 이렇게 건강해진 김형을 보니 전 오히려 이번에 휴식을 가진 게 김 형한테는 잘됐다고 생각해요. 6월이 되니까 또 이놈의 더위가 극성을 부 리기 시작했어요. 가끔씩 방문을 두드리던 김 형 생각이 나더군요. 이번만이 기회는 아니잖 습니까. 먼저 하나뿐인 몸을 추스려야죠. 제가 이번에 합격하거든 한턱 톡톡히 내겠습니다. 그런데 그거 공짜는 절대 아니에요. 언제가 되든 간에 꼭 저한테 똑같은 합격 턱으로 갚으 셔야 합니다." 김 형은 웃으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렇게 김 형이 경주에게 왔다. 간 뒤 자신이 이번 시험 에 꼭 합격해야 한다고 마음을 굳혔다. 여름이 그 기세를 누그러뜨릴 무협 2차 시험이 치러졌다. 평소 필기 속도가 느린 것이 걱 정이 되긴 했지만 경주는 마음을 다잡으며 고사장으로 들어섰다. 손끝으로 땀이 배어 나오는 팽팽한 긴장감과 엄숙함이 고사장 가득히 차 있었다. 숨소리 마저 종잇장과 펜 끝이 맞닿아 나는 소리에 잠식당했다. 고사장의 분위기는 엄숙하기보다는 차라리 침울하기까지 했다. 고사장 안에서 나는 소리란 거구들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책, 걸 상의 이음새에서 나는 소리 외에는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시험을 알리는 종소리가 복도를 타고 멀리 떠나가는 원양 어선의 뱃고동 소리처럼 쓸쓸하 게 울려 퍼졌다. 감독관이 들어서고 방이 열리더니 시험지가 배부되었다. 경주는 긴장된 손 목을. 몇 번이고 깍지끼며 손가락을 흔들어 댔다. 사법 시험은 모두 나흘 간에 걸쳐 치러졌다. 응시생들은 시험지에서 눈을 테지 않고 있었 고, 말린 시험지를 뜯어 내는 경주의 손은 가늘게 떨렸다. 답안지를 펼친 경주의 오른쪽 손 가락은 미꾸라지처럼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수험생들보다도 감독관들이 더 손에 진땀을 흘리며 자리를 떠날 줄 몰랐다. 경주의 오른 손에서 거의 두 시간 동안 한 번도 떨어질 줄 모르던 검정 만년필이 힘없이 떨리며 책상 위 로 내려지고 그렇게 첫째 날이 닻을 내렸다. 둘째 날은 행정법과 상법이 시행되는 날이었다 이 날 역시고사장의 분위기는 전날과 변함 없이 수험생들을 무겁게 내리 눌렀다. 아침부터 할머니는 교문 앞에서 손주를 위해 두 손을 곱게 모아 기도드렸다. 노환에도 불구하고 평생의 원을 풀기 위해 당신이 직접 와 보신다며 영은이와 함께 경주의 시험장을 지켰다. 결시생이 몇몇 있었지만 여전히 고사장은 엄숙한 분위기로 꽉찬 느낌이 들었다. "어제와 변함 없이 자신의 실력들을 발휘하시기 바랍니다." 간단한 감독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시험지가 배포되었다. 문제지를 훑어본 경주는 어제 처럼 바삐 답안지를 써 내려갔다. 한참 동안 답을 쓰던 경주는 잠시 머리를 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마지막 문제에 가서 긴장했던 탓인지 경주는 고사장을 나와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저녁도 먹지 않고 깊은 잠에 빠졌다. 그런 경주를 보며 영은은 너무 안쓰러워서 그의 곁에 앉아 가끔씩 맺히는 이마의 땀방울을 닦아주며 경주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셋째 날씨 밝았고 다시 시험이 시작되었다. 영은은 힘없이 고사장을 향하는 경주의 뒷모 습을 보며 겉으로 표현하지 않았던 간절함들을 그 영롱한 눈에 실어 그가 향하는 걸음마다 옮겨 놓았다 시험장은 결시생이 하나도 없이 거무스름한 사내들이 빽빽히 한 자리씩을 차지 하고 앉아 법전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오늘이 벌써 세 번째 날입니다. 모두들 열심히 하십시오." 감독관이 수험생들을 바라보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경주는 문제를 읽고 한 번 골똘히 생각하는가 싶더니 답안지를 들 고 초안을 잡기 시작했다. 이따금 고개를 들어 창문을 한 번 내다보며 답안지를 채워 나갔 다. 전날 잠을 충분히 자 두었기 때문인지 경주는 몸이 한층 가뿐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 날에는 조금의 여유가 생겼다. 자리에 앉자마자 경주는 서둘러 시험 과목의 목차 를 줄줄 외우듯 읽어 내려갔다. "고생 많았습니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니 분발하십시오." 감독관이 제법 온화해 보이는 미 소를 지으며 시험장을 두루 돌아보았다. 어떤 소리도 나지 않는 조용한 시험장에서는 시험 지 넘기는 소리만이 들려 왔다. 드디어 경주의 손에도 민사 소송법과 윤리 문제지가 들어왔다. 경주는 답안지를 깨알 같 은 글씨로 쉽게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답안지를 다 옮겨 적은 경주는 한낮처럼 긴 한숨을 토해냈다. 나흘 간의 기나긴 싸움도 어느 새 시작만큼 엄숙하게 나래를 접으며 끝이 났다. 저자다 고사장을 나서는 사람들의 손에는 담배 한 개비씩이 들려 있었고 거침없이 그 눅눅한 연기 를 하늘로 발산했다. 교문에서 경주를 기다리던 영은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나오는 경주를 향해 손을 들었다 경 주는 영은을 껴안았다. "오빠, 고생 많았어요." "오빠는 무슨‥‥, 나도 이젠 의젓한 애 아빠인데, 안 그래?" 경주는 지친 손아락을 모아 영은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영은을 끌어안은 경주의 손이 축축히 젖어 있었다. 경주는 끝없이 넓은 하늘을 바라보며 영은에게 속삭였다. "이제 고향으로 내려가 가족들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면서 농사일도 돕고, 그간 발전했다 는 승주의 회사도 둘러보면서 결과를 기다리는 거야." 경주는 대부분의 짐을 택배로 부친 다음 고시원 주인에게 인사를 한 후 다음 날 서울을 떠나 진도로 향했다. 비상하는 새 황혼 무렵이 되어서야 경주 일행은 운림산방 어귀에 들어설 수 있었다 경주는 영은에게 할머니를 모시고 먼저 집으로 들어가게 하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는 나무 뒤편으로 붉 게 물든 석양에 한참 동안 취해 있었다. 그 때 저쪽에서 김제 댁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아니 경주 아니여? 큰일 치루고 왔는디, 왔으믄 바로 집으로 들어갈 것이제 여그서 멀거 니 머하러 서 있다냐? 아이고 쉬도 않고 이렇게 불쑥 내려왔으니 우리 성님 또 한 번 크게 놀라시겄네." 김제 댁은 어디 마실이라도 갔다오는지 양손에는 참외가 들려 있었다. 김제 댁은 손에 들 린-참외 하나를 소매로 반질하게 문지른 뒤 경주에게 내밀었다. "서울서는 이런 참외 맛보기 힘들 것이랑께. 참외도 바람 잘 들고 볕이 알맞게 들어야지 제 맛이 나는 법이제." 김제 댁이 먹음직스런 참외를 건네자 경주가 한 입 베어 물었다. "정 말 꿀맛 같은데요." 참외 하나를 다 먹을 때쯤 경주는 집 앞에 이르렀다. 얼마만인가? 보기만 해도 가슴이 뭉 클해지는 고향집이었다. 마을 어귀에 다다른 경주는 몇십 년을 지켜 온 집을 보았다. 그 집 은 자신 때문에 파란 많았던 오랜 세월을 견뎌 온 아버지를 닳아있었다. 김제 댁이 대문으로 들어서자마자 안채로 달려갔다. "멋들 한다요. 서울서 우리 경주가 내려왔단께." 김제 댁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겁게 안방에서 기다림에 지친 표정을 한 식구들이 모두 뛰 어나왔다. 아버지의 구릿빛 얼굴에는 넉넉한 미소가 가득했다. "원 녀석 연락이라도 하고 올 것이제. 아 그랬으믄 내가 데리러 갔제." 승주는 마당으로 내려서면서 손을 내밀었다. "잘 왔어, 오빠. 정말 고생 많았어." "이승주!" 경주가 승주의 이름을 커다란 목소리로 불렀다. 식구들의 놀란 표정과 더불어 경주 역시 벅차 오르는 감정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마침 저녁을 준비하고 있던 영은과 어머니는 서둘러 부엌으로 가서 저녁을 차려 왔다. 마루로 상 을 내온 어머니는 할머니를 부축해서 마루 안쪽으로 모셨다. 경주는 달마다 떡을 빚어 동네 사람들과 나눠 먹던 할머니의 정정하실 때의 모습을 떠올렸다. 저녁상을 물리고 식구들은 모두 안방에 모였다. 모두가 경주의 말이 듣고 싶었던 것이다 사시에 대한 것만이 아닌 그 동안 경주가 지내 온 얘기들을 빨리 듣고 싶었던 것이다. 승주와 김제 댁이 거의 대화를 이끌어 가다시피 했다. 영은은 흐뭇하게 경주를 보면서 아 이를 재우고 있었다. 10시 무렵이 되면서 김제 댁도 사랑채로 가고 승주와 할머니도 작은 방으로 가고 난뒤, 아버지는 영은과 경주를 앉혀 놓고 몇 마디하셨다. "오늘 내가 말허려는 것은 인자 경주도 시험도 다 치렀고 했응께, 식을 올렸으믄 혀는디, 니들 생각은 어떠냐?" 결혼식이라는 말에 경주는 할말이 없었다. 당연한 혼례식이건만, 왜 그렇게 미뤄 왔던가? 영은은 그저 정성스레 경주의 뒷바라지 하기에도 힘겨웠다. 강한 아내로, 며느리로 그리고 지영의 현명한 엄마로서의 역할을 다 하는 데도 빠듯했다. 두 사람 마저도 잊고 있던 결혼 식이었다. 영은의 친정 아버지가 가장 서운해했고, 못마땅하게 여겼던 일이기도 했다. "네 에미가 널 어떻게 낳았는데, 네가 고생하면서 받은 대가가 고작 이거냐? 여자가 시집 을 갔으면 죽어도 그 집 귀신이 된다고 하던데 다른 건 모르겠지만 너희들 결혼 문제 질질 끄는 것 보면 이 서방 속을 좀체 알 수가 없다." 아버지가 종종 하시던 말씀이었다. "아버지, 저 괜찮아요. 시어른들께서 잘 대해 주시는 거 아시잖아요. 절 정말 딸처럼 잘 해 주세요. 그리고 사시 끝나면 저희가 알아서 할게요," "하도 속상해서 그런다. 이 서방은 내 아들이나 다름없는데 내가 무슨 할말이 있겠냐. 평 상시에도 그랬지만 좋은 사람이지. 하지만 너희들 식 올리는 것만큼은 더 이상 미루면 안 된다. 그건 내가 허락 못 해." "그런 형식이 뭐가 중요해요. 그 사람이 시간 있으면서 다른 맘 먹고 그러는 것도 아니고, 아버지도 사람 하나 진실된 거 제일 믿으시잖아요." "... ..." "아버지, 노여워 마세요. 이젠 좋을 날밖에 없을 테니 지켜봐 주세요. 곧 소식 있을 거예 요. 예? 건강하시구요." "너희들 내가 지켜 볼 테니까 그리 알아라." 하지만 영은도 늘 결혼식에 대한 미련을 쉽게 접을 수 없었다. 여자로서, 일생에 단 한 번 뿐인 화려한 결혼식을 꿈꾸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영은만큼은 경주에게 화려함보다는 지고 지순한 사랑을 주고 싶었다. 경주는 어버지의 다그치는 목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정중하게 말씀드렸다. "저 아직 시험 결과도 나오지 않았고, 10월 말까지는 저도 집에서 농사일 도우면서 결과 를 기다리려고 합니다. 결혼식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닙니다. 하지만 식은 결과가 나오고 나 서 정해도 늦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경주를 못마땅한 듯이 바라보았다. "그거야 니 생각이제. 새아기는 저라고 자식꺼정 낳고 식도 안 올리고 이 때까지 있는 것 이 얼마나 죽을 맛이겄냐. 원 내 자식이라고는 하지만 지 생각밖에는 못 허니." 그 말이 떨어지자 영은이가 경주의 말에 동의를 했다. "저 아버님, 제 생각에도 내년 초에나 올렸으면 좋겠어요. 어느 정도 일이 정리가 되어야 지영 아빠도 안정이 될 것 같구요. 제 신경 쓰지 마세요. 전 괜찮아요. 지름도 좋은데요, 뭘." "그래, 새아기 니 생각이 그렇다은 달리 헐말은 없지만서두 그래도 더 이상은 밀지 않았 으먼 싶다. 할머니 생각도 혀야쓰지 않겄냐. 어머니도 불안하신지 틈만 있으시면 니들 혼인 얘기 꺼내시더라. 곤할 틴디 어서들 가서 자고, 아무튼 그렇게들 알고 있으랑께." 경주는 잠든 지영을 안고 안방을 나섰다. 경주 방 안에 있는 것이라고 해 봐야 장롱과 서랍장 그리고 지영이 장난감 바구니가 고작 이었다. 지영을 눕힌 영은이 자리를 펴려고 준비하자 경주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이런 일까지 당신시키면 아버지한테 혼난다구." 경주는 한쪽에 이부자리를 폈다. 지영은 그저 잠에 곤히 빠져 있었고, 그런 지영을 흐뭇하 게 바라보던 경주는 영은을 살며시 안았다. 영은은 아무 말 없이 경주의 품에 안겼다 그 날 밤, 겹겹이 쌓인 그리움의 단편들이 호수를 이루듯 그들은 하나가 되었다. 다음 날부터 경주는 들에서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거들었다. 정말 오랜만에 해 보는 농사 일이었다 코끝으로 밀려드는 흙냄새는 서울에서 내려와. 고향 냄새를 느끼기에 충분했다. 논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서부터 산비탈에 있는 구기자밭에서 검붉게 익은 구기자를 바구 니에 따는 작업을 거들었다. 그렇게 들에서 거의 가을을 보내면서 시험 결과를 기다렸다 한 해 더 공부할 각오쯤은 되어 있었지만 합격의 소식이 기다려졌다. 고시원 주인으로부터 합격했다는 전화를 받은 경주는 자신도 모르게 환호성을 치고 있었 다. 그렇게 가슴 졸이며 기다리던 합격 소식이 드디어 경주에게도 찾아온 것이다. 합격 소식 을 듣고 기쁨보다는 먼저 눈물이 앞을 가렸다. "아버지, 합격이랍니다. 이제 저도 변호사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영은은 기쁨을 감추지 못해 얼굴을 가리며 방으로 달려갔고 아버지는 다 시 확인하려는 듯이 경주에게서 수화기를 뺏어 들었다. "다시 한 번 얘기해 보시구려." "이경주 씨가 전국에서 차석으로 합격했대요." 고시원 주인도 너무 기쁜지 큰 소리로 다시 한 번 합격 소식을 전해 주었다. 옆에 앉았던 어머니와 김제 댁은 소맷부리로 눈물을 훔치고는 경주를 끌어 안았다. "장하다 내 아들. 암, 내 아들이 어떤 아들인디." "우리 경주가 어떤 인물인디. 내 말이 맞지라 성님, 어렸을적부터 큰 일 할 사람이라고 하 지 않았당가요." "오빠 축하해." 자신의 기쁨 이상으로 가족들이 더욱 기뻐했다. "이제사 진도에 떨어졌던 별이 다시 솟아오르는구만." 김제 댁이 지난날을 추억이라도 하는 듯 되뇌었다. 다음 날 경주긔 집은 한바탕 잔치가 벌어졌다. 서장과 직원들이 들어서자 면장을 비롯한 조합장, 지역 유지들이 이어서 들어섰다. 그리 좁은 집이 아닌데도 한꺼번에 사람들이 몰리 는 바람에 집 앞의 길에까지 천막을 쳐 손님들을 대접하기에 분주했다. 서울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서울 고시원 주인의 전화였는데 고시사에서 합격 좌담회에 참석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전국 차석의 영예를 좌담회에서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기회였지만 경주는 정중히 거절하고 전화 통화를 끝냈다. 마당은 동네 사람들로 가득 찼다. 이장은 어느 새 꽹과리 패들을 데려와서 한차례 풍악을 울리고 이내 술독에 빠져 버렸다. 그런 와중에 집배원이 하객들을 헤치고 마당으로 바쁘게 들어섰다. 그것을 김제 댁이 받아 들어 경주에게 건네 주었다. 경주는 술잔을 입으로 갖다 대며 축전을 펼쳐 보았다. 경주야 나는 네가 꼭 합격할 줄 알았어 . 축하해. -미자 미자가 보낸 축전을 읽는 경주의 얼굴엔 은은한 미소가 번졌다. 곧 이어 군청 직원들이 몰려와 공보실장을 주축으로 해서 경주를 대청마루에서 끌어 내리며 축하 세례를 퍼부었다. 그들은 지금도 향학열에 불타고 있는 군 지역의 후배들의 사기를 진작하기 위해 차석으로 합격한 경주를 취재차 찾아온 것이다, 무엇보다 후배들에게 힘을 줄 수 있는 말을 해 달라 면서 경주에게 취재에 응해 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다. 끝내 거부하는 경주를 마을 사람들과 직원들이 붙잡는 바람에 경주는 취재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공보실장이 배석한 가운데 이장을 앞세우고 동네 주민들이 경주의 입이 떨어지기만을 기 다렸다. 공보실장 옆에 서 있던 직원이 의자 위에 놓았던 마이크를 얼른 경주에게 주었다 공보계장인 듯한 여직원이 합격 소감을 물었다. "먼저 합격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합격의 기쁨이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줄로 압니다. 누구보다 고향 후배들에게 선배로서 하고 싶은 말씀과 공부 방법에 대해 얘기해 주십시오." 여자 계장은 미리 준비해 온 질문들을 읽어 내려갔다. "갑작스러운 질문이라서 무슨 얘기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공부 방법이란 것이 무슨 왕도가 있겠습니까. 한 가지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무슨 공부를 하든지 목표를 세워서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뭐라고 딱히 말씀드릴 게 없네요. 해 보셔서 알겠지만 제가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은 한계가 있어요. 본인 노력에 따라 좌우 될 뿐입니다." "글씨, 꼭 옳은 말만 하는구만." 경주의 말이 끝나자 이장이 한 마디 거들었다. "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 말씀해 주시죠." 여자 계장이 아쉬운 듯 다시 물었다. "굳이 얘기하자면 사시란 것은 물 빠진 독에 물 붓기라서 한번 물을 채울 때 왕창 채워 그 독을 넘게 하는 것이 원리겠지요. 그리고 공부할 때는 무엇보다 불안 요소를 업애야 함 니다. 오직, 공부에만 전념해야지 이것 저것 신경 쓰거나 다른 것에 관심을 두는 것은 금물 입니다. 특히. 가정이나 학교에서도 수험생에게 공부 이외의 것을 접촉하지 않도록 배려해 주는 게 좋을 것입니다. 저 같은 경우는 집에서 끊임없는 격려와 관심을 가져 준 것이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 어렵다는 사법 시험을 한 번에 합격하셨는데 비결이 있습니까?" 마치 여자 계장은 자신이 사시에라도 도전해 볼 심산인지 질문을 보다 날카롭게 던졌다. "뭐, 비결이 있겠습니까? 그냥 수험 기간에 열심히 공부했고 고사장에서는 이번이 아니면 안 된다는 각오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운도 따라 주었겠죠. 그리고‥‥‥." "방금 운 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경주 씨는 젊은 시절 그 누구보다 갖은 어려움을 겪지 않으셨나요? 그렇다면 그 때는 운이 나빠서 그랬나요?" 여자 계장이 경주의 말을 가로채고 질문을 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할말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때는 운이 없었다기보다는 바보였겠지 요. 지금은 바보가 유식해졌다고나 할까요?" "하하하." "경주의 소리를 듣고 있던 마당 안의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그리고 이장이 술잔을 들고 와 경주에게 권했다. "어이, 이 법관 술 한 잔 받어야 쓰지 않겄는가?" 주위가 힌바탕 훌흘소리로 떠들색해졌다. 여자 계장도 경주가 이장의 잔을 비우자 다시 잔을 권했다. "이 법관님, 제 술도 한 잔 받으십시오." "감사합니다." 경주가 잽싸게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지금까지 여러 말씀 고맙게 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합격의 영광을 누구에게 들리고 싶습니까?" 경주는 여자 계장의 말이 떨어지자 고개를 돌려 누구를 찾는지 주위를 한참 동안 둘러보 았다. 그러다가 부여 문을 나서던 영은을 발견하고는 달려가 영은의 허리춤을 끌어안고 조 금은 서투른 몸짓으로 계장 앞으로 다가왔다. "존경하는 할머니와 부모님 그리고 마을 어르신들과 동네사람들 모두에게 영광을 돌리고 싶습니다.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떠오르지만 다 얘기할 수 없다는 게 아쉬울 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합격의 영광을 사랑하는 아내에게 돌리고 싶습니다." 다음 날 경주를 찾아온 손님 중에 그 누구보다도 귀한 손님이 있었다. 바로 영은의 친정 아버지였다. 아무 말 없이 귀한 딸을 내 주고 무엇보다 경주를 믿어 주신 분이셨다. 경주는 장인에게 큰절을 올리면서 예를 다했다. "장인 어른, 그 동안 염려 많으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이젠 시름 놓으십시오. 앞으로 사위 노릇 톡톡히 하겠습니다. 절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수고했네. 자네, 내가 무슨 소릴 하고 싶어하는지 잘 알고있으리 라 생각되네." "죄송합니다, 심려만 끼쳐 드려서. 영은이가 이제 웃을 일밖엔 없을 거예요." 승주는 올케 언니와 조카 지영이 떠난 큰오빠의 방을 치우다가 책상 모서리에 놓여 있던 큰오빠 내외가 지영을 안고 구기자밭에서 찍은 사진을 바라보며 그리움에 사무쳤다. 몇 해를 같이 살았어도 조용하기만 했던 영은과 지영이, 해맑은 모습으로 자신을 바라보 는 것 같아 오늘따라 마음속에 그리움이 가득 요동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빠가 사법 연수원에 들어가고 집에서 마련해 준 아파트로 이사를 하던 날, 영은의 손목 을 잡고 할머니께서 흘리시던 눈물을 승주는 여지껏 기억하고 있었다. "우리 손주 며느리가 참말로 효성도 극진했제. 내 워째 니들없이 이 곳에서 살거나." "할머니, 자주 찾아뵐게요. 건강하셔야 해요." 그렇게 올케 영은은 할머니를 위로하고 큰오빠를 따라 서을로 갔다. 승주는 올케가 없는 빈자리를 할머니와 가족들 곁에서 더욱 열심히 채워 줘야만 했다. 그 럴 때면 영은과 조카의 자리가 새삼 컸음을 알았다. 그리고 보고 싶은 마음에 안절부절하지 못할 태도 종종 있었다. 승주는 공장 일과 영은 대신, 집안 식구들의 말 동무가 되어주느라 하루를 바쁘게 보냈다. 승주외 노력에 힘입어 승주의 회사는 지역 발전에 없어서는 안 될 농산물 회사로서 급성 장하고 있었다. 아침이 되기도 전에 층계로 들어서는 직원들의 발길은 빨랐나. 서류를 챙기는 직원, 옷매 무시를 고치는 직원 등 고요한 아침을 가르는 활발한 모습들이 봄날의 새싹처럼 기운차 보 였다. 여직원이 책상을 정리하며 콧노래를 불렀다. 그런 여직원의 상큼한 노래를 깨뜨리는 전화벨 소리가 사무실 안에 울려펴졌다. 여직원은 하던 일을 멈추고 진동의 파장을 막을 태 세로 몸을 움직였다. "여보세요." "거기가 이경주 법률 사무소죠?" "네, 맞는데요. 무슨 일이시죠?" "변호사님 좀 바꿔 주십시오." "오늘 변호사님께서는 법정에 들르셨다 오후에나 들어오실 예정입니다. 죄송하지만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습니까?" "어젯밤 텔레비전 심야 토론을 보고 전화 드렸습니다. 이 변호사님의 법률 해석이 정말 마음에 들었어요. 지금 우리 문중에 심야 토론 주제와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그 프로 를 보는 순간 이 변호사님이면 되겠구나 싶어서 밤잠을 설치며 기다리다가 전화 드린 겁니 다." "감사합니다. 그럼 먼저 사무장님을 바꿔 드릴까요?" "사무장님도 좋지만 저희가 직접 변호사님을 찾아뵙고 선임을 하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십시오." 상대방은 라쁘게 전화를 끊었다. "사무장님, 민사 소송 자료들을 분류해 놓았는데요." "고마워요." 사무장은 자신이 읽고 있던 자료 뭉치들에서 눈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여직원이 다시 책 상으로 가려는 순간 또 한 번의 전화벨이 울렸다. "네, 이경주 법률 사무소입니다." "이 변호시님께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네." "어디시죠?" "여기, 창신동인데 이번에 이 변호사님께서 맡으신 손해 배상 청구 소송에서 이겼다는 승 소 판결문이 나왔어요. 내가 지방에 출장 갔다가 이제 막 돌아왔는데 정말이지 경사가 났더 군요. 너무 감사해서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도 안 된다는 걸 이 변호사님 이 해낸 거랍니다." 상대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갑상선 2기에 접어든 환자처럼 찢어지는 목소리로 내뱉고 있었다. "잘 되셨네요. 제가 변호사님께 전해 드릴게요." "예, 그렇게 해 주세요." 언제 서류 뭉치들을 다 훌어보았는지 사무장이 여직원에게무뚝뚝하게 말했다. "거 아무리 바빠도 우리 커피나 한 잔 마시고 하지?" "좋습니다." 사무장의 옆에 앉아 있던 타이피스트로 보이는 아른 여직원이 컴퓨터에서 일어서며 주방 으로 향했다 타이피스트는 다른 여직원보다 몇 살 위로 보였지만, 옷매무시는 훨씬 단정했 다. "모두 블랙으로 드실 거죠?" 그녀는 마치 자신의 판단이 맞다는 듯이 미소까지 머금으며 물었다. 벽에 비치된 월중 행 사표에는 다음과 같이 써 있었다. '4월 재판 일정-행정 소송 9건, 국제 분쟁 3건, 민사 소송25건. 형사 사건 30건, 기타 7건' 예닐곱 명의 직원들은 벌써 소파에 모여 앉아 커피를 마시며 환담을 나누고 있었다. 진지 하게 나누는 그들의 대화는 유리창가의 햇살과 어울려 봄날의 향긋함을 더욱 뽐내고 있었 다. 바쁘게 사는 경주에겐 하루의 해가 짧았다. 법원 마당에 들어서는 경주의 여유로움도 법 정 안에서는 금세 육중한 무게로 변하고 긴장된 법정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가 없었다. 소 송사건마다 경주와 상대할 상대편 변호사들은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냐 하면 경 주가 서는 법정마다 또 하나의 신판례를 낳는 바람이 일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주가 법률 사무소를 열자 이미 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물론 장학회 시절에 인연을 맺 었던 전국 중소 기업체들로부터 자문 변호사 선임이 이어졌다. 또한, 경주의 능력을 인정한 업체들에 의해 파생된 기업들이 각종 소송 자료들을 경주에게 일임했다. 경주의 정화한 일 처리는 법조계에서는 신망을 얻고 있었다. 오히려 늦은 합격은 그의 체험과 더불어 그가 그 동안 만났던 어려운 사람들의 절대적인 대변자가 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아무리 힘이 들어도 그들을 위해서라면 샘처럼 힘이 솟았다. 경주는 서초동에 있는 사법 연수원 시절부터 변호사 업무에 필요한 자료와 판례 연구로 논문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그 논문은 법조계에서 새 바람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경주 가 이끌어 오던 팀 구성원들도 모두가 원하는 분야에서 각자 열심히 일하고 있었지만 경주 의 깊고 매서운 법률 이론에 혀를 내둘렀다. 경주는 사법 연수 때의 교과과정에 짜여진 것 이상으로 열심히 노력하여 법률 이론과 실 무에 관한 집중도를 높여 갔다. 시보로서 검찰 업무 3개월을 고소인보다 피의자의 입장에서 그 사건의 당위성을 분석하며 가능하면 일벌의 원칙보다는 사회적인 상황과 개인적인 정황들을 꼼꼼히 따져 화해할 수 있 는 기회를 주어 원만하게 타협할 수 있도록 했다. 경주의 이러한 노력으로 사회로 돌아가 일하던 피의자와 고소인 역시도 그 깊은 뜻을 알고 나중에는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것을 지켜보던 검찰계의 선배들은 경주가 가망 있는 후배라고 아껴주었다. 경주는 3개월의 판사 시보 업무와 3개월의 변호사 시보 업무를 통해서도 각 분야의 법조 선배들에 대한 존경심과 인간애를 자신의 법 이론과 접목하여 하나의 법 개론으로 세워가고 있었다. 경주가 사법 연수원을 수석으로 마치자 법원과 검찰에선 그가 오기를 기다렸지만 역대의 사법 연수원 수석들이 대부분 그랬듯이 경주 역시 자신의 의사에 따라 변호사의 길 을 선택했던 것이다. 경주가 법률 사무소 문을 열자 그에게 주어진 각종 선임들만 해도 사건 선임 80건, 대법 원 상고 5건, 기타사건 20건이 몰려들었고 경주는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재판 준비로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으며, 토 일요일까지도 변론 준비에 심중을 다해야 했다. 경주는 주마다 방송되는 텔레비전 프로에 출연하여 법률 서비스를 제공하였고 지방 언론 에까지 법률 논단을 해 주느라 동분서주해야만 했다. 그렇게 경주는 변호사로서의 기개를 활짝 펼쳤다. 매사 법정이 떠나갈 듯한 자신 있는 목소리는 방청객을 휘어 잡았고 논리적인 변론으로 무죄를 도출해 낼 때는 답답해하던 방청객의 마음을 후련하게 해 주었다. 그런 경주를 바라보며 온갖 피해 의식에 쌓여 있던 사람들도 자신의 일인 양 기뻐하기도 했다. 그에게 있어서 변호사 사명은 그 누구보다 투철하였다. 세계는 이미 국제화가 진행되고 있었고, 고도의 산업과 문화가 발전할수록 국가의 발전과 더불어 법의 인식이 새로워지고 이기적인 인간 관계가 분쟁으로 이어지면 소송이 크게 늘어 날 것이라는 경주의 예측이 맞아떨어졌다. 그가 법정에 서면 법정의 무게만큼이나 지성과 위엄이 쌓였다. 그는 겸손하지만 겸손을 가장하지 않았고, 아무리 험악한 범죄를 저지른 피고인을 만나 얘기할 때도 그들이 아주 편하게 얘기할 수 있도록 진지하게 들어주는 예의를 갖췄던 것이 다. 소송 의뢰인들이 애타게 하소연하는 것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메모하여 변론지에 표현해 주는 여유까지도 갖고 있었다. 특히나 그는 소외 계층에게 특별한 관심을 두었고 그로 인해 그의 신뢰와 덕망은 높아만 갔다. 그리고 법정에서 돌아올 때면 언제나 아버지를 그리워하 는 모습이 역력했다. 경주가 서류 가방을 들고 자신의 변호사 사무실 계단으로 들어설 때 사무실에서는 직원들 이 이번 사건도 승소나 다름없다며 일치된 분석을 하고 자축준비에 바빴다. 직원들은 언제 나 경주가 차질 없이 법정에 입정할 수 있도록 만반의 자료 준비와 토론을 게을리하지 않았 으므로 경주에게 그들은 분신이나 다름없었다. 경주 사무실의 직원들이 자축연을 준비하고 있을 때 검찰청건물 051호 검사실에서는 고요 한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너댓평 되는 사무실 앞쪽에서 무슨 걱정이 있는지 여직원이 멍하 니 문 쪽만 바라보며 이슬 맺힌 눈을 하고 있었다. 그 여직원의 책상 옆에 앉은 남자 직원 은 담뱃대에 새 담배를 끼워 물며 긴 한숨만 내쉬고 있었다. 담배를 문 남자의 책상 건너편에 우두커니 서 있던 한 명의남자가 여직원에게 말을 건네 지만, 그녀는 못 들었는지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남자는 그런 그녀가 못마땅한 듯 눈을 찡 그리고는 그녀만 쳐다보고 있었다. 한참을 말없이 시선을 문으로 향했던 그여는 남자의 시 선을 의식했는지 남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무원님, 사람을 째려 보는 것도 직권 남용이라고 누가 그랬어요." 여직원은 자신을 쳐다보는 남자가 마음에 걸리는지 남자를 향해 말했다. "째려 보긴 누가 째려 봐? 이슬 맺힌 눈동자가 가여워서 그냥 쳐다본 거지." 남자는 미안해하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들의 대화가 끝날 무렵 키가 크고 건장한 신사가 서류 봉투를 왼쪽 옆구리에 끼고 방으 로 들어섰다. 들어서는 신사의 얼굴에는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가 방으로 들어서자 세 명의 직원이 일제히 일어서서 인사를 했다. "검사님, 어떻게 되셨습니까? 오늘이 결심인데‥‥." "... ..." 그들의 물음에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신사는 넓은 책상으로가 앉았다. 그 책상 앞에 '검사 조일도 라는 봉황이 박힌 검정명패가 놓여 있었다. 다시 한남자가 조일도에게 다가가 궁금 하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검사님 ,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최선을 다했지만 모르죠, 두고 봐야지. 그나저나 이경주 변호사 듣던 대로 날카로운 데가 많이 있어요. 같은 법조인으로서 존경받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법조계에 지식인은 많 아도 법률과 연결된 혜안이 밝은 사람은 그리 흔치 않다는 어느 법조계 선배가 한 말이 떠 오릅니다. 지식만 갖춘 법조인은 대단한 것 같지만 유약하고 추진력과 결단력이 모자란 약 점을 지니고 있죠. 나는 어떤 연유로든지 지혜가 앞서는 이경주 변호사를 존경하고 있습니 다. 지혜가 없는 법조인은 법정을 리더해 나갈 수 업습니다 소송 사건에서도 변호사 간의 대결에서 지식은 지혜 앞에 위축되어 버린다는 말은 바로 이 변호사를 두고 한 얘기 같습니 다." 조일도는 자신의 말이 틀림없다는 확신에 찬 눈빛으로 덤덤히 말하고 있었다. "이경주 변호사가 능력 있다는 건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번에 도...." 남자는 걱정이 앞서는지 목소리를 깔았다. 검사실의 침묵은 석양이 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갈림길 쉬파리가 집 안 구석구석을 휩쓸고 다니면서 부산하게 날개를 접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경주는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인 다음 재떨이에 비벼 끈 뒤, 힘없이 사그라져 가는 연기를 바라보며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영은은 집에 없었다. 아마도 저녁을 준비하기 위해 시장에 간 모양이다. 거의 20개월이 되 어 가는 둘째 딸 지윤이는 영은의 곁에서 한시라도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다. 경주가 변론을 하느라 대부분의 시간을 밖에서 보낸 탓인지 지윤은 아직도 제 아빠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 했다. 그럴 때면 영은이 말하길. '지금이 한참 낮을 가릴 때라서 그러니까 서운해하지 말아요. 당신 얼굴을 자주 못 본 탓도 있겠지만 지영이보다 더 순하기 때문에 차차 괜찮아질 거예 요.'라며 위로했다. 한강 고수 부지엔 가로등이 하나둘씩 켜지고 있었다. 작년 봄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이 아 파트로 이사했는데 명은이 제법마음에 들어 했다. 이 곳은 무엇보다 교통이 편리했다. 영은 은 조금만 나가면 강변을 따라 공원이 펼쳐져 있고, 밤이면 베란다로 내려다보이는 풍경들 이 아름답다면서 경주의 안목을 입이 닳도록 칭찬했었다. 경주는 베란다로 나갔다. 이글이글 타 들어갈 듯 강 위로 번지는 석양을 바라보던 경주는 문득 도시의 저녁이 낯설게 느껴졌다. 매번 무시하고 지나쳤던 일상의 갖가지 모습들이 그 의 발치로 와서 하나둘씩 무분별하게 밟혔다. 꼭 어릴 적 오이넝쿨을 거둬들이면서 쭈글쭈 글해진 물외를 밟을 때처럼 픽픽소리를 내며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경주는 영은이 그렇게도 좋아하는 강변의 풍경을 오늘에야 느긋하게 내려다볼 수 있었다. 경주는 이런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서 살기에는 아직도 다급한 생활 속을 질주하고 있었다. 앞만 보고 쏜살같이 달리다가도 어느 순간에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무릎이 깨지기도 했지만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고 달려온 경주였다. 경주는 다시 담배를 빼어 물었다. 불을 붙이려고 라이터를 꺼냈을 때.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장을 보러 나갔던 영은의 뒤로 지영이가 제 엄마 대신 장바구니를 들고 따라 들어 왔다. 경주는 물었던 담배를 다시 집어넣고 영은을 맞았다. 영은이 잠든 지윤을 앞으로 안으 면서 물었다. "웬일로 일찍 들어오셨어요?" 경주는 잠든 지윤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받아 안으면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응 오늘 출국 수속이 다 마무리돼서, 오랜만에 우리 식구끼리 오붓한 시간 좀 갖으려고 일부러 일찍 들어왔는데 아무도 없더라고." "벌써 출국 날이에요? 오늘이 며칠이더라." 경주는 입버룻처럼 고향 하늘을 그리며 언젠가는 내려갈 거란 얘기를 하곤 했다 처음엔 그저 말뿐일 거라고 생각하고 대충 넘겼는데 몇 달 전, 우영의 결혼 기념일에 함에 저녁을 먹고 돌아오던 길에 진지하게 얘기를 꺼냈다. 그런 경주의 간절한 마음을 영은은 이해할 수 있었고, 또한 기꺼이 그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이제 난, 얻을 건 다 얻은 것 같아. 사랑하는 당신이 있고, 그토록 원했던 변호사의 길을 가고 있잖아. 또 내가 가는 곳마다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학교에서는 언제 든지 돌아오라고 하지만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은 고향이란 걸 난 누구보다도 잘 알아. 그 곳 엔 사랑하는 가족과 영진의 기억이 생생히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해. 내가 이렇게 다시 설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고향의 관심과 가족의 사랑 때문이었지. 고향은 나를 필요로 하고 있 어. 아니 어쩌면 내가 더 고향을 필요로 하는지도 모르지. 난 당신의 손때가 묻은 그 곳에서 쉬고싶고 새롭게 시작하고 싶어 . 여생이 얼마 남지 않으신 할머니, 기력이 예전 같지 않은 부모님, 고향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있는 승주, 나의 모든 슬픔과 기쁨이 묻어 있는 비옥한 땅이 애타게 기다리고 있어 아버지가 계신 곳으로 가고 싶어."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담담하게 얘기하는 경주의 열정적인 눈빛을 보며 영은 역시 다짐을 했었다. '고요한 당신의 호수에 어떻게 돌을 던질 수가 있겠어요. 난 당신을 믿어요.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쭉 그랬어요. 하지만 쉽진 않을 거예요. 당신의 모든 걸 끌어안기 위해서는 욕심도 버려야 하고, 많은 인내가 필요하겠죠. 제가 언제나 당신 곁에서 힘이 되어 드릴게 요. 서로가 존중하며 노력하면 다 잘될 거라고 믿어요.' 영은은 목이 마른지 냉장고 문을 열어 보리차를 컵 가득히 따라왔다. 지영이 욕실에서 나 오면서 경주를 향해 말했다. "아빠, 내 짝이 아빠는 무서운 사람이래. 내가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도 그 애가 계속 우 기잖아. 아빠, 아빠는 무서운 사람 아니지, 응?" 경주는 허리를 숙여 지영과 눈을 맞추었다. "지영아, 지영이는 아빠가 무서워? 안 그렇지? 그러면 안 무서운 거야. 지영이가 그렇게 큰 소리로 떼 쓰듯이 말하면 동생깨잖아. 그러니까 다음부터는 아빠한테 귓속말로 조용히 말해. 알았지?" "응." 지영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지영아, 아빠랑 지윤이 눕히러 가자." 지영이가 뒤꿈치를 살짝 들고 경주의 뒤를 따랐다. 지영과 경주의 모습을 지켜 보던 영은 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지영이는 담요를 펴면서 아이를 안고 있는 경주를 바라봤다. "아빠, 나 잘 했어?" "어디 보자 아이고 예쁘게도 해 놓았구나 우리 지영이는 아빠 말도 잘 듣고, 동생도 예뻐 하고 지영이 최고다, 최고!" "진짜? 아빠도 최고야." 아이를 눕힌 경주는 지영에게 손가락을 둥그렇게 모아 오케이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지 영이 먼저 까치걸음으로 방을 나서고 경주가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을 보던 영은이 경주를 향해 얘기했다. "당신 모르시죠? 지영이 수준이 얼마나 높은지. 지영이가 유독 다른 아이들보다 호기심이 많은 편이에요." 오랜만에 온 식구가 식탁에 둘러 앉아 저녁 식사를 했다. 지영이는 어렸을 때부터 진도에 서 나고 자라서 그런지 요즘 애들 같지 않게 피자. 햄버거보다 김치나 된장국을 더 좋아했 다. 한 번은 지영이 하교길에 엄마가 항상 들르는 슈퍼엘 혼자 갔다 온 적이 있었다. 영은이 호박잎을 사는 걸 보고 흉내를 낸 것이다. "엄마. 학교 다녀왔습니다." "지영아, 손에 있는 게 뭐니?" "호박잎이요." "뭐라고? 그걸 왜 사 왔어?" "엄마랑 아빠가 좋아하잖아 아빠는 호박잎 먹는 날은 밥을 두 그룻이나 드시잖아." "지영이 너 혼자 갔다 왔어?" "응." "지영아, 이러면 안 돼. 누가 혼자 그런 데 갔다 오라고 했어. 엄마가 학교에서 올 때는 친구들과 같이 오라고 했잖아 그런 곳에 혼자 갔다가 길 잃어버리면 어떻게 하려고 그랬어. 다음에 또 이러면 엄마한테 혼난다. 알았지?" 지영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삐죽거렸다. 그 날 저녁은 온통 호박 잔치였다. 식탁에는 호박잎 찐 것과 호박 된장국, 그리고 호박 무 침이 올라왔다. "이거 오랜만에 고향 맛이 나는걸.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돈다. 안 그러니, 지영아?" "응, 아빠." 지영은 숟가락을 집어들면서 대답했다. "이거 지영이가 학교에서 오다가 혼자 슈퍼에서 사 온 거예요. 글쎄, 애가 겁도 없이..." "정말이야? 야, 우리 지영이가 사 온 거라서 더 맛있었구나. 그런데 다음부터는 혼자 슈퍼 에 가면 안 돼. 슈퍼는 엄마랑 함께 가는 거야, 알았지?" "네." 초등 학교에 들어갔다고 제법 어른 행세를 해 보이는 지영이가 서툰 젓가락질로 푸릇한 겉절이를 집어 밥술에 올려놓아 조그만 입 속으로 쏙 넣었다. 그렇게 오붓한 식사를 하고 나서 지윤을 안고 경주 식구는 강변으로 산책을 나갔다. 강변 을 거닐면서 신이 나서 총총걸음을 하는 지영을 지켜 보는 영은의 눈에는 행복함이 가득 담 겨 있었다. 얼마 전부터 제법 걸음마를 하려고 여기저기 다니던 지윤이 지영을 따라가려고 경주 품에 서 바둥거렸다. 그것을 본 영은은 들고 있던 신발을 지윤이 발에 신겼다 지윤은 불안하게 뒤뚱거리면서 지영의 뒤를 기를 쓰고 쫓아갔다. 영은은 지윤의 모습을 보면서 불안했는지 지영에게 말했다. "지영아, 보도 블록으로 가지 말고 풀밭으로 가. 지윤이가 너 따라가려고 달리다가 넘어지 면 안 되니까, 알았지?" "네, 엄마." 경주는 아이들을 챵해 입에 두 손을 모으고 소리지르는 영은을 보며 가물가물한 기억이 스쳐 갔다. 경주는 영은과 통성명을 하던 날이 떠올랐다. 처음에 영은을 보았을 땐 영은의 차분한 외 모에 먼저 끌렸었다. 하지만 지금은 영은의 모든 것이 소중하고 사랑스럽다. 무엇보다 생각 이 깊고 현명한 여자였기에 평생 함께 할 반려자로서 더욱 믿음이 갔다.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경주는 영은에게 무슨 할말이 있는지 몇 번이고 거실과 방 을 왔다 갔다 했다. 금방 물을 마셔 놓고도 또다시 냉장고 문을 열었다. 경주가 좀 전부터 머뭇거리는 것을 눈치챈 영은이 경주의 품에 안기며 고개를 갸우뚱거렸 다. "당신, 무슨 할말 있어요? 왜 그렇게 안절부절못해요?" "내가 뭘?" 경주가 깜짝 놀란 듯 되물었다. "왜 마시지도 않을 물을 가지고 왔다 갔다 하느냐구요." "그냥 목이 말라서." "저녁 음식이 짰어요? 음식 만드는 사람은 맛이 짠지 싱거운지 잘 몰라요." "... ..." 경주는 손가락만 꼼지락거릴 뿐 대답을 하지 못했다. "지영 아빠?" "응." "당신, 저한테 숨기는 거 있죠?" "숨기긴, 뭘‥‥‥‥." "그럼, 왜 그러세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는 못 속여요. 제 얼굴 좀 똑바로 보세요." 경주는 영은의 말을 듣고 그제서야 이야기를 꺼냈다. "여보, 놀라지 마. 아까부터 얘기하고 싶었는데‥‥‥." "뭔데요?" 영은은 망설이는 경주를 보며 문득 3개월 전, 남편이 변호사휴업을 하겠다던 말이 떠올랐 다. 그토록 고생하여 닦아 놓은 변호사직을 그만두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놀라지 않았던 영은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경주가 존경스럽고 믿음직스러울 뿐이었다. 여지껏 결혼식도 올 리지 못했지만, 경주에 대한 사랑은 변함 없이 따사롭기만 했다. 처음 만남에서부터 지금까지 큰 마찰 한 번 없었다 그렇게 지켜 온 사랑은 영은의 타고난 착한 천성 때문이기도 했지만 본인이 운명처럼 받아들인 까닭이기도 했다. 경주는 때론 자 신의 고집이 영은을 힘들게 하지 않을까 염려했지만 영은의 따뜻한 배려로 쉽게 제자리를 찾아 갈 수 있었다. 영은의 첫사랑이었던 경주. 어머니 없이 혼자 자란 그녀에게 영은에게 있어 커다란 행운 을 잡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렇게 사람들과 부대끼며 사는 것이 어쩌면 영은이가 가장 바랐던 삶이었을지도 모른다. 초등 학교 때 경주와의 인연이 운명처럼 알알이 엮여진 채 작은 모래 바람도 한 번 일으키 지않고 여지껏 이어 온 것이다. 그녀는 경주가 주고 간 백구를 통해 여자로서 갖춰야 할 자태와 잉태의 숭고함을 배웠다 백구가 새끼를 낳는 것을 보며 가족의 소중함을 보다 가까이서 느낄 수 있었고 백구가 장으 로 팔려 가던 날의 아픔들을 통해 자신에게 있었던 지독한 외로움을 달랠 수 있었다. 비록 말을 하지 못하는 징승이었지만 백구를 통해서, 낳고 기르는 고통과 사랑과 지혜를 배울 수 있었다. 엄마가 떠난 빈자리를 백구가 대신하여 주었고, 백구가 새끼를 치며 기다려 온 것처럼 영 은 또한 경주를 기다리며 사랑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으로 채워 갈 수 있었다. 그녀는 경주와의 인연에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왔다. 그녀가 백구를 만난 것을 필연이라 생각하는 것처럼 경주를 만난 것도 그녀 인생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운명이 었다. 백구가 영은의 보살핌 속에서 자란 것처럼 영은 또한 경주의 사랑 안에서 살아왔다. 경주가 좨 긴 시간 동안 뜸을 들이다 이내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독일에 나 혼자 가지 않을 거야." 경주의 말을 듣고 영은은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같이 가실 분이 누구신데요?" 경주는 영은의 반응을 은근히 살폈다. 그리고 영은에게 한발자국 다가가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누구긴 누구야, 당신말고 내가 누구랑 같이 가겠어." "예? 저랑 같이 간다구요?" 영은이 경주의 가슴에 살며시 고개를 파묻자 경주는 영은의 허리를 감은 팔에 힘을 주면 서 가슴으로 그녀를 끌어안았다. 영은이 다시 고개를 들고 경주에게 말했다. "당신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에요. 그게 그렇게 말하기가 어려웠어요? 나쁜 소식도 아닌데 말이에요." 경주는 영은을 내려다보며 속삭이듯 말했다. "그 동안 당신 고생한 거 생각하면 나, 아직도 멀었어. 내가 할말이 어디 있겠어. 그 동안 당신에게 뭐 특별히 해 준 것도 없고 정말 미안한 마음뿐이야. 내 일만 한답시고 바쁘게 살 아온 오늘까지 당신 면사포도 못 씌워 주고,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잖아. 사실 여행이라고 할 것도 없지만 이제라도 잠시 당신과 오붓한 시간을 가졌으면 해서‥ ‥‥‥." "제가 무슨 고생을 했다고 그러세요. 다 절 위해 한 일이에요. 엄마로서 우리 지영 이랑 지윤이를 위해 할 일도 아직 멀었구요. 그런 생각하지 말아요. 전 당신 곁에 있는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당신은 아니에요?" "당신은 무슨 그런 섭섭한 소리를 하고 그래." 말을 마친 영은이 문득 벽에 걸린 달력을 보면서 놀란 듯이 경주에 게 물었다. "출국일이 언제죠?" "이틀 후야. 좀 빠듯하지? 준비하려면 정신 없겠어." "그래요. 왜 그렇게 빠듯하게 잡았어요. 저도 되는 대로 빨리 준비하도록 할게요. 특별히 준비해야 할 것 있으시면 미리 얘기해 주세요." "참, 여권과 비자는 미리 준비해 뒀어." "언제 그걸 다 준비하셨어요?" "제일 중요한 건데 미리미리 챙겨야지. 이번만큼은 다른 일생각하지 말고 오랜만에 홀가 분하게 나갔다 오자. 알았지?" "알았어요." 말을 끝낸 영은은 순간 아이들 걱정이 앞섰다. "그런데 애들은요? 아이들도 같이 가야 되는 것 아니에요?" 경주는 아이들 걱정을 하는 영은에게 여유 있게 말했다. "내 그럴 줄 알고 그 문제도 다 손을 써 놓았어, 애들은 제수씨한테 맡기기로 했어." "동서들에게 아이들을 맡긴다는 말이에요? 애들이 안 가려고 할 텐데‥‥‥." "우영이네 말이야, 나한테도 우영이가 편해. 건주야 청주에 있으니까 너무 멀고, 희주도 사업 때문에 정신이 없는데 아이들을 맡긴다는 게 그렇잖아. 오히려 우영이가 집도 가깝고 하니 그렇게 하자." "미안하잖아요, 하루이틀도 아니고." "이번만큼은 내가 하자는 대로 한다고 했잖아. 그리고 다른 걱정은 접어 두자, 알았지?" 경주가 고개를 끄덕이는 영은와 이마에 살며시 입맞춤했다. 경주는 아이들을 뒷자리에 앉힌 다음 조수석에 앉았다. 영은이 차를 몰았다. 일요일 아침 이라 공항으로 가는 차량이 제법 많았다. 영은은 차들 사이로 요령 있게 끼여들었고 가끔씩 무엇에라도 놀란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 면서 클랙슨을 울리곤 했다. 아이들은 뒷좌석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저희들끼리 소곤 대며 손장난을 치고 있었다. 영은은 운전을 하며 백미러로 연신 아이들을 들여다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엄마가 달리는 차에서 장난하면 안 된다고 했잖아. 지영이 너는 언니가 어떻게 동생보다 더 하니?" 영은이 호통을 치자 아이들은 금세 조용해졌다. 차는 비교적 빨리 공항에 도착했다. 현관으로 차를 댄 다음경주가 아이들을 데리고 먼저 내리고 영은은 차를 돌여 주차장으로 향했다. 아이들은 대기실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소파 사이를 비집고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그러자 영은은 지윤을 안고 소파에 앉았다. 그렇게 잠깐 앉아 있으려니까 우영 내외가 공항 로비로 들어오며 경주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이거 오래 있다 오는 것도 아닌데 무슨 대단한 송별회라도 하는 것 같네요." 경주가 멋쩍은 듯 우영의 처에게 말했다. "매일 같이 지내던 사람이 갑자기 사라지면 적적한 법이잖아요. 옛말에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하잖아요." 우영의 처가 영은에게서 지윤을 받아 안으며 말했다. 경주 부부가 탈 비행기의 출국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스피커를 타고 울려 퍼졌다. 경주와 영은은 아이들에게 입을 맞추고 힘껏 끌어안은 다음 출국 게이트로 갔다. 그들의 모습이 문 사이로 사라지자 우영 내외는 아이들과 손을 잡고 공항 로비를 나섰다. 경주와 영은이 쾰른에 도착했을 때는 석양이 엷게 도심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들은 첫 날 대학 주변에 있는 조그만 2등급호텔에서 묵기로 했다. 그 곳은 경주가 대학원 1학년 때 쾰른으로 유학을 오면서 도착한 첫날 머물렀던 곳이다. 호텔 로비로 들어선 경주는 그 때와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는 것을 보고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여전히 로비 측면엔 모네 의 '해돋이'가 걸려 있었다. 프런트에서 숙박계를 기입한 경주는 이십대쯤으로 보이는 벨보이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갔 다. 경주는 비행기에서 내내 잠을잤던 탓에 좀체 잠이 오지 않았다. 시차 때문이기도 하거니 와 한여름의 찌는 더위 때문에 더욱 잠을 이를 수가 없었다. 경주는 곤하게 잠들어 있는 영은이 깨지 않도륵 살며시 문을 열고 객실을 나왔다. 호텔 로비로 나가 프런트에 서 있던 여자에게 커피 한 잔을 부탁한 후 소파에 앉아 아무 잡지나 집어들었다. 유학을 왔을 때까지만 해도 독일어가 능숙했지만 몇 년째 들여다보지 않은 탓 인지 왠지 낮설어 답답한 구석도 없지 않았다. 경주는 영어를 막 익힌 중학생처럼 더듬더듬 잡지를 읽어 나갔다. 경제에 관련된 용어들 이 많이 보이는 게 한국의 시사 경제지와 비슷한 잡지인 것 같았다. 종업원이 커피를 그의 앞에 놓고는 휑하니 가 버렸다. 새벽녘에 잠이 든 경주는 다음 날 정오가 지나서야 겨우 눈을 뜰 수 있었다. 간단히 샤워 를 마친 그는 베란다의 흔들의자에 앉아 창 밖 풍경에 한껏 매료되어 있던 영은과 식당으로 내려가 커피와 토스트, 달걀 프라이를 먹고 호텔을 나섰다. 대학은 호텔에서 걸어 10여 분 거리에 있었다. 걸음을 옮기던 경주는 멀리서 희미하게 들 리는 동력선의 고동 소리를 들었다. 아마도그 곳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라인 강을 오 가는 배의 고동 소리일 거라 생각했다. 경주는 한국에 돌아가기 전에 대성당과 라인 강을 한 번 둘러볼 생각이었다. 더구나 모든 것을 영은과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이 기뻤다. 경주는 법학과 사무실에 들러 지도 교수였던 슈뢰거 교수를 찾아갔다. 경주는 과 사무실 에서 가르쳐 준 건물로 들어갔다. 교수는 연구실에서 학생들의 논문을 체크하고 있었다. 슈뢰거 교수는 경주를 잘 알아보지 못했다. 그런 교수를 보며 오히려 자신이 그 동안 은 사를 찾아뵙지 못했던 것에 대해 죄송스럽게 생각했다. 경주는 영은을 소개시켰고 교수에게 그동안 자신이 지내 온 얘기를 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했다. 교수는 경주에게 다시 독 일로 공부하러 올 것인지를 물었고, 경주는 아직 결정하진 않았다는 말로 대신했다. 영은에게 슈뢰거 교수는 처음 만난 독일 사람이었지만 친근했다. 그녀는 경주가 어려울 때 도움을 주었던 지도 교수라는 사실만으로도 내심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었다. 교수는 현관까지 경주를 배웅하면서 다시 대학에서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는 말을 안지 않았다. 경주는 독일 거리에 낯설어하는 영은의 마음을 읽었는지 다시 법과 대학에서 나와 캠퍼스 안으로 발길을 옮겼다. 영은은 그의 세심한 배려에 수줍은 소녀마냥 즐거워했다. 본관 건물 은 고딕 양식이 인상적이었고, 넓다란 캠퍼스 주위를 위압하면서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었다. 그 주변을 감싸고 도는 녹색빛 정원에 가득 들어 찬 활엽수들이 바람에 나부끼어 살랑거 릴 때마다 묻어 오는 산뜻한 향기가 영은과 경주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본관부터 학생 회관까지 이어진 작은길에는 무성하게 자란 잔디로 푸르렀고, 예나 지금이 나 그 곳에서는 공연이 열리고있었다. 그들 중에 한 여학생이 첫사랑 아이스크림이라면서 경주에게 하나를 내밀었다. 경주는 먼저 영은에게 아이스크림을 건넸다. "이거 여기서만 파는 첫사랑 아이스크림이래." "그래요? 정말 아이스크림이 특이하네. 어떻게 이렇게 꽃잎하고 똑같이 만들었을까. 정말 보기만 해도 달콤해요." "녹기 전에 빨리 먹어야겠어." 어린애처럼 혀로 핥으며 아이스크림을 먹는 영은을 보면서 경주는 살며시 그녀의 손을 잡 았다. 이튿날 경주와 영은은 베를린으로 가기 위해 서둘러 호텔을 나섰다. 경주는 영은에게 어 젯밤부터 베를린행 비행기에 오르면 독일의 역사에 대해서 얘기해 주려고 했는데 여전히 시 차를 이기지 못한 영은이 자리에 앉자 잠이 들었다. 그들이 베를린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장벽으로 가는 버스가 있어 말로만 듣던 그 곳으로 향했다. 영은은 경주의 자상하고 꼼꼼한 안내를 받았고 잔해가 남아있는 베를린 장벽을 바라보며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이 곳이 45년간이나 분단되었다가 통일될 때 무너뜨린 장벽이에요?" "응, 지금은 하나가 되었지만 통일의 기쁨도 잠시였어. 통일이 되었지만 정치, 경제 그리 고 서민들의 생활 문제까지 이어지다 보니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현실의 문제들이 더 많 은가 봐." "그래도 통일은 돼야 해요." "그렇지, 우리 나라도 빨리 통일이 되어야 할 텐데 말이야." "아무튼 독일 사람들은 대단 한 것 같아요. 과거에 제2차 세계 대전 때의 그 폐허의 도시를 다시 일으켜 세운 훌륭한 민 족이잖아요. 동·서독 갈등쯤이야 곧 사라지지 않을까요?" "이제 보니 당신이 더 독일을 잘 아는 것 같아." 경주의 눈길은 영은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둘은 이젠 흔적조차 찾기 힘든 장벽의 잔해 앞 에서 서로의 어깨에 팔을·두른 채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지나가던 관광객들도 영은과 경주의 모습이 정겨웠는지 그들을 쳐다보며 유쾌하게 걸음을 옮겼다. 한참이나 그 앞에서 넋을 잃고 있던 영은과 경주는 베를린시내로 향하는 관광 버스에 올랐다. 금세 어둠이 자욱하여 사방은 캄캄해졌다. 베를린 시내 구경을 마친 경주는 국제 열차에 몸을 싣고 프랑스나 룩셈부르크쪽으로 떠나려고 했지만 영은이 피곤해하는 것 같아 그럴 수 도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쾰른으로 돌아와 여독을, 뜨듯하게 감싸고 도는 따뜻한 물로 씻어 내고 잠을 청했다. 다음 날 경주는 영은과 함께 쾰른 성당을 거쳐 라인 강변으로 나가 간단히 점심을 먹고 다시 강변로를 산책했다. 경주의 품에 안긴 영은은 혼자말처럼 강물 저 편으로 시선을 고정 시킨 채로 말했다. "아이들하고 같이 왔더라면 좋았을 텐데 ‥‥." 경주는 그런 영은을 보며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영은은 산책을 마치고 호텔로 오자마 자 아이들에게 전화를 했다. 소파 깊숙이 몸을 묻고 신문을 뒤적거렸던 경주에게는 영은이 와 아이들의 대화를 하나도 들을 수 없었다. 전화를 끊고 난 영은은 경주의 옆으로 다가오더니 당장 돌아가자고 했다. 거의 울먹임에 가까운 애원이었다. 하는 수 없이 경주는 1주일을 계획하고 왔던 여행을 단 3일로 만족하고 귀국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 쾰른을 떠나는 걸 아쉬워하며 경주는 검은 빵과 감자칩, 생맥주를 시켜 영은과 독일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내기로 했다. 혀끝으로 와 닿는 독일 맥주 맛이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였다. 시원하게 톡 쏘는 맥주를 마시며 그 동안 가져 보지 못했던 둘만의 여유와 낭 만을 같이 들이켰다. 맥주잔 사이로 보이는 영은의 실루엣이 오렌지빛 전등에 젖어들면서 거품을 따라 가늘게 떨렸다. 경주는 나이트 가운을 벗고 영은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그의 입술은 어느 새 영은의 가 슴을 거칠게 헤집고 있었다 영은도 경주의 몸놀림에 쉽게 익숙해져 갔다. 경주가 영은을 끌 어당기자 영은의 양손이 그의 목을 휘감았다. 둘은 하나로 유영하기 시작했다. 경주의 거친 숨소리가 영은의 입술을 압도해나가자 영은은 가늘게 떨었다. 영은의 가는 신음이 삐걱거리 는 침대 소리에 잠식되었다. 경주의 넓은 가슴으로 느끼는 영은의 우윳빛 살결은 마치 비단 결 같았다. 경주의 혀가 부드러운 영은의 아름다운 살결 위에서 표류를 시작하자 영은은 끝 내 신음을 참지 못하고 속삭였다. "사랑해요." "사랑해." 둘만의 기나긴 사랑은 열린 창으로 불어 오는 미풍을 타고 흘렀고, 그들은 독일에서의 마 지막 밤을 서로를 사랑하는 만큼이나 따뜻하게 보내고 있었다. 경주와 영은은 독일에서 사흘을 보낸 뒤 귀국했다. 예정대로라면 1주일 정도 머물면서 이 곳 저곳 돌아다니려고 했지만, 아이들 걱정으로 가득 찬 영은의 종용으로 계획보다 일찍 귀 국했다. 우영은 경주 내외의 이른 귀국을 내심 반가워하면서도 독일까지 영은을 데리고 가서 예정 보다 일찍 귀국한 경주에게 한마디했다. "남들은 못 나가서 안달이라는데, 마음잡고 한 번 나갔으면 여기저기 구경도 하고 나한테 엽서도 띄웠으면 좀 좋아. 자네가 얼마나 재미 없는 사람인지 알긴 아는 거야?" 그들은 경주네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한 영은은 아이들에게 주려고 독일에서 사 온 선 물을 테이블 위에 꺼내 놓았다. 인형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지영이 테이블 위에 놓인 자신의 선물을 풀어 보고는 좋아서 어쩔 줄 몰라했다. 인형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인형의 얼굴에 입을 맞추며 거실을 뛰어다녔 다. 아직 무언가 딱히 좋아할 줄 모르는 지윤은, 경주가 안겨 준 선물을 포장도 풀지 않은 채로 거실 바닥으로 내팽개쳤다. 제것보다는 언니 것이 탐이 나는지 지영에게 다가가서 인 형을 낚아 채려고 안간힘을 썼다. 지윤은 뜻대로 되지 않자 바닥에 주저앉아 영은을 바라보 며 울상이 되었다. 보다못한 영은은 지윤이 내팽개친 선물 꾸러미를 풀어 인형을 꺼내 지윤에게 주었다. 아 주 조그만 강아지 인형이었다. 문득 영은은 초등 학교 때 경주가 준 진돗개가 떠올랐다. 물 론 지윤이 갖고 있는 인형보다는 훨씬 큰 강아지였지만 인형을 고를 때의 남편 모습을 생각 하니 흐뭇하기까지 했다. 영은이 경주의 손을 잡으며 말했었다. "제가 초등 학교 4학년 때 운동장에서 강아지 쫓아다녔던 일, 당신 기억나요?" "내가 그걸 어떻게 잊겠어. 당신이 이렇게 내 옆에 있지 않았더라도 나는 그 모습을 잊지 못했을 거야." 영은은 경주의 말에 감격이라도 한 듯 경주의 품으로 살포시 안겼다. 전국적으로 폭우가 쏟아졌다. 조금 늦게 저녁을 먹은 경주는 아이들을 양쪽에 앉혀 두고 소파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그는 전화벨이 울리자 여유롭게 테이블로 가서 수화기를 들었다. "네, 잠실입니다." "오빠, 저‥‥‥‥, 승주예요." 승주답지 않게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얘기했다. "그래, 웬일이냐? 그런데 목소리가 왜 그러냐?" "혹흑흑‥‥‥‥." 승주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흐느낌으로 자신의 감정을 대신했다. 순간 경주는 불길한 예 감에 왼쪽으로 대었던 수화기를 오른쪽 귀로 갖다 대면서 재촉하듯 물었다. "승주야. 너 무슨 일 있구나? 현호와 다투기라도 한 거야?" 승주는 구기자 CF를 찍으면서 우영의 후배 현호와 가까워졌다. 경주는 우영에게 승주와 현호 얘기를 전해 듣고 누구보다도 기뻐했다. 일에 치여 제 짝을 못 만나는 것 같아 많은 걱정을 했었기 때문이다. 종종 영은에게도 승주 결혼을 신경 써 보라고 했지만 영은도 딱히 마땅한 사람이 없어 걱 정하고 있던 터였다. 다행히 친한 친구 녀석의 후배라 마음놓고 둘 사이를 환영했던 것이다. 영은이 부엌에서 거실로 나오며 경주 목소리가 전 같지 않게 들렸던지 누구 전화냐고 묻자 경주는 승주의 전화라고 말하며 다시 수화기를 귀로 가져갔다. "승주야, 울지만 말고 얘기를 해야 오빠가 무슨 말이라도 해줄 것 아니냐?" 경주가 달래듯 말을 하자 승주는 감정을 가라앉혔는지 상당히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큰오빠, 지금 목포에 있는 문화 병원이에요. 좀 전에 올라왔는데‥‥." 승주가 수화기를 막았는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경주는 서너 번에 걸쳐 승주를 불 렀다. "큰오빠. 아버지가 사고를 당하셨어. 중환자실에 계신데 아직도 의식이 없으세요. 의사가 가망이 없을 것 같대.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큰오빠, 아버지 어떡하면 좋아. 응?" 승주의 말을 듣고 놀란 경주는 목소리를 떨며 따져 물었다. "아버지가 사고를 당하셨다니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야? 어떻게 된 건지 차근차근 얘기해 봐. 아니다, 내가 빨리 내려갈 테니 침착하게 병원 이름을 다시 한 번 말해 봐. 지금 출발하 면 새벽에는 도착할 수 있을 거야. 건주와 희주는 내려왔니?" "아직 아무도‥‥. 큰오빠, 빨리 좀 와 줘. 나 무서워." 경주는 승주가 불러 주는 병원의 위치를 자세히 메모한 뒤 옆으로 바짝 다가앉은 영은을 보며 입을 열었다. "여보, 지금 나 목포로 내려가 봐야 빨 것 같아. 아버지가 사고를 당하셔서 중환자실에 계 시다는데 의사 말로는 가망이 없다고 그랬대. 의사 말이 믿겨지지가 않아. 그리고 믿고 싶지 도 않고. 내가 직접 가서 확인을 해 봐야겠어. 우선 혼자 다녀올테니까 걱정 말고 기다리고 있어." 영은의 눈은 금세 눈물이 맺혔다. 경주는 영은의 눈물을 닦아 주면서 말했다. "지금 출발해야 하니까, 대충 준비 좀 해 줘 당신은 여기서 애들하고 있다가 내가 연락하 거든 내려와. 너무 걱정은 하지 말고.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돌아가실 아버지가 아니니까" 경주의 눈은 벌써 빨갛게 충혈 되어 있었다. 영은은 안방으로 들어가 간단히 옷가지들을 챙겨서 나왔다. 가방을 든 경주는 현관을 나서려는 영은을 문 안으로 떠밀고는 문을 닫아 버렸다. 영은은 하는 수 없이 베란다로 나가서 아파트 현관을 빠져나가는 경주의 뒷모습을 힘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영은은 경주의 모습이 사라지고 난 뒤에도 한참이나 베란다에 서 있다가 칭얼대는 지윤의 목소리가 들리자 거실로 들어갔다. 지윤을 안아 방에 눕힌 후, 텔레비전 앞에서 떠날 줄 모 르는 지영을 달래 방으로 보내고서 안방으로 들어왔다. 영은은 침대맡에 있는 전화기를 보면서 진도로 전화를 해 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리 고 침대에 주저앉아 경주가 목포에 닿을 시간을 헤아려 보았다. 늦어도 새벽 3시 전에는 닿 을 듯 싶었다. 경주는 큰 길로 나서자마자 택시를 잡아 타고 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목포로 내려가는 차 는 30분 후에야 있었다. 경주는 가만 있지를 못하고 터미널 안을 계속 서성거렸다. 얼마 후 개찰구 문이 열리자 경주는 승차권을 직원에게 내밀고 바쁘게 버스에 올라탔다. 승객은 고작 열 명 안팎이었다. 운전사 바로 뒷좌석으로 앉은 경주는 의자를 젖힐 생각도 않고 꼿꼿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창 밖을 바라보는 경주의 눈가에 눈물이 방울져 있었다. 차가 목포에 닿았을 때에야 자신이 잠시 졸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버스가 동광주를 지나 올 때까지 깨어 있었으므로 나주나 무안쯤에서' 잠이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경주는 버 스·에서 내리기가 무섭게 택시 승강장으로 성큼 다가섰다. 바로 택사가 그의 앞으로 와서 섰다. 경주는 앞좌석에 앉은 다음 기사에게 병원 이름을 말하면서 다급한 상황이니 되도록 빨리가 달라고 부탁했다. 기사가 그런 그에게 궁긍하다는 투로 물었다 "상당히 급한 일이 생기셨습니까?" 기사가 정중하게 물었음에도 그는 기분이 상했다. "아니오. 아무 일도 없습니다." 경주는 딱 잘라 말했다. 기사에게 화가 난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그런 상황에 있었을 때 아무것도 모르고 늦게서야 움직이게 된 자신이 무척이나 원망스러웠다. 기사는 경주의 심정 을 이해했는지 더 이상 묻지 않고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병원은 버스터미널에서 채 10분도 안 되는 거리에 있었다. 경주는 급하게 만 원짜리를 내 밀고는 바로 병원 현관으로 뛰어들어갔다. 현관 입구를 지키고 있던 간호사에게 중환자실의 위치를 묻고 간호사가 가리키는 곳으로 달려갔다. 중환자실은 복도 끝의 막다른 곳에 있었다. 뛰어오는 경주를 본 승주가 중환자실로 들어 가려는 경주를 붙들었다. "승주야, 아버지는?" "위층 수술실에 계셔. 큰오빠, 지금은 면회가 안 돼. 우리도 여기서 4시간째 기다리고 있 는 거야." 경주가 서 있는 가족들을 보며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이 조그만 동네서 뭘 어떻게 해 보겠다는 거야. 사람 목숨이 둘도 아닌데, 아니다 싶으면 빨리 광주 대학 병원으로라도 이송했어야지." 책망하듯 승주를 바라보며 경주는 흥분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옆에서 보고 있던 김제 댁이 나무라듯 경주에게 말했다. "경주 니가 사고가 얼마나 중혔는지 몰러서 그럴 것이여. 여기꺼정 실려 온 것도 다행이 었제." 경주는 눈물을 글썽이는 깅제 댁의 말에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수술실로 금방이라도 올라 갈 기세였다. 경주는 안 되겠다며 수술실로 향했고 짙은 초록색 가운을 입은 집도의가 수술 실에서 나왔다. 안경을 쓴 의사의 표정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뒤로 몇 명의 수술 팀 의사들이 땀으로 흠뻑 젖은 두건을 벗으며 따라나왔다. 수술을 진행하고 난 집도의가 가 족들에게 머뭇거리다 말을 했다. "운명하셨습니다." 경주는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수술실 문을 박 차고 들어가 조심스럽게 흰 천을 걷어올렸다. 믿겨지지가 않았다. 가족들은 바닥에 주저앉아 흐느끼기 시작했다. 싸늘하게 식어 버린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몇 번 흔들어 보았으나 아무런 기척도 없으셨 다. 경주는 그제서야 아버지의 죽음이 실감나는지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큰아들 경주가 이렇게 왔어요. 아버지 제발 눈 좀 떠 보세요, 네?" 경주는 목이 터져라 아버지를 불렀지만 아버지는 경주의 목소리를 일부러 외면하는 것 같 았다. "죄송합니다. 저희로서는 최선을 다했지만 사고가 너무 컸습니다." 집도의는 무척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버지, 아버지 눈 좀‥‥‥‥." 승주는 얼음장 같은 아버지의 손을 붙들고 흐느꼈다. 아버지를 향한 오누이의 눈물은 아 버지의 가슴께로 촉촉히 젖어들고 있었다. 혼절해 버린 어머니 곁에서 바닥이 꺼질 듯한 설 움을 내뱉던 김제 댁이 경주에게 다가와 말했다. "아이고 시상에나 이를 어짜 쓸꺼나. 혀도 너무혀요, 워째 이런 날배락이 다 있겄소‥‥. 그래도 우덜이 이라고만 있으믄 예가 아니제." 김제 댁은 침대 곁에 주저앉아 있던 경주를 일으켜 세웠다. 그제야 경주도 상황 판단이 된 듯 자신의 양복 저고리를 뒤지기 시작했다. 너무 급하게 오느라 핸드폰을 챙기지 못했는 지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경주는 왼쪽 모퉁이에 있는 공중 전화로 발길을 옮겼다. "여보세요, 여보‥‥‥." "아, 여보시모. 상원리 이남섭 씨 댁이니 거 말쏭하시오." "저, 병줍니다." 경주의 음성은 굴곡을 이루며 가늘게 떨고 있었다. "아이고, 이 변호사구만. 나 이장이네 그려." "이장님, 아버지께서 방금 운명하셨습니다." "‥‥." "저, 이장님 !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곁에서 경주를 보고 있던 김제 댁이 답답하다는 듯이 수화기를 빼앗아 들었다. "이장님이요? 지금 여그서 어르신네 모시고 갈랑께 눈비 좀혀 주쇼이." "알았응께 여그 걱정은 말고, 조심히들 내려오쇼이." 그러고 난 후 가족들은 병원을 나섰다. 앰뷸런스가 상원리 집에 도착한 것은 2시간 후였다. 동네 사람들은 경주네 마당 한가운데 를 가로지르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승주 회사 사람들과 마을 청년들은 이장 의 지시에 따라 바쁘게 몸을 움직였다. 경주는 이장과 함께 장례 절차를 상의하며, 침착하게 일을 추진해 나갔다. 경주의 마음을 헤아린 이장은 자신이 준비해놓은 장례 절차들을 경주에게 설명해 주었다. 이장과 상의가 끝난 경주는 먼저 아버지의 시신을 안방으로 조심스럽게 모셨다. 벌써 농협에서 가져다 놓 은 상복으로 갈아 입은 경주는 상제들좌 수시를 하였다. 경주는 아버지를 안방으로 모시는 수시가 끝나고 병풍 앞에 놓인 아버지의 영정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어느 새 마을 청년회에서는 호상소를 마련하고 마루 곳곳에 삼삼오오 짝을 지어 장례에 관한 준비를 하나씩 진행해 가고 있었다. 이장은 승주회사 사람들과 상의하여 부고를 이미 띄우고 조객록을 마련해 놓았다. "장지는 선산으로 허실 꺼제?" 이장이 경주에게 물었지만 꼭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고집이그의 목소리에는 배어 있었다. "예, 그렇게 해야죠." "다행이구만. 나도 그렇게 알고 면사무소에 매장 허가 신청을 허라고 일렀네 그려." "그렇게까지 신경을 써 주시니 그저 감사합니다." 경주는 자신보다 집안일을 속속들이 알아서 처리해 나가는 이장이 미더울 뿐이었다. "그란디 말일세, 선산이 좁은 농로를 지나야 되닝께 영구차는 큰길에 세워 두고 상여꾼들 은 우리 상원리 청년회에서 맡을라고 허는디‥‥." "그래 주시면 저야 좋죠." 경주는 당연하다는 듯 대답을 했다. "글씨, 남섭 형님이 순직이라고 혀서 군청에서 직원들을 보내 낭여꾼을 짜 준다고 허는디 말이여, 내가 그냥 거절해 부렀네. 상여꾼으로는 우리 상원리 사람들이 최고가 아니랑가. 돌 아가신 형님도 그것을 원헐 것 같고 혀서 말이여." "예, 그렇게 하세요." 경주는 마치 이장이 자신의 마음 속을 읽는 것만 같았다. 호상소 가득히 향불 내음이 고개를 들고 아버지의 죽음을 서러워하고 있었다. 마당으로 속속들이 들어서는 문상객들을 맞이하던 경주와 승주에겐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허락되지 않았다. 호상소 안의 조문객들과 마주한 채 엎드려 예의곡을 하는 남매에겐 손발 이 저려올 틈도 없었다. 아버지는 요즘 군에서 추진 중인 방파제 작업장에 나가서 이슥해질 때가 되어야 돌아왔 다. 고향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남보다 단 몇 분이라도 먼저 부지런히 움직이셨다. 아침이면 멀리 해남까지 차를 끌고 가서 그 곳 산에서 채굴한 자갈들을 싣고 공사장까지 가져가는 것이 아버지의 일과였다. 여름철 논농사는 살충제를 뿌리고 나면 거의 일이 없었 으므로 종일 방파제 부근에서 보냈다. 사고를 당하던 날 오후 4시로 접어들면서부터 제법 굵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아버지는 평소보다 이른 시각이었지만 집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차가 방파제와 상원리 중간정도에 이 르자 전방 1미터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폭우가 쏟아졌다. 아버지는 신경을 곤두세워 앞을 주시했지만 빗소리가 하도 커서 마주오는 차의 클랙슨 소 리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아버지는 시력이 나빠진 지 오래여서 촉각을 곤두세우고 운전 을 했지만 얼마 후 끽 하는 소리와 함께 정신을 잃은 것이다. 방파제 사업이 한창이었기 때문에 근방에는 평소에도 대형트럭 행렬이 끊이지 않고 계속 되었다. 그런데 그 날 맞은편에서 오던 트럭이 빗길에 미끄러지면서 아버지의 차를 받자 곧 바로 우측 논으로 곤두박질을 친 것이다. 트럭 기사는 중상을 입긴 했지만 생명이 위태롭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의 차는 형태 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찌그러져 아버지를 꺼낼 때에도 트럭의 천장과 측면을 전기톱으로 분리하여 가까스로 빼낼 수 있었다. 급히 인근 해남 병원으로 옮겼지만 상태가 심해 그 곳에서는 치료할 수가 없어 다시 앰뷸 런스로 목포까지 이송되었다. 어머니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침까지만 해도 멀정하게 집을 나섰던 사람이 하루 아침에 그렇게 싸늘한 시체로 돌아온 것을 보니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허망하게 저 세 상으로 발걸음을 돌려 버린 남편은 아무 말도 없었다. 평생을 남들처럼 별나지 않게 묵묵히 흙에서 살아온 것처럼 갈 때도 흙으로 그렇게 돌아간 것이다. 영은은 우영과 함께 아침 일찍 진도로 향했다. 운전을 하는 영은에게 우영이 말했다. "힘드실 텐데 제가 운전하는 게 어떨까요?" "이게 무슨 힘든 일이라구요. 저는 괜찮아요." "아니에요, 제수 씨. 한숨도 못 자고 애태우셨을 텐데 제가 운전할게요." 우영이 떠밀다시피 하여 운전을 하고 있던 영은을 뒷좌석에 태웠다. 그들이 상원리에 도 착했을 때 집 안은 어수선했다. 각처에서 보낸 조화들이 속속히 배달되었고, 동네 아낙들이 장례 준비를 위해 저마다 부엌과 천막이 쳐진 마당을 바삐 오가고 있었다. 영은과 우영은 도착하자마자 상복으로 갈아 입고 호상소 안으로 들어섰다. 우영은 상복을 입고 호상소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쑥스러웠지만, 경주와는 한 형제처럼 지내고 있는 그 들의 우정을 익히 알고 있는 어머니와 이장의 끈질긴 권유로 우영은 호상소 앞에 경주와 나 란히 엎드렸다. "아버님, 아버님‥‥‥." 영은의 곡소리는 그칠 줄을 몰랐다. "흑흑흑, 아버님 ‥‥. 이제 살으실 만하니까 가시다니요, 저희는 어떡하라구요." 어린 나이에도 맏며느리로서 가족의 고통을 한몸에 안고 살아온 영은은 갑작스런 시아버 지의 죽음이 믿겨지지 않았다. 평생을 땅밖에 모르며 노동으로 고생만 하다가 결국은 저 세 상으로 발길을 돌려 버린 시아버지였지만 영은은 여지껏 단 한 번의 노여움을 본 적이 없었 다. 그 태풍 같던 세월을 다 이겨 내고 서서히 익어 가는 결실들을 보며 인생의 황혼기를 맞 이해야 할 분이셨는데 그것을 느낄 겨를도 없이 가신 것이다. 무엇보다 5년이란 그 기나긴 시간 동안 그녀는 남편과 헤어져 시아버지의 울타리 안에서 살았다. 그 자애롭고 따사로운 울타리를 그녀는 결코 잊을 수 없었다 그렇게 극진하게 녹을 하던 영은은 두 번의 실신을 하고 나서야 겨우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 영은을 달래던 시어머니는 미어지는 명치께를 쓸어 내리며 말했다. "그래, 큰아그밖에 웁다. 이 어린 것이 그 한 많은 세월 서방웁시 우덜이랑 그라고 의좋게 살었제. 그 고상 다 혀도 허튼소리 않고 그저 시아부지 존경함시롱 을매나 극진이었냐. 내 니맘 다 안다." 소매 끝자락으로 영은의 얼굴을 닦아 주면서 시어머니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려, 그려 더 실컷 울어라. 우리 며느리 효성이 으짠디, 느그 시애비도 저승에서 니 보 고 울 것이구만. 그럴 것이여." 문상객들 또한 영은의 곡소리를 듣고 절로 고개를 숙였다. 이장이 호상소 안으로 비집고 들어와 경주에게 입관 준비가 끝났음을 알렸다. 그러나 경주 는 형제들이 모두 오거든 입관을 하자고 말하자 옆에서 듣고 있던 김제 댁이 못마땅한 표정 을 거두지 않고 말했다. "아니 보거라. 그 사람들이 왔으믄 진작 와 부렀제. 은제 올 줄 알고 먼 길 떠날 사람, 채 비를 이라고 늦춘단가." "아닙니다. 동생들이 곧 오겠죠. 먼 길 오느라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다들 갑작스런 연 락 받고 오다 사고라도 나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오히려 동생들을 걱정하는 경주의 깊은 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김제 댁은 극구 입관을 늦춰서는 안 된다며 다시 그를 채근했다. "아니여, 동생들 위헌다고 기다려 주는 것도 좋제만 입관은 시간이 있는 것이랑께." "그래라, 지금 입관혀야 쓰겄다." 김제 댁의 말에 동조하듯 어머니가 거들었다. "예, 어머니." 경주는 대답을 하고 나서도 연신 대문 쪽을 쳐다보았다. "즈그들이 와 부렀으면 벌써 왔제. 내가 시숙님 사고 터지고 바로 갸들한테 연락혔는디. 몇 번이나 전화를 혔는디도, 먼 일인디 늦는다냐." 김제 댁이 속상한 듯 입을 다물지 못했다. 좁은 식견이지만 장례 절차를 조금 알고 있었던 경주는 그제야 입관하기 전에 치러야 할 염사가 걱정되었다. "그런데 당장 염사를‥." "그 걱정일랑은 말랑께. 군에서 제일로 잘 허는 염사 어르신이 벌써 오셨응께." 이장은 경주에게 안심시키며 말했다. 그들이 입관을 위해 호상소 안에서 막 나서려 할 때 대문에서부터 혼절에 가까운 곡소리 가 들려 왔다. "아이고, 아버지, 우리 아버지‥‥‥‥." 민주와 정 서방이었다. "오빠, 어떡해. 우리 아버지, 아버지 불쌍해서‥‥‥‥." 민주는 경주의 품으로 쓰러져 울 음을 그칠 줄 몰랐다. "인자는 됐다. 니들 형제들끼리 입관혀라. 더 늦추은 예가아닝께." 어머니는 잘 다듬어진 수의를 염사에게 건네며 경주에게 일렀다. 염사는 아버지를 깨끗하게 씻어 내며 속옷과 수의를 입히고 입과 귀를 명주솜으로 막았 다. 염습이 마무리되자 입관을 위해 영은과 경주가 조용히 잠든 아버지의 곁에 나란히 섰다. 민주와 정 서방은 상복으로 갈아 입고서 승주와 우영의 옆으로 다가앉아 곡을 하기 시작 했다. 돌아가신 분이 관 속에서 흔들리지 않도록 이장과 염사가 조심스럽게 관 벽에 마포를 채 워 나갔다. 그런 다음 경주에 의해 아버지의 시신이 관 속으로 뉘어지자 더 더욱 곡소리가 높아졌고 애가 끓었다. "아이고 아버지, 아버지‥‥‥." "아이고, 당신 혼자 가시믄 어쩌자고 그라요‥‥." 염사가 관상 명정을 쓰고서 장지로 싸고 노끈으로 결관을 했다. 눈앞에서 결관이 진행되 자 곡소리는 더 높아졌다. "아버지, 아버지. 아아 ‥‥." 그런 끓어오르는 곡소리 속에서 정성스럽게 입관은 끝났다. 입관이 끝나자 염사는 병풍을 잘 쓸어 관 벽 앞에 가려 세웠다. 정결하리만큼 깨끗한 병풍 앞에 아버지의 사진을 안치하 고 촛불과 향을 피어 올렸다. 향불은 경주의 머리를 타고 아스라이 퍼져 나갔다. 김제 댁이 영좌 앞에 놓인 탁자 위에 술잔과 과일을 차렸고, 경주는 그 앞에 엎드려 분향 을 했다. 아버지를 잃은 설움에 민주, 승주, 영은이 눈물을 거두지 못하며 관을 끌어안고는 오열을 토했다. 마지막으로 우영이 술잔을 따라 영좌 앞에 내려놓았다. 이장이 이마로 흘러내리는 구슬땀을 소매 끝으로 훔쳐내며 염사에게 고생했다는 말을 건 넸다. 호상소에는 구릿빛 얼굴인 촌로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아버지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표정들이 역력했다. 비명에 간 아버지였지만 언젠가는 자신들도 아버 지처럼 떠나야 한다는 씁쓸함에 젖어 있었다. 천명을 다하지 못하고 비명 횡사한 아버지였기에 그들의 슬픔은 더했다. 아버지는 한낱 평범한 촌부였지만 세상을 등지기 전까지도 부지런한 농자였고 건실한 농군이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논으로 나서면 새벽이었고, 그가 밭도랑을 나와야 이슬이 맺히곤 했던 것이다. 마을에서는 아버지가 시계나 다름없었으며 떠오르고 지는 해이기도 했다. 그리고 밤을 알리 는 영롱한 별빛 같은 존재였다. 이잰 그들의 공간 속에 더 이상 아버지는 없다. 다시는 볼 수 없기에 그들의 아쉬움과 그리움은 더 했다. 그런 아버지를 애도하는 조문객들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가운데 점심 때쯤에 군청 직원들과 군수가 호상소 안으로 들어섰다. 군수는 분향을 마치고 고인의 영좌 앞에 엎드려 일어설 줄을 몰랐다. 군수 옆에 같이 앉 아 예를 갖추던 직원이 손에 들려있던 서류 봉투를 꺼내어 군수에게 건네자 그는 그 서류 봉투를 한 손에 든 채로 상주인 경주의 손을 잡으며 마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상주님, 뭐라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 "작지만 아버님께 군민의 뜻을 모아 군민 표창이라도 추서할까 합니다." "‥‥‥." 여전히 경주는 말이 없었다. 그런 경주의 답답한 태도에 군수는 애원조로 다시 경주의 손 을 부여잡으며 말했다. "받아 주십시오." "그럼, 고맙게 받겠습니다." 경주는 그들의 뜻에 동의하는 게 아버지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군수와 직원들이 고인의 영좌 앞에 군민 표창을 반듯하게 세워 놓고 절을 했다. 뒤에 서 있던 문상객들이 고개를 떨구었다. 군수와 직원들이 대청마루에 마련해 놓은 깡으로 자리를 옮기자 다시 호상소 안으로 조문객들이 속속들이 들어섰다. 문상객이 영좌 앞에서 분향을 마칠 때마다 상주의 곡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조문객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노을이 서쪽 하늘로 빨리듯 사라져 갔다. 대문 밖으로 가로등이 켜져 마을 회관을 따라 길거리에는 불빛이 하나둘씩 늘어 갔다. 마당에서는 주황빛 백열 전구 사이로 마을 부녀자들이 문상객들을 맞이하느라 저녁도 잊 고 쉴새없이 음식을 들고 이리저리 부산하게 움직였다. 어느 새 대문 앞 공터에 펼쳐 놓은 멍석에까지 조문객들로 가득 찼다. 한 무리의 조문객 들이 대문을 빠져 나가자 희주 내외가 마당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곧 이어 지역 유지들과 섞여 건주 내외가 아이 손을 잡고 호상소 안으로 들어섰다 건주와 희주 내외는 호상소 주위에서부터 설움을 토했다. 1들은 영좌 앞에 엎드려 절을 하며 고개를 들지 못했다. 경주는 그들의 팔을 잡아 일으키며 상복을 건네 주었다. "오느라고 고생 많았다. 제수 씨도 고생이 많았습니다." "예, 형님." 참으로 슬프디슬픈 목소리였다. 형제들과 함께 한 승주는 다시 끓어오르는 설움을 이기지 못하고 오열을 토해 냈다. "아이고 아버지, 우리 아버지‥‥‥‥." 자식들이 서러워하는 모습을 남산 댁은 말없이 바라만 볼 뿐이었다. 영은은 동서들에게 먼길 오느라 고생했다며 따뜻하게 맞이했다. "아이고, 아버님. 아버님‥‥‥." "영은이 호상소 안에서 그칠 줄 모르며 울자 옆의 동서들도 따라 울었다. 오늘따라 별빛마저도 어제 그리도 쏟아지던 그 빛줄기도 어디론가 사라진 채 아픔을 새긴 몇 점의 별빛만이 하늘을 부유했다. 자정이 넘은 시간까지도 마을 사람들과 먼 곳에서 찾아온 조문객 몇몇이 어울려 화투판을 벌려 시끌벅적했다. 그리고 호상소 안에서는 비명 횡사한 아버지의 원을 달래기 위해 진도 의 씻김굿이 행해지고 있었다. 아쟁과 피리가 선창으로 울려퍼지고 굿판의 징소리가 아버지 의 죽음을 대신하여 분통해하듯 밤 하늘을 가로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사람들이 호상소 주위로 씻김굿을 보기 위해 널따란 멍석 귀퉁이까지 발디딜 틈도 없이 모여들었다 상갓집은 새벽 닭이 울 때까지 마을 사람들이 자리를 지키며 상주들과 술판을 벌이는 게 내려오는 전통이므로 경주를 비롯한 형제들은 그러한 동네 사람들의 노고를 나눌 셈으로 호 상소 안을 지켰다. 그리고 경주와 민주 내외는 대청마루에서 이장과 함께 내일 장례식에 있 을 장의 행사를 상의하고 있었다. 그렇게 의지하며 정겨운 자식들을 바라보던 어머니는 눈 물을 떨구며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그려, 느그들 믿고 느그 아부지는 편히 갈 것이구만." 호상소를 들락거리던 김제 댁은 호상소 안에서 보이지 않던 셋째와 넷째 며느리가 2층에 서 잠자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영은을 나무랐다. "워따메, 동서를 시키제 먼 일을 큰며느리 혼자서 헐라고 그런다냐. 어쩌면 그라고 속이 진득혀다냐." "놔 두게, 큰애가 다 알아서 하닝께‥‥‥‥." "다 남편하기 나름이제라. 경주하는 거 보쇼이. 누가 요즘시상에 살꽃 같은 각시를 시골집 에 3년씩이나 묻어 둔다요. 다 지 하기 나름이지라. 시숙님은 갔어도 경주네는 복 받을 것이 어라." 김제 댁은 콧물까지 뚝뚝 떨어뜨리며 남산 댁을 펴다보았다. "그려, 누가 아니랑가." 남산 댁이 슬피 우는 김제 댁의 손을 잡으며 호상소 안으로 들어섰다. "우리 승진이 각시가 성님 큰며느리 반이라도 닳어야 허는디‥‥‥." 김제 댁은 영은의 정성에 감동하듯 발길을 옮기면서 울음을 삼켰다. 날이 새자 마을 청년회에서는 농협에서 가져온 상여를 사색종이꽃들로 단장하기 시작했 다. 상여가 제법 모양을 갖추기 시작하자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씩 마당으로 몰려와 선지국 에 만 국밥을 훌훌 삼키며 상여 나갈 채비를 했다. 이장이 나타나자 상여꾼들은 먹는 것을 멈추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어이들, 차질 없게 잘들 허라고!" 이장이 상여꾼들을 향해 목청을 돋구었다. "예." 상여꾼들의 듬직한 목성들이 마당 가득히 울렸다. "천광할 사람들은 산에 다 올라갔겄제. 개토 고사 준비랑 선산 고사 준비는 다 해 갖고 갔는가이?" 이장의 말이 떨어지자 한 청년이 그에게로 달려왔다. "벌써 준비해서 청년회 트럭으로 올라갔구만이라." "횡대하고 지석은 다 싣고 갔단가?" 이장이 확인하듯 다시 물었다. "벌써 풍수 어른이 확인허고 산으로 가셨어라. 염려안 하셔도 되겄어라." "자, 그럼 얼른 꾸미고 푸짐하게 챙겨 묵고 가 보세." 이장이 청년들을 흡족한 얼굴로 바라봤다. 발인은 상원리의 전례대로 열렸다. 아버지의 영구가호상소에서 옮겨져 안치되고 영구 옆 으로 명정이 세워진 채 제상 위로 영좌와 위패를 모셨다 이장이 앞서서 촛대에 불을 켜고 향로께 향을 피웠다. 면사무소에서 나온 직원이 호상이 되어 영결식 순서를 말해주었다. 호상의 말에 따라 영 결식은 시작되었다. 그것으로 호상소 안에서 아버지와 마지막 만남이 되었다. 상제들이 나란히 영정 앞으로 다가서서 재배를 했다. "애고, 애고‥‥‥‥." "애고, 애고‥‥‥‥ 아버지. 아버지‥‥‥‥." 상제들의 곡은 그칠 줄을 모르고 계속되었다. 그들은 서러운 아버지의 길을 곡으로라도 반질하게 닦고 싶었던 것이다. 그들의 곡은 서로 뒤엉켜 아침 하늘로 솟구쳤다. "아버지, 우리 아버지, 아버지‥‥." "시숙님, 시숙님, 인자 참말로 시숙님이 가신단 말여라. 시숙님." 김제 댁이 영정 앞에서 고꾸라지며 곡을 쏟아 놓았다. 발인에 참석한 사람들은 아버지가 가는 길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이승과 저승이라는 생판 다른 길이기에 더욱더 그랬다. 호상이 면장에게 조사를 일렀다. 면장은 영 좌앞에 쭈그리고 앉아 조사를 읽어 내려갔다. 조사 오늘 농군의 스승이신 이남섭 님의 영결식에 엄숙과 존경심이 부족할까 두려운 마음으로 이 지역의 모든 촌로들이 모여 임의 가심을 슬퍼하며 삼가 영전에 고개 숙여 명복을 비옵니 다. 어이하여 그리도 바쁘시게 가셔야만 한답니까. 이제 임의 춘추 이순이 중반이건만 우리 농토에 못다하신 일 그리도 많으실 텐데, 그 정 열 여기에 두시고 떠나셔야만 한다니 대농군을 잃은 우리들의 슬픔과 설움이 끊이지 않아 무어라 마음 달랠 길이 없습니다. 임께서 일평생 걸어오신 농자로서 가르쳐 주신 근면과 성실은 후세에 영원히 빛날 것이지 만 임이 떠나시는 걸 보니 농토를 빼앗긴 아픔보다는 그 천 갈래 만 갈래 슬픔이 떠나지 않 습니다. 중략 임의 영화가 무궁무진할진대 그 입신은 누구에게 다 주시고 가셔야만 한답니까. 임이야말로 애향심의 표본이고 지역 발전의 공헌이시며 진정한 농군이었습니다. 천직이 농군이셨지만 그 고결한 인격과 높으신 교육열은 이 시대의 상징이요, 으뜸의 거울이되어 있습니다. 임께서 그토록 정을 다해 애써 뿌리신 씨앗들은 이제 거룩하게 자라 지역의 선도자가 될 것이며 나아가 국제화 물결의 주인으로 설 것입니다. 임이시여 진정 가시나이까. 가시더라도 우리의 농토를 잊지 말아 주시고 영겁 세월영광을 누려 저 세상에서는 편히 잠드소서. 우리 지역민과 다함께 촌로들이 힘을 모아 마지막 고별인사 드리오니 임아. 임아, 부디 안 녕히 가십시오. 1997년 7월 29일 지역민 대표 군내면장 이장이 운구를 알리자 상여꾼들이 상여를 들쳐 메며 저마다 제자리를 찾아 섰다. 그리고 폭청 좋은 부녀 회원 한 명이 선창으로 상여가를 늘어놓았다.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지는 상여가는 설움 그 자체였다. 상여가 마을을 한 바퀴를 돌아 정자나무 아래에 이르자 동네아낙네들이 선산까지 따라 나 서겠다는 어머니를 만류하며 집으로 데려갔다. 여전히 상여의 뒤를 따르는 영은은 목놓아 울었다. "아버님, 우니 아버님! 아버님‥‥‥‥." "아버지, 아버지! 막내딸 두고 어디까지 가세요, 아버지!" "애고, 애고‥‥‥‥." 경주는 상여에 바짝 붙어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 내는 영은의 손을 잡으며 얼굴에 엉겨 붙 은 머리카락을 떼어 주었다. 영문도 모른 채 동네 아낙네의 등에 업혀 뒤따르던 지윤은 영은의 울음 소리에 놀라 아직 도 잠이 덜 깬 눈으로 울음을 터뜨렸다. 상여는 밝아 오는 새벽 빛 속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장이 상여 소리가 못마땅한지 앞 소리꾼을 다른 부녀자로 바꿨다. 흔히 상가에 가면 상주들을 웃겨 주는 문상이야말로 고인 의 길에 꼭 필요한 문상객이라는 소리가 있는 것처럼, 그렇지 않아도 침통한 장례식장에서 상주들이나 조문객들을 상심시키는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장은 이미 연륜으로 알 고 있었던 것이다. 마이크를 받아 든 앞소리꾼은 꽹과리 장단에 맞춰 목청을 있는 힘껏 돋구었다 앞소리꾼이 목청을 높이자 상두꾼들이 뒷소리를 받아 이어 갔다. 에헤헤∼ 에에이 간다간다 나는 간다 너를 두고 나는 간다 대궐 겉은 저 집일랑 누를 맡기고 간단 말삔고 에이히∼ 어어히∼ 에에헤 에이 넘어∼ 에헤헤∼ 에이 넘어 사람이라 내가 가면 일평생을 내 못 살고 에이에이 너후넘차너후 에이히∼ 어어히∼ 에에헤 에이 넘어∼ 에헤헤∼ 에이 넘어 얼씨구 내 못 살고 황천 길이 웬말이오 에오에오 에이넘차너후 너후너후 에이넘차너후 동네 청년 상두꾼아 안 간 친구 호상꾼아 에이너호 에이엄차너후 너후너후 에이넘차너후 이제 가면 언제 보나 가지 못할 길이거나 에이히∼ 어어히∼ 에에헤 에이 넘어∼ 에헤헤∼ 에이 넘어 저승길 올라 서고 동네 이장 나는 가네 에이히∼ 어어히∼ 에에헤 에이 넘어∼ 에헤헤∼ 에이 넘어 저승 사자 하라는데 꼼짝없이 나는 가네 에이히∼ 어어히∼ 에에헤 에이 넘어∼ 에헤헤∼ 에이 넘어 불쌍혀라 째 며늘아기 어느 누가 보살필고 아첩라∼ 아헤이∼ 어어라 아혀라∼ 아헤이∼ 어어라 시집 못 간 내 딸 두고 이 때 저 때 다 보낼 걸 에이히∼ 어어히∼ 에에헤 에이 넘어∼ 에헤헤∼ 에이 넘어 잘 있그라 잘 있그라 우리 아들 잘 있그라 에이히∼ 어어히∼ 에에헤 에이 넘어∼ 에헤헤∼ 에이 넘어 이승 구경 다 못 허고 저승에야 나는 간다이 너후너후 에니넘차너후 불쌍헌야 우리 부모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에이히∼ 어어히∼ 에에헤 에이 넘어∼ 에헤헤∼ 에이 넘어 명년이라 춘삼월에 꽃 피거든 오실라요 에이히∼ 어어히∼ 에에헤 에이 넘어∼ 에헤헤∼ 에이 넘어 제사 때나 내가 와서 이내 너를 만내 볼까 에이히∼ 어어히∼ 에에헤 넘어∼ 에헤헤∼ 에이 넘어 상여가 상원리 어귀를 벗어나자 이장은 경주와 상의한 대로 상여꾼들을 트럭으로 옮기고 관을 영구차로 안치한 다음 장지로 향했다. 영구가 장지에 도착하자 풍수 어른의 지시대로 하관을 하였다. 묘에 떼를 다 입히자 풍수 어른이 상주들을 성분 앞의 영좌로 앉혔다. 그러고는 큰상주인 경주에게 축문을 건네 주었 다. 축문을 두 손으로 받아 든 경주는 인기 시작했다. "아버님 영전에 삼가 고하나이다. 오늘 우리 선산에 아버님 유택을 마련하였사오니 모든 이승의 시름일랑 모른 채로 고이 잠드시고 길이 명복을 누리옵소서." 경주의 축문이 끝나자 묘소 앞에서 서러운 울음들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아버지! 아버지‥‥. 우리 아버지‥‥‥‥." "아버님! 아버님!" 풍수 어른이 이르는 대로 반혼 고사를 마치고 이장은 상주들을 부축하여 선산을 내려왔 다. 순직이라는 이름으로 아버지의 죽음은 작은 빛을 보긴 했지만 그래도 가족들은 실의에 빠 지지 않을 수 없었다. 장례는 삼일장으로 치르고, 호상이 아니었던 관계로 다른 곳보다 그 곡이 더 애통하게 들렸다. 무엇보다 자식을 먼저 보내야만 했던 할머니는 거의 실성한 상태로 몇 번씩이나 혼절을 거듭하셨다. 할머니에서 넋을 놓고 말씀하셨다. "나가 끌려갈 것을 갸가 잽혀 간 것이여 . 이 종잇장 겉은 목숨이나 데불고 갈 것이제 어 먼 사람을 데려가 부렀어. 아이고 아이고."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을 마을 사람들은 평온하기만 한 집안을 귀신이 시샘해서 그렇게 된 거라고 말했다. 경주는 다시 혼란에 빠졌다. 그가 세워 놓은 일상의 큰 부분이 그렇게 맥없이 무너져 버 릴 줄 그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경주는 다시 앞으로의 계획들에 대해 심사숙고 해야만 했다. 그는 다시 대학 강단으로 돌아가고 싶어 생각할 시간을 갖기 위해서 변호사 사무실을 휴업한 상태였다. 그런 찰나에 아버지가 운명을 달리하신 것이다. '아버지, 당신이 평생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일궈 낸 흙으로 돌아가시기 위해 그렇게 살 아오신 겁니까? 저희 다섯 남매 아버지 앞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아 버지, 살아 생전 왜 그리 억척스럽게 고생만 하시다 가셨습니까? 당신이 편하게 몸 한 번 안 놀리시고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원통할 뿐입니다. 보상 받기 위함이 아닌 줄 알지만 지 금부터라도 아버지를 대신하여 큰아들 경주가 그 자리를 지키겠습니다. '흙 냄새, 땀 냄새가 요동을 치는 아버지의 다 낡은 황색 점퍼, 왼쪽 발꿈치가 다 헤어진 볼품 없는 운동화, 밭에 나갔다 돌아오실 때면 저녁 찬거리 채소들을 한아름 담아 오시던 구멍난 고무 다라이. 이 모든 것들이 아버지를 생각나게 하는 것이었지만, 어머니께서 죄다 쓸어모아 불살라 버리셨고, 그 옆으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 위로 아버지의 영혼이 슬프게 떠돌아 다니는 것만 같았다. 할머니는 연신 그 곁을 떠날 줄 모르고 아랫도리를 폭 감싸 안고 쭈그 리고 앉아 계셨다. "남섭이 보내면 안 된다, 안 돼 떡두꺼비 겉은 아들 낳았다고 울 시아부지가 그리도 날 예뻐하시지 않았겄냐 우리 아들내 놔라 어이‥‥." 할머니는 그 때서야 목놓아 우셨다. "엄니, 퍼뜩들어가셔라. 감기 걸린단께요. 엄니 맘다 아닝께 들어가쇼이, 엄니이." 어머니도 결국 꾹 누르고 있던 억장이 무너졌는지 할머니를 꼭 껴안고 서럽게 우셨다. 영 은이가 껴우 지영이와 지윤이를안 방에 재워 놓고 나와 어머니를 거들었다. 어머니는 눈물 을 한 번에 쓱 문지르고는 영은에게 일렀다. "큰아야, 인자 할머니 모시고 들어가라 느그 할머니 편찮으시면 니만 더 걱정 아니냐? 느 그 시아부지 옷가지는 내가 버려야 한단께. 내 말 알아듣겄냐." "예, 어머니." 자리에서 꿈쩍도 않으시던 할머니도 손주 며느리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경주는 12월에 있을 승주의 결혼준비에 정신이 없었다. 아버지가 안 계셨기 때문에 신경 쓸 부분이 더 많았다. 막내 승주의 결혼식을 잘 치러야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도 맘 편하게 눈을 감으실 수 있을 것 같았다. 경주는 대부분의 시간을 진도에서 보낼 수밖에 없었다. 서울에 혼자 있을 영은과 두 딸아 이를 생각하면 못할 짓이었지만 승주의 짝을 못 지어 주고 떠나신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씁 쓸한 마음을 달래야만 했다. 승주는 수화기를 들 힘조차 없었다. 아버지가 떠나시고 난 뒤 다른 사람을 생각할 힘도, 여유도 남아 있지 않았다. 승주의 이런 마음을 읽었는지 현호가 마음먹고 연락을 했다. 승주 아버님의 사망 소식을 우영으로부터 먼저 들어 알고 있긴 했지만, 결혼을 허락 받은 것도 아니었고 자신을 승주 집에 알리기엔 이른감이 있다고 생각한 뒤 오히려 한발뒤로 물 러서 있던 현호였다. 우영이 현호에게 승주가 힘들 때 옆에 있어주라고 기띔을 해 주었지만 현호는 그렇게 하면 승주가 부담을 느낄까 봐 그렇게 하지 않았다. 승주는 아무 생각 없이 누워 있는데 느닷없이 호출기가 울려댔다. 머리맡에 있는 자줏빛 전화기를 힘들게 잡아 당겼다. '승주 씨, 저 내일 오후에 진도로 내려갈게요. 진작부터 가고 싶었는데 어른들께서 당황하 실 것 같아서 이제껏 서울에서 가만히 있다가 지금에야 연락하네요. 기운 내고 식사 거르지 말아요. 참 저 휴가 받아서 1주일 정도 여유가 있어요. 승주씨, 출발하기 전에 연락할게요.' 사려 깊은 현호는 쉽게 행동하지 않는 분별력이 있는 남자였다. 두 사람의 만남이 깊어진 건 CF를 찍으면서부터였다. 현호가 승주를 사랑하게 된 이유는 승주의 당당한 모습 뒤에서 느껴지는 여린 여성스러움 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사랑하는 고향을 자신도 같이 공유하고 싶었다. 집안에서 장낭인 현호는 승주의 얘기를 얼핏 듣고 서둘러 식을 올리자고 했고, 어머니도 승주가 적은 나이는 아니어서 흔쾌히 허락하셨다. 승주와 현호가 나란히 집으로 인사를 하러 오던 날 어머니는 그저 '제 애비가 저 모습을 봤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얼굴을 가슴에 묻고 한참을 우셨다. 12월 28일 토요일 오전 11시 진도 읍내에 있는 예식장에서 결혼 행진곡이 울려 퍼졌다. 많은 하객들의 축복 속에서 승 주는 새로운 인생을 맞이하게 되었다. 경주의 손을 잡고 입장하던 승주는 흘러내리는 눈물 을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그녀는 가족 사진 촬영을 하면서 비어 있는 아버지의 자리를 바라 보며 눈물을 흘렸다. 승주와 현호는 식이 끝나고 바로 신혼 여행으로 설악산을 향해 떠났다. 마침 그 곳에 콘 도가 있던 경주는 승주에게 설악산을 권했고 승주도 흔쾌히 그 곳을 택했다. 경주는 자신이 군대에 있을 때 보았던 겨울의 설악산을 떠올리면서 그들 부부도 겨울의 설악산처럼 희고 아름답게 살기를 바랐다. 그들이 진혼 여행을 떠나고 난 뒤 승주네 집은 몰려든 하객들로 정신이 없었다. 실로 오 랜만에 사람 사는 집처럼 떠들썩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더욱 신병이 악화되었던 할머 니도 그 날만큼은 마루로 나와 찾아오는 사람들을 반기면서 가끔씩 마을의 노인분들과 얘기 도 나누셨다. 경주네 딸 둘 그리고 민주네는 아들 하나 딸 하나, 건주는 아들 하나로 세 집 모두 합해 다섯이었다. 아이들은 역시 아이들이었다. 1년에 거의 한 번이나 만날까말까 하는 아이들이었지만 금 세 친해져서 저희들끼리 밖으로 나가기도 하고 때로는 마루 한쪽에 올망졸망 앉아서 음식을 먹는 모습들이 사뭇 살갑게 다가왔다. 그런 아이들을 지켜 보던 경주는 뜻밖의 방문을 받았다 안방에서 바다 농산물 사람들과 술잔을 주고받던 경주는 어머니가 나와 보라고 하자 들었던 술잔을 내려놓고 밖으로 나갔 다. 경주는 자신을 찾아온 사람이 다른 사람도 아닌 조일도 검사임을 알고 놀라지 않을 수 없 었다. 경주는 놀란 표정을 감추며 그를 맞았다. 경주는 조금은 서툰 몸짓으로 조 검사와 악 수를 하고 2층 승주의 방으로 올라갔다. 승주의 방은 아직 그대로였다. 아마도 언제까지나 그럴 것이다. 그것을 승주가 원했고 무 엇보다 어머니가 방을 치우는 것을 몹시 아쉬워했기 때문이다. 경주는 영은에게 저녁상과 간단히 마실 것을 내오라고 하고는 조일도와 마주 앉았다. 담 배를 물던 일도는 재떨이가 없는 것을 날고 담배를 입술에서 거뒀다. 그것을 눈치챈 경주가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재떨이를 가져왔다. 일도는 다시 담배를 물고 불을 붙여 깊숙이 한 모 금 빨아들였다." 담배만 문 채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는 일도에게 경주는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꼭 둘이 다시 법정에 선 것처럼 왠지 모를 긴장감까지 감돌았다.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 에 입을 열었다. 경주가 손짓으로 먼저 말하라는 표시를 해 보였다. 일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동생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하네." 그 말이 전부였다. 경주는 일도의 행동이 조금은 의심스러웠다. 동생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일부러 여기까지 자신을 찾아올 리는 만무했다. 뿐만 아니라 그 당당했던 모습은 어디 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몹시 초췌해 있었다. 그 때 상이 들어왔다. 상을 받아 든 경주 는 영은에게 술을 부탁했다. "반주로 하게 구기자주라도 가져다 줘." 경주는 일도에게 어서 들라는 말과 함께 오른손을 상 위로 올려놓았다. 일도는 마지못해 숟가락을 들었다. 경주도 이전에 술을 마셨던 터라 밥 생각이 없었지만 예의상 숟가락을 들었다. 일도는 다 른 반찬은 거의 입에 대지 않고 단지 굴을 넣어 끓인 찌개에만 몇 번 숟가락을 대었을 뿐이 었다. 일도가 수저를 놓자 경주는 그를 향해 말했다. "시골 입맛이라 안 맞더라도 좀 들어요. 빈 속에 몸도 안 좋은 것 같은데 술부터 마시면 좀 고생하겠습니까." 경주의 말에 일도는 다시 수저를 들었다 경주도 공기의 반은 비워 냈다. 식사가 거의 끝 나갈 무렵 이번엔 민주가 술상을 가져왔다. 경주는 동생에게 수고로움을 주는 것이 미안했 다. "왜 지영이 엄마가 안 올라오고 네가 올라오니. 몸도 무거운 사람이." 민주는 셋째 아이를 임신 중이었다. 산달이 두 달 정도 남아 있어서 배가 불룩했다. "언니는 지금 오빠 사무실 사람들 안줏거리 만들고 있거든요. 그래서 제가 대신 올라왔 요." "경주는 밥상을 옆으로 치우고 술상을 그들 앞으로 놓았다. 그는 잔을 일도에게 건네면서 술이 든 주전자를 들어 올렸다. 일도는 손을 올려 두 손으로 잔을 받았다 다홍빛의 구기자주가 투명한 잔을 타고 흘러내 렸고 무엇보다 그 향기가 일품이었다. 입에 가져가기도 전에 녹아 버릴 것만 같았다. 경주가 단번에 잔을 비웠다. 일도 역시 잔을 비운 다음 전을 하나 집어 오물거리며 먹었다. 경주는 이쯤에서 여기 온 이유를 말하라는 듯 일도를 빤히 쳐다보았다. 일도도 경주의 눈 빛이 원하는 걸 알고 있었는지 입을 열었다. "오늘제가 이 형을 찾아온 특별한 이유는 없소. 단지 이 형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 고, 동생 결혼식이 있어 진도로 내려갔다는 이 형 사무실 사무장의 말을 듣고 이렇게 찾아 온 것뿐이오." 경주는 더 난감해졌다. 조일도가 아무 용건 없이 단지 자신을 만나기 위해 이 곳까지 내 려왔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전과는 분명 자른 모습이었다. 경주는 일도의 잔을 채우면서 자신의 잔도 마저 채웠다. 그러고는 잔을 들어 한 번 권하 고 살짝 입만 대고는 잔을 내려놓았다. 경주는 찰게 핏발이 선 일도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지난 정순은 사건 때 자신을 검사실에서 실컷 모욕했던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두번의 인연을 가졌던 일도와 경주는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말처럼 한동안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에서 만났다. 일도는 담당검사로 그리고 경주는 가해자 측 변 호인으로서 다시 대면하게 된 것이다. 결국 끈질긴 법정 공방끝에 경주가 무죄를 이끌어 냈 고 그로 인해 경주는 실력 있는 변호사로 인정 받을 수 있었다. 경주는 좀 전에 입만 대고 놓아 버린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가 잔을 비우자 이번에 는 일도가 주전자를 들어 그의 잔을 채워 주었다. "사실 나도 그제부로 검사직을 그만뒀소. 아직 결정은 안 했지만 나도 이 형처럼 변호사 를 해 볼까 생각 중이오." 경주와 일도는 우연하게도 담당 검사와 변호사로 두 번씩이나 만났다. 둘은 동시에 그 날 의 법정 안에서의 대결을 떠올리고 있었다. 두 사람의 법정 논리는 날카로웠고 한 치의 양 보와 틈새도 주지 않았다. 일도는 사건의 유지를 위해 안간힘을 썼고 경주는 피고인의 이익 으로 방어막을 쳤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에 대한 불신의 감정보다는 서로의 법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법 논 쟁에만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다. 일도 역시 '검찰의 꽃' 이라는 수사 검사로서 법률 지식이 해박했고 그 계통에선 선두 주자로 발판을 내딛고 있던 중이었다. "이 사건의 공소 사실대로 피고인을 형에 처해 주십시오." "모든 증거와 정황으로 볼 때 피고인에게는 무죄가 선고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정당한 논리로 싸웠던 것이다 "아니 어렵게 올라간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와 버리다니요. 조검사님답지 않게‥‥. 우리가 사실 법정에서 숙적으로 만났고 결국은 제가 승소를 했지만 조 검사님 같은 인재도 검찰에 서는 쉽게 찾아보기 힘든 게 사실 아니겠습니까?" 사실 그랬다. 경주는 일도가 과거에 자신을 모욕했던 일은 있었지만 그래도 그의 주도 면 밀하고 빠른 업무 진행과 몸으로 뛰는 모습은 누구보다 인정하고 싶은 사람이었다. 경주의 말에 일도는 고개를 내저으며 잔을 들었다. "제가 처음 검사가 되던 날, 아버지는 너무도 좋아하셨죠.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훌륭한 법조인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런데 지방 공무원들의 비리를 조사하면서 아버지가 그들과 연루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얼마나 부끄럽고 창피하던지‥‥ ‥‥." 경주는 그의 말을 듣고 사뭇 놀랐다. 다시 잔을 비운 일도가 말을 계속했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이 형도 진도 사람이더군요. 제가 중학교와 고등 학교를 마칠 때까 지 아버지는 이 곳 산림 조합장으로 계셨죠. 하지만 갖은 협잡과 뇌물로 아버지의 공무 수 첩은 얼룩져 있었죠. 산림 조합장이라는 보호막으로 치졸하게 권력을 휘두르신 아버지였어 요. 나는 사건을 맡을 때마다 그 죄책감에서 벗어나질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패기로 넘치는 이 형을 만나게 된 거죠." 말을 마친 일도는 잔을 거두고 벽에 기댔다. 기댈 곳이 벽밖에 없었는지 그는 벽에 바짝 등을 밀착시켰다. 2주일 전 일도는 아내와 이혼을 했다. 아내가 못마땅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아내를 보면 일도는 자신의 숨통을 조여 오는 죄책감에 벗어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내는 제재소를 운 영하던 유 사장의 셋째 딸이었다. 진도에서부터 그런 불법적인 관계로 친분을 쌓아 오던 일 도의 부친과 유 사장은 일도의 아버지가 진도를 떠나고 난 후에도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일도의 집에 자주 왔던 유 사장은 언제나 일도를 귀여워했다. 더군다나 그가 6년 전 사법 시험에 합격을 하면서 유 사장은 그를 사위로 삼으려는 마음을 굳혔다. 그래서 어른들끼리 말이 오가고 일도는 유 사장의 딸과 5년 전 결혼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검사로 근무하면서 그런 아버지와 유 사장 간의 치졸한 행적들을 알게 되었고, 더군다나 그로 인해 선량한 사 람을 죽음으로까지 몰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도저히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삭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내와 이혼수속을 밟은 후 그는 사표를 제출하고 진도로 향한 것이다. 사실 사무장에게서 승주의 결혼 소식을 들었다는 것은 모두 지어 낸 말이었다. 일도는 이미 이틀 전 이 곳 상원리로 향하던 읍내 버스에서 아낙네들의 얘기를 듣고서야 그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 상원리에 도착한 일도는 조심스럽게 승진 아버지의 산소를 물어 산비탈을 올라갔다. 가쁜 숨을 내쉬며 산을 오르는 그의 셔츠는 흠뻑 젖어 있었다. 묘지는 잔디가 깨끗이 단장되어 있겄고, 봉분 주위는 화강암으로 둘러져 있었다. 일도는 들고 온 소주와 오징어, 사과와 배를 꺼내 봉분 앞에 내려놓고는 소주 한 잔을 따 라 놓았다. 재배를 한 일도는 잔을 봉분 위로 뿌리고 자신도 몇 잔을 연거푸 들이마셨다. 그 러고는 쓰러지듯 묘지 앞으로 무릎을 꿇은 그는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아저씨 저희를 용서하십시오. 아니 용서는 못 하시더라도 원수 자식의 소리 한 번 들어 주십시오. 그 더러운 돈으로 호의호식한 놈을 좀 내려다봐 주셔야 합니다. 저는, 저는‥‥." 일도는 그 곳에 엎드려 날이 저물 때까지 술인지 눈물인지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소주를 마셨다 벽파진의 푸른 물결이 거칠게 일렁이며 일도의 눈물을 대신해 주었다. 그리고 오늘 에야 경주의 앞에 모습을 보인 것이다. 그렇게 어제의 일을 떠올리면서 벽에 기댔던 일도는 갑자기 경주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런 일도의 갑작스런 행동에 당황한 경주는 일도를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조 검사님, 이게 무슨 짓입니까? 손아랫사람에게 무릎을 꿇다니요. 취하신 것 같습니다. 곤하실 텐데 이젠 그찬 주무시는 게 좋겠습니다." 경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일도는 눈물을 흘리면서 경주에게 애원하듯 용서를 구했다. "이 형, 이 형은 제가 중학교 시절 명찰을 짓이기면서 차에 오르던 그 아이란 것을 모르 고 있습니까? 제가 그 때 얼마나이 형을 무시하면서 돌아섰습니까. 게다가 지난번 정순은 사건 때도 저는 무턱대고 당신을 모욕 했었죠. 제 눈의 티끌을 보지 못하는 무매한 사람이 바로 저였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용서를 구합니다." 경주는 일도의 말에 당황했지만 일도의 그 간절한 눈빛과 거의 잠길 듯한 목소리에는 참 회가 가득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경주는 엎드린 일도를 일으켜 세웠다. "조 검사님이 저에게 용서를 구할 것이 있다면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엎드려 있던 일도가 눈물로 범벅된 얼굴을 들며 다시 건조하게 잠겨 버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는 정말로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 형께서 진심으로 용서해 주셔야 제가 이 자리 에서 물러날 수 있습니다." 경주는 울어서 한껏 부은 일도의 핏발 선 눈을 바라보면서 다시 말했다. "조 검사님께서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을 저는 결코 생각 없이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사 실 이런 상황에서 제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저도 난감합니다. 저는 조 검사님께 유감 같은 것을 지운 지 오래입니다. 검사님, 이제 우리는 법조계를 함께 짊어지고 나가야 할 사람들이 아닙니까. 저는 지난 과거를 다 잊었습니다. 그러니 조 검사님도 그 죄책감에서 벗어나셨으 면 합니다. 우리 이제 새롭게 시작하는 겁니다." "이 변호사는 법조인이기 전에 정말 훌륭한 가족의 기둥인것 같습니다. 나에게도 여동생 이 셋이나 있지만 누구 하나 이 오빠를 따라 주는 동생이 없습니다. 사실 3일 전이 제 부친 의 생신이었지요. 그러나 동생들은, 오기는커녕 천화 한 통도 없었어요. 그렇게 쓸쓸히 말로 를 보내는 아버지를 보면서 저는 가슴이 미어져 왔습니다. 아버지를 빼 닳은 저를 여동생들 이 증오하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다 아버지와 장인과의 관계 때문이지요. 가족 하나 제대로 돌보지 못한 제가 부끄럽습니다." "힘 내십시오, 조 검사님." 경주의 말을 들은 일도는 다시 고개를 묻으며 더 이상 할말이 없다는 듯이 옆으로 고꾸라 져 곤한 잠에 빠졌다. 큰오빠 경주가 완전히 고향으로 내려온다는 소식에 동네 사람들은 벌써부터 신작로에 모여 경주 의 효심을 칭찬하고 있었다. 마을 청년회에서는 '축, 이경주 고향 흙에 살다!' 라는 플래카드를 전봇대와 전봇대 사이 에 걸어 놓고 경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문을 가로질러 큰 마당 안은 경주가 돌아오는 지금이나 예나 변함이 없었다. 사랑채 앞 쪽으로는 젓갈을 담아놓은 묵직한 장독들이 길게 늘어서 있고 그 앞쪽에는 한 줄로 작은 고 추장 항아리가 몇 개 놓여 있었다. 항아리 사이사이에는 크기가 제각기인 약탕기들이 올망 졸망 있어 평화로움을 한층 더해 주고 있었다. 전부 할머니와 어머니께서 일일이 식구들의 입맛에 따라 곱게 해 놓으신 것들이었다. 언제나 할머니는 식구들의 입맛을 돋우기 위해 가 장 한국적인 식품들을 정갈한 손 맛으로 손수 빚으셨다. 장독대 뒤쪽에 버팀목처럼 서 있는 몇 개의 우람한 대독은 아마도 이 집안의 장남인 경주 의 먹거리를 위해 담아 놓은 독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 맛을 같이 느끼며 영은도 종갓집 의 사랑과 전통을 배우는 행복을 느껴 온 지도 어느덧 여러 해가 지났다. 경주 집 마당의 구석구석마다 가득 배인 풍요로움은, 숨쉴 틈도 없었던 도회지에서는 한 번도 볼 수 없는 여유로운 광경이었다. 경주의 집은 시골 전경을 그대로 담아, 본채 두 칸과 사랑채 세 칸으로 맞배지붕을 한 넉넉한 집이었다. 감나무 곁에는 백구의 형제들이 서로 장난치며 놀고 있었다. 그 감나무는 경주가 반장에 선출되었을 때 반 아이들과 이장이 축하하는 의미에서 심어 놓은 것이었는데 그것이 대문만 큼이나 크게 자라 있었다. 마당 왼쪽으로 자리잡은 감나무와 우물 사이에는 할머니가 경주의 건강을 바라는 뜻에서 구기자밭을 개간할 때 매일매일 하나씩 가져온 돌들을 여러 개 쌓아 탑을 이루고 있었다. 할머니가 그렇게 쌓아 놓은 돌탑은 벌써 수천 개가 넘어 보였다. 할머니는 대청마루에서 햇볕을 받으며 손자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영은이 운전하는 차 안에서 경주는 아이들과 노느라 정신이 없었다. 오랜만에 아버지와 아이들이 쉴새없이 즐거워하는 모습이, 영은에게는 행복이었다. 창 밖의 가로수들이 한층 빛 나 보이고 지나는 차들도 그들의 웃음을 시샘하는 것 같았다. 영은은 백미러를 통해 보이는 경주의 장난기 많은 소년 같은 표정을 보고 미소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차가 만남의 광장을 지나자 아이들이 피곤한지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들었다. 경주는 잠이 든 아이들을 의자에 살며시 뉘고는 고사리 같은 손목을 잡고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당신, 그렇게 좋으세요?" 영은이 생글생글 웃으며 물었다. "나보다 당신이 더 행복해하는 것 같은데?" "그래요. 전 지금 너무 행복해요. 당신이 제 곁에 있고 우리의 사랑스런 아이들이 있으니 까요. 그나저나 할머니가 무척 기다리시겠어요." "우리 마을에서는 아마도 할머니께서 제일 점잖고 멋지실 거야. 할머니가 우리 마을초대 부녀회장이셨던 거 당신도 알아? 우리가 고향 발전을 꿈꾸며 돌아가는 것도 할머니의 가르 침이 크다고 할 수 있어. 고등 학교 때 방학이 되면 할머니는 언제나 나를 시골로 데리고 가서 고향에 대해 많은 것들을 얘기해 주시곤 했지 내가 소를 몰고 방천 둑에 나가면 어느 샌가 할머닌 파전을 부쳐 그 곳까지 내오셨어. 또 시냇가의 새싹들을 가리키며 생의 푸르름 을 말씀하시곤 하셨지. 생의 푸르름이 서서히 자취를 감추기 전에 공부가 다 끝나면 고향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여유도 가져야 한다고 그러셨지. 낙엽이 지면 또 이듬 해 봄에 새순이 돋듯이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지만 사람은 자연처럼 되돌아갈 수가 없어. 나이가 들면. 옛 추 억에 잠겨 그것을 떨치지 못한 채 자식이나 손자들이 자기의 인생을 대신 살아 주기를 바란 다고 하셨어. 그것은 인간이면 누구나 바라는 절박한 바람이지. 할머니도 마찬가지셨을 거 야." 경주는 창 밖으로 눈을 돌렸다. "당신 머릿속엔 온통 고향뿐이에요." 영은의 말에 경주는 멋쩍어하며 시선을 영은에게 돌렸다. "당신은 정말 잘 해 낼 수 있을 거예요. 변호사할 때의 절반정도만 해도 일등 농군이 되 겠죠?" 영은은 믿음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말했다. "농촌 일이 그렇게 쉽진 않을 거야. 이미 계획은 몇 번이고 수정하여 확인했지만 최선을 다해야지. 버림받은 농촌을 일으키는 게 지금 나의 계획이야. 농촌을 잃으면 자존심을 잃는 다고 아버지가 항상 말씀하셨어. 열악한 농촌을 살려 내야지. 그나마 승주의 구기자 농장에 서 동네 부녀자들이 소득을 올리고있다니 다행이야 이렇게 되기까지 우영이가 많이 도와 줬 어. 녀석이 내가 고향으로 간다니까 온갖 농촌 관련 자료들을 챙겨 주고 검토까지 해 줬지. 어쩌면 그 녀석이 나보다 더 잘 할것 같아. 무엇보다 농촌의 발전이 .가장 먼저라고 생각해.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지만 내 고향 농촌을 아끼는 마음에서 사법연수원 시절부터 외국 농 촌 자료를 연구해 놓았으니 계획에 큰 문제는 없을 거야. 우영이가 사회부 기자답게 농촌 발전 조사를 많이 했더라구. 우리 농촌도 재정 자립으로 생활의 리듬을 찾아야 해. 눈 감고 아웅하는 식의 어리석음으로 남을 괴롭히는 세상이지만 자고로 땅은 그렇지 않아." 경주는 거의 확신에 찬 목소리로 똑똑히 말했다. "당신은 한 가지 목표를 이룬 것만 보더라도 대단히 많은 일을 해 낸 거나 다름없어요." "주민 소득 사업을 늘리기 위해서는 내가 갈 길은 아직 멀었어. 농촌이 일어설 방법은 얼 마든지 있어. 최종적으로는 국제경쟁력에 대비해 수출을 늘리는 것이 목적이지. 현재의 농촌 실정과 정부의 지원도 아쉽지만 그 안에서도 지역 특성을 살린 다양한 지역 개발 프로그램 이 얼마든지 있지. 논이나 밭만 바라보고 추곡 수매나 채소 생산에만 만족한다면 그 끝은 불을 보듯 뻔해. 첨단 화훼 원예 생산 시설과 종묘생산을 통한 병리 연구소 등을 갖춘 대규모 수출 농업 단 지를 조성하면 환경 변화와 소득 증대가 그리 어려운 일만은 아니지 . 서남 해안의 특화 요 충지로서 진도는 공항, 항만, 운송 체계를 갖출 가능성이 아주 많아. 아직 그 흙 속의 진주를 군민들이 찾지 못하고 있는 거야 캐내야 할 자원이 무한하다는 걸 모르는 거지. 문제는 그런 계획과 추진이 없었다는 거야. 진도는 특수한 지역이야. 육지 와 바다로 연결된 보배의 고장인데도 그걸 십분 활용하지 못해 군민들이 줄어들고 있고. 자 꾸 수도권으로 올라가 다른 직업을 가지려고 하지만 그 때마다 고향 사람들을 보면 안타까 운 마음뿐이야." "당신이 하는 일이라면 저 역시 끝까지 믿고 따라갈게요." "고마워. 이순 줄에 접어든 아 버지가 논에 나가시는 것을 보시며 할머니는 물가에 어린 자식 내놓는 표정이셨지. 이제 그 자리를 내가 채워 드려야 해." "맞아요, 남자란 무릇 아픔도 이겨 나가야 한다고 아빠가 그러셨어요." 경주의 생각은 언제나 그랬다. 자신의 어려움을 다 이겨 내고 그 인생의 고비고비에서도 농촌을 개발하겠다는 의지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는 자신보다 남을 먼저 걱정하고 보살펴 온 사람이었다. 가족과 고향을 버리고 출세한다는 것은 결코 떳떳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경주는 다짐 했다. 자신만은 힘없는 마을 사람들을 위해 그들이 힘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 주겠다고 생 각했다. 경주가 오래 전부터 키워 온 이런 생각들은 우영을 감동시켰고, 우영 역시 그 뜻을 높이 사 농촌 개발에 대한 계획을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그리고 경주는 우영의 도움으로 이 미 특산물 개발에 대한 타당성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경주는 농업의 발전 없이는 결코 선진국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농업은 첨 단 기술을 바탕으로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복합 산업으로서 절대 필요한 것이다. 지금의 농공 단지 정도로는 가내 농업 수준에 머물 뿐 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선진 농업 기술과 소비자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환경 농업 기술 개발을 확립하고 농민들이 보다 쉽고 편하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우수한 농기구의 개발이 필요했다. 진도 특유의 쌀과 고장의 특성을 살려 소비자와 직접 연결시킬 수 있다면 고소득을 올릴 수 있고, 그렇게 되면 고향을 떠났던 사람들이나 타지방 사람들이 들어와 한창 때였던 15만 군민 시대를 열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일일 생활권인 진도는 광주와의 4차선 확장 공사로 목포권, 해남권과 연결되어 있어 농수산물 물류 센터를 설립하는 계획까지 서 있었다. 진도의 명예와 전통을 살려 대학을 설립하고 지역 자녀들의 문화 공간과 재능을 계발할 수 있는 제도를 단계적으로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고품질 농·수·축산물 상품을 진도 특산 물로서 개발할 수 있을 것이다. 경주는 이렇듯 목표가 분명했고, 이제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 는 일만 남았다. 경주의 폐업으로 법조계에선 파장이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경주는 선배 법조인들의 만류 에도 불구하고 뜻을 굽힐 수가 없었다. 그것은 법조계뿐만 아니라 지역 사회에서도 놀라운 뉴스 거리가 되었다. 한쪽은 아쉬움, 다른 한쪽은 희망이 넘치는 기다림으로 경주를 맞이했던 것이다. 할머니의 지속적인 애원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경주 자신이 더 바랐던 일이었다. 지역민의 성원, 다시 고향을 위해 무언가를 해 보고 싶었던 경주의 심산이 맞아떨어져 그는 변호사 생활을 정리 하고 낙향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아내 영은의 격려가 모든 것을 가능하게 도와 주었다. 진도로 내려오자 경주는 승주와 같이 바다 농산물의 공동 사장으로 취임했다. 그리고 전에 한동안 발간되었다가 폐간된 '옥주 신문' 의 취지를 이어받아 격월로 나가는 '옥주 소식' 이라는 얄팍한 군민지도 창간했다. 낙향한 경주는 변호사 시절보다 더 분주하게 손수 트럭 까지 몰며 뛰어다녀야만 했다. 변호사 이경주가 아닌 진정한 농군의 자식으로서 농민들의 애환과 고향 발전에 온갖 힘을 기울였던 것이다. 경주가 농촌발전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동안에도 학계에서는 돌아오라고 했지만 조금도 흔들림 없이 삽과 괭이를 든 손에 더욱더 힘을 주었던 것이다. 경주는 농촌과 지역 경제 발전을 위한 일이라면 밤잠을 설쳐가며 일을 했다. 경주는 비옥 한 고향의 땅에서 생산되는 쌀과 특산물들을 국내외 사람들에게 직접 팔기 위하여 군농민으 로 구성된 단체들과 또한 특산물 생산자들의 뜻을 모아 '농촌 발전 협의회'를 창설하였다. 그는 이것을 이끌어 가며 진도 내에'전국 특산물 5딜 장터'를 개설해 서남 해안을 찾아오는 관광객과 일부러 특산물 5일 장터를 찾는 소비자들에게 싼 가격으로 생산자와 소비자에게 만족할 만한 가치를 주었다. 열악했던 지역의 재정 자립도 경주의 주관으로 시작된 5일 장터에 전국 농산물 유통 매장 이 서고, 자리를 잡아 진척을 보이자 농민들에게는 크나큰 힘이 되었다. 이제 완전하게 경주 는 농군의 후손으로 자리잡기 시작했으며 지역 발전에 선두주자가 된 것이다 우영은 핸들을 꺾어 법과대 쪽으로 차를 몰았다. 10여 년 전과 거의 다를 바 없는 캠퍼스 를 차창으로 내다보며 우영은 옛생각을 더듬었다. 단지 그 시절 캠퍼스를 헤매고 다니던 자 신과 그 때의 동기들만이 그 풍경에서 물러났을 뿐 그 무엇도 변한 게 없었다. 핸들을 잡고서도 옛 추억에 젖어 있던 우영은 문득 불에라도 데인 사람처럼 급하게 브레 이크를 밟았다. 횡단 보도를 건너려던 한 여학생을 하마터면 칠 뻔한 것이다. 등허리로 식은 땀이 흘렀다. 여학생에게 미안하다고 하자 그 여학생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한번 웃어 보이 고는 가던 길을 가버렸다. 우영은 자신이 그 곳에서 이방인이 되어 버렸다는 느낌을 받았다. 조심스럽게 핸들을 돌려 법과대 앞에 차를 대었다. 미리 전화를 해 보니 토요일이라도 김 선배는 연구실에 나온다고 했다. 우영은 요즘 들어 사시 합격 인원을 늘리는 일에 대한 일 반의 의견과 학계의 의견들에 대해서 취재하고 있은 중이었다. 무엇보다 모교에서 합격 인 원이 가장 많았으므로 취재하기에 가장 적당한 곳이라고 판단해, 오랜만에 김 선배에게 그 간의 변화라도 물어 보려고 학교를 찾은 것이다. 현관에 들어서자 정면 벽면에 건물 배치도가 커다랗게 붙어있었다. 김 선배의 연구실은4 층 맨 끝방이었다. 늦여름이었지만 건물 자체가 정남향이어서 햇볕이 한참 쏟아질 시간이었다. 그래서인지 3 층을 올라설 때부터 겨드랑이로 땀이 스멀스멀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몇몇 연구실은 방문 을 아예 열어 놓고 있었다. 삐걱대는 선풍기 소리가 정겹게 들렸다. 꾸밈없는 학생 때의 소 박한 맛이 물씬 풍겨 왔다. 김 선배의 연구실도 문을 열어 놓고 있어 노크할 필요가 없었다. 우영이 연구실 안쪽으로 열려 있는 문을 두드리자 창문을 향해 앉아 있던 김 선배가 고개를 돌리며 일어섰다. "어, 박 기자. 시간 한 번 정확한데? 역시 기자 양반들은 다르군." 김 선배는 반가운 표정을 지으면서 우영에게 자리를 권했다. 자리에 앉았던 김 선배가 일 어나 음료수를 가져왔다. "이거 냉장고가 빈해서 가실 만한 게 별로 없네. 미안하군." 우영은 웃으며 음료수를 단번 에 마셨다 김 선배가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청첩장을 우영에게 건넸다. 모시는 글 저희 두 사람이 지나쳐 온 세월을 넘어 평소에 아껴 주신가족과 친지, 은시님, 선후배님을 모시고 혼인식을 조촐하게 올리려고 합니다. 바쁘시더라도 저희들의 결혼식에 참석하시어 자리를 빛내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아 래- 일시 : 1998년 11월 00일 오후 1시 30분 장소 : 나주시 금천 초등 학교 운동장 신랑 이경주, 신부 배영은 드림 "이 친구가 드디어 결혼식을 올리는구만." 김 선배가 너무 늦은 감이 있는 경주의 결혼식을 두고 우영에게 말했다. "그 녀석도 참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죠. 이제 그만하면 조금 고삐를 늦추면서 보통 사람 하는 것처럼 살 때도 됐죠 뭐." "그런데 결혼식장이 서울도 아니고 나주라서 좀 불편하겠는 걸 참 알다가도 모를 녀석이야. 몇 년을 여기서 뿌리 내려놓고는 결혼식은 굳이 왜 그 곳에 서 하려고 고집을 피우는지 모르겠어." "영은 씨 고향이 나주잖아요. 영은 씨가 어머니도 안 계시고해서 부득이하게 그쪽에서 하 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역시 녀석은 다르다니까 벌써 애처가 다 됐어." 우영은 취재는 뒷전으로 미루어 두고 본격적으로 경주에 대해 얘기할 태도였다. "영은 씨와의 사랑을 되새기기 위해서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초등 학교에서 치른대요. 더 재미있는 건 신혼 여행을 바로 진도로 간대요. 요즘 사람들 유럽은 못 따더라도 동남아 권은 가려고 다들 극성인데 제 고향 생각하는 마음이 요즘 사람 같지 않다니까요. 진도 구 기자 밭이라니 더 재밌지 않아요? 이 시대의 마지막 애향인이라니까요. 중앙 방송은 몰라도 지방 방송에서는 꽤나 뉴스 거리가 될 얘기죠. 하긴 경주는 유명 인사에 끼니까 어쩌면 눈 치 빠른 기자들이 취재 약속을 받아 놓았을지도 모르죠." 김 선배는 우영에게 담배를 권하며 자신도 담배를 물었다. 한 모금 빨아들인 후 그는 말을 꺼냈다. "멋진 후배야. 많고 많은 예식장 다 마다하고 음 만난 초등 학교라‥‥‥." "사실 경주는 대학교 때부터 좀 독특한 사람 아니었어? 생긴 것처럼 과묵하기보단.... 재 치, 있고 또 만능 스포츠맨이었지. 그런 걸 보면 영은 씨가 나온 초등 학교에서도 충분히 식을 을릴 수 있는 사람이야." "흰 비둘기는 안 날리더라도 고추잠자리에 진도 벽파진에서 팽목항까지 이어지는 파란 물 결을 타며, 갈애기들이 줄지어 합창하고 화동들 대신에 진돗개 암수가 뒤따를 거예요. 그만 한 대우를 받을 만한 사람이니까요. 사람의 공은 사람들이 살아보는 것보다 자연이 먼저 알 아보는 법이잖아요." 말을 마친 우영은 경주가 옆에라도 있는 것처럼 창 쪽으로 눈길을 주면서 담배 연기를 내 뿜었다. 논둑의 나락들이 누렇게 익어 가던 10월 초순이었다. 경주는 갑자기 대학원 시절에 만났 던 후배의 방문을 받게 되었다. 그는 도청에서 근무한다면서 경주의 낙향 소식을 듣고는 진 도에 일을 보러 왔다가 들렀다는 거였다. 경주는 후배에게 대학의 이런저런 사정들을 듣고는 문득 자신을 아껴 주시던 지도 교수님 이 떠올랐다 차후에 광주에 올라가면 꼭 한 번 찾아뵐 것을 생각하며 후배를 현관까지 배웅 했다. 후배가 떠난 후 대학원 시절의 은사님들이 자꾸 눈앞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렇게도 학계 로 돌아오라던 은사님들의 청을 뿌리치고 농토를 택했던 생각을 하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 다. 다행히 결혼식에서 만날 수도 있었지만 후배를 보자 이제 한번쯤은 그 분들께 인사를 드리러 모교를 찾아가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청첩장을 보낸 후이긴 했지만 인사 를 가는 것은 도리였다. 며칠 후 업무가 한산한 틈을 타서 경주는 승진이를 동반하고서 광주 학교로 향했다. 경주 는 회사에서 생산한 구기자주와 캔 박스들을 차 트렁크에 싣고서 차에 올랐다 서둘러 출발 한 탓에 오후 2시 무렵 학교에 도착했다. 상당히 많은 것들이 변해 있었다. 먼저 그 조그맣던 교문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어마 어마한 조형물이 교문을 대신하고 있었다. 그런 변화에도 관현로 아래로 늘어선 메타세쿼이 아는 여전히 푸르렀다. 경주는 지도 교수의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귀익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교수님 혼 자 계신 줄로 알고 들어선 경주는 사뭇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고 놀랐다. 그를 보자마자 교수는 반가워하며 일어나서는 그에게 자가와 어깨를 토닥이며 의자를 권 했다. 식사를 마친 후 교수들끼리 환담을 즐기던 중이었나 보다 교수는 그의 손을 잡고는 찾아와 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경주는 교수의 말에 송구스러움을 감추지 못하였다. 경주는 교수님과 저녁이라도 하면서 그 동안 하지 못했던 얘기들을 하려 했는데 몇 마디 안부 인사를 건네고 큰 연구실 문을 나섰다. 그가 문을 채 닫기도 전에 한 교수가 말했다. "이경주 씨, 학계로 돌아와야 하는데 아까워요. 많은 우여곡절 다 겪으면서도 저렇게 회생 하기가 쉽진 않았을 텐데‥‥." 경주는 텅 빈 복도를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유난히 구둣발 소리가 크게 복도를 울렸으며 교수의 방에서는 여전히 웃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경주는 다시 차에 올라 진도로 향했다. 승진은 시동을 걸며 물었다. "교수님들은 다 만나셨어라? 지는 오래 걸릴 줄 알았는디 생각보다 빨랑 나오셨구먼이 라." "응, 손님들이 계셔서 나중에 찾아뵙겠다고 하고 나왔어." 경주는 스치는 길가의 초목들을 바라보면서 지난날을 회상하면서 살풋한 감정에 젖어들었다.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던 젊 은 시절들이 시간을 물고 하나둘씩 펼쳐졌다. 모두가 오늘의 그를 있게 한 것들이었다. 경주는 교수실에서 들려 오던 여강사의 목소리를 지을 수가 없었다. '나에게도 저런. 멋지고 든든한 큰오빠가 있었으면... ..." 차창으로 보이는 붉은 노을이 추억처럼 스러져 가고 있었다.